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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141화 (141/163)
  • 141화

    “공녀님…….”

    마커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메이아의 오른손에 입맞춤을 하며 인사했다.

    메이아만 바라보며 돌진했던 마커스는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베르샤의 구겨진 인상은 알아채지 못했다. 오로지 그의 구겨진 인상을 알아챈 사람은 올리비아뿐이었다.

    “오빠, 숙녀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가 주었으면 해.”

    올리비아는 다급하게 마커스에게 나가라고 말했다.

    “여자들끼리 할 이야기 있으니 제발 나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 라. 버. 님.”

    마커스는 올리비아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메이아만을 올곧게 쳐다보며 물었다.

    “메이아 공녀님, 혹시 제가 있으면 방해가 되겠습니까?”

    “올리비아 영애를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할 게 많습니다. 마커스 영식 아니, 이젠 소후작이라고 하는 게 맞나요?”

    “예, 소후작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얼른 결혼을 하라고 다들 얼마나 눈치를 주던지.”

    마커스는 지금 이 순간 메이아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열정이 온몸을 휩쓸고 있는 기분이었다.

    “좋은 여성분을 만나실 거예요.”

    마커스는 메이아의 대사를 기다렸다는 듯 바로 아주 뻔한 말을 꺼냈다.

    “저는 메이아 공녀님 같으신 분이면 됩니다.”

    그리고 상상했다. 메이아가 ‘저라도 괜찮으시다면……’이란 말을 하기 기다리기도 전에…….

    “오. 라. 버. 님!”

    올리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커스를 크게 불렀다. 얼굴이 잔뜩 붉게 상기된 올리비아는 당장 마커스에게 나가라며 눈짓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올리비아는 곧 칼집에 손을 가져다 댄 베르샤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선 살기…… 아니, 살기를 넘어선 잔인함마저 느껴졌다. 마커스를 당장이라도 찔러 죽일 것 같았다. 아까 베르샤라는 이 호위 기사는 플로렌스 대공이 직접 호위로 붙여 준 사람이라고 메이아가 말했다.

    침이 저절로 꿀꺽 넘어갔다. 아무리 미운 남매 사이라 하더라도 마커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막아 줘야 하는 게 가족 아닌가!

    복잡한 생각이 올리비아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커스를 내보내는 거라 판단했다.

    “오라버님, 저 정말 화내기 전에 나가 달라고 말했습니다. 부탁이니 나가 주세요.”

    “나가라고?”

    “예, 제발요.”

    “알았어.”

    마커스는 혀를 차며 못마땅한 시선으로 올리비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강경하게 나가 달라고 부탁을 하는 걸 보니 정말로 여자들만의 중요한 대화를 방해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커스가 나간 뒤 메이아는 베르샤에게 문밖에서 기다려 달라는 말을 했다.

    베르샤는 인사하며 밖으로 나갔다.

    올리비아는 시녀에게 시원한 차를 가져다 달라 말했다. 도저히 뜨거운 차를 마실 수 없었다.

    “대체 언제 약혼을 하신 거예요?”

    “얼마 되지 않았답니다.”

    “아니, 약혼하신다면 저에게 편지라도 보내 주시지…….”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면서 지내다 보니 편지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약혼 준비도 직접 해야 했고요.”

    “직접이요?”

    “예. 플로렌스 대공가에는 어른이 없어서 저와 제 약혼자와 둘이서 준비해야 해서 무척 바빴습니다.”

    “그러셨군요…….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메이아는 붉어진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숙였다. 올리비아는 그녀의 모습에 무척 놀랐다.

    그동안 도도하고 살짝 미소만 짓던 메이아였다. 그런데 지금을 보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인형처럼 미소만 반복적으로 짓던 메이아가 약혼자인 플로렌스 대공에 대한 질문에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며 수줍어하다니!

    ‘귀, 귀여워!’

    올리비아는 흠흠 헛기침하며 기분을 진정시켰다. 메이아의 수줍은 얼굴이 심장에 너무 해로웠다.

    “말하자면…… 긴데……. 그와의 첫 만남은 엘른 항구였어요. 젠타스 귀족이 저에게 무례를 범했고, 그걸 옆에서 도와주신 분이 플로렌스 대공님이셨죠.”

    메이아의 테오도르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얼마 전에 퍼진 플로렌스 대공의 악의적인 소문이 떠올랐다. 그 소문의 남자와 지금 메이아가 이야기하는 남자가 동일 인물이 맞는 걸까?

    역시 소문은 소문인 건가?

    아니면 플로렌스 대공이란 남자는 소문대로 무척 나쁜 사람이지만 내 여자 앞에서만 착해지는 남자인 건가? 그렇다면 완전 로맨스 소설인데?

    올리비아는 메이아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녀가 이야기해 주는 테오도르라는 남자는 무척 자상하고 따뜻하고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 이야기가 너무 달달했다.

    “그래서요? 더 말씀해 주세요.”

    “그는 저에게 하늘에서 내리는 비 같았어요.”

    메이아의 이야기는 올리비아를 때론 가랑비처럼 천천히 물들어 가게 하고, 때론 소나기처럼 갑자기 빠지게 만들다가 때론 폭풍우처럼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메이아는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대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와 있으면 여기 가슴이 자꾸 기뻐해요. 들뜨고 설레고……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본 감정이었어요.”

    메이아는 이야기하다 보니 테오도르가 무척 보고 싶어졌다. 그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 달콤한 체향과 빨갛게 달아오른 뺨. 그리고 섬세하고 다정한 그의 손길까지도 그리워졌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그에게 다가가는 제 마음이 싫지 않더군요……. 전 제 상황이 너무 벅차고 힘들어서 밀어 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계속 저에게 다가왔죠……. 상처를 줬는데도 계속 웃으면서 괜찮다고…… 기다리겠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말끝이 흐려지는 메이아를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상체를 좀 더 메이아에게 기울이며 속삭였다.

