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그나저나 저를 뵙자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공 각하.”
“혹시 카르펜 제국으로 돌아가실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해서 뵙자고 했습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와 바이올렛이 카르펜 제국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카르펜 제국으로 돌아가신다면 저는 말릴 생각이었습니다.”
“왜 말릴 생각이셨죠?”
“데미안 황자 때문입니다.”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답했다.
데미안은 데이빗과 바이올렛을 죽이기 위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 그렇다면 데이빗과 바이올렛이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꼭 죽이기 위해 이를 악물 게 뻔하지 않은가!
지금 카르펜 제국으로 돌아가는 일은 뱀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짓이다.
“그래서 제 사위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사위라는 말에 테오도르의 눈이 커다랗게 뜨며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사위님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사위라고 해 주십시오, 장인어른.”
저절로 입술이 실룩거리며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당장 연무장으로 뛰쳐나가 소리를 지르며 메이아 이름을 외치며 미친 듯이 크게 웃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