    “다행이에요.”

    “네?”

    메이아의 평소 같았으면 절대 읽을 수 없는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보였다. 예전에는 웃음마저 인형같이 인위적이고 차가움이 느껴졌다면 지금은 인간미가 느껴지는 올리비아였다.

    “행복해 보여서요.”

    “행복이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은 겁쟁이가 된다고 해요. 저희 할머니가 해 주신 말씀이신데, 소중한 걸 잃어버린 사람은 또다시 소중한 걸 잃어버릴까 봐 소중한 것이 눈앞에 있어도 갖지 않는 멍청한 겁쟁이가 된다고 했어요.”

    “할머님 말씀이 이해가 되네요.”

    “그런데 지금 메이아 공녀님을 보면 무척 행복해 보여요. 플로렌스 대공님을 이야기할 때 저까지 예쁜 구름이 파란 하늘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올리비아의 말에 메이아는 ‘그렇게 보이는구나’라며 입 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공녀님이 소중한 걸 잃었다고 해서 다시 소중한 걸 만들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올리비아 영애의 말이 맞아요. 전 그를 밀어 냈어요. 하지만 무척 소중하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 생각은 멈추지 못했고요.”

    메이아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를 올렸다. 온통 테오도르의 생각이 머리와 마음을 지배해나가기 시작했다.

    메이아에게 있어 첫사랑일 것이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다는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만나고 어쩔 수 없는 마음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붉어진 뺨을 만지는 메이아를 응시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건 첫사랑이다. 자신의 친오빠인 마커스와 이루어진다는 꿈은 사라졌지만 메이아의 사랑을 응원해 주고 싶어졌다.

    “축하해요, 메이아 공녀님.”

    “고마워요, 올리비아 영애.”

    “혹시 파츠래리 황태자 전하도 공녀님이 약혼한 사실과 약혼자의 정체를 알고 계시나요?”

    그렇다면 파츠래리는 왜 플로렌스 대공의 험담을 한 것일까?

    메이아의 약혼자라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말이 된다.

    “아니요. 제 약혼자가 플로렌스 대공님이라는 건 가족 이외 올리비아 영애에게 처음 말합니다.”

    “그렇군요.”

    “생각보다 약혼자를 소개하는 일은…… 부끄럽네요.”

    메이아의 부끄러워하는 미소는 올리비아의 심장 고동을 통통 튀게 만들었다. 그리고 새삼 밝아진 그녀의 모습을 보며 올리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

    메이아는 공작저로 돌아와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은 바로 테오도르에 대한 소문이다.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소문을 낸 파츠래리를 효과적으로 밟아 놓으려면 악의적인 소문을 이용해야 된다.

    누가 눈에는 눈이라 했던가. 이럴 때는 눈에는 눈이 아니라 머리털까지 싹 다 뽑아 놔야 된다. 은혜든, 복수든 돌려줄 때 배로 갚아 주어야 된다.

    그렇기에 파츠래리가 스스로 소문낸 말도 안 되는 험담을 이용해서 그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잘근잘근 밟아 줄 생각을 했지만, 올리비아와 대화하면서 소문에 상처 받을 테오도르의 예쁜 얼굴이 저절로 떠오르자 마음을 콕콕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악의적인 소문을 오히려 유리한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지만…… 테오도르가 상처 받는 것이 더 걱정됐다.

    “아가씨, 물을 다 받았습니다.”

    “알았어.”

    곧바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욕조가 있는 욕실로 갔다.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나는 따뜻하고 맑은 물이 준비된 걸 확인하고 들어갔다.

    반신욕이 끝난 다음 유디의 정성 어린 마사지를 받았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페르젠 후작 영애의 집에서 무슨 일 있으셨나요?”

    유디는 메이아의 매끈한 다리를 마사지하다 한숨을 쉬는 메이아에게 물었다.

    메이아는 평소에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편도, 한숨을 쉬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러기에 유디는 그녀의 한숨에 신경이 쓰였다.

    “내 약혼자의 소문 때문에 그래.”

    유디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메이아가 한숨 쉴 정도라면 분명 그 소문의 정도가 생각보다 심할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평소처럼 화끈하게 밟아 주세요, 아가씨.”

    “사람들이 낸 악의적인 소문을 무서운 소문으로 바꾸면 그만이야……. 그래, 그만인데.”

    테오도르가 악인이란 소문을 더욱 무섭게 만들어 냉혈한 남자이니 까불면 안 된다는 인식을 심어 주면 그만이다. 그러면 카르펜 제국에 온 테오도르를 보고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원래도 함부로 대할 수 없지만 공포심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그에게 고개 숙이는 이들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나쁜 남자가 아니야. 날 사랑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는 남자란 말이야……. 그런 사람에게 악인이라는 소문을 더욱 부풀리는 게 내키지 않아서 그래…….”

    메이아는 말끝을 흘리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난 그가 상처 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유디.”

    “메이아 아가씨,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 받는 게 싫은 건 당연한 일입니다.”

    더 효율적인 방법을 알면서도 굳이 그 사람이 상처 받을까 겁내는…….

    “그래서 내가 겁쟁이가 되어 가는구나.”

    내가 겁쟁이라 욕을 먹어도 좋으니 테오도르가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

    “나답지 않은 생각들이 자꾸 떠올라……. 이상해.”

    사랑이란 감정은 사람을 순식간에 어른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겁쟁이로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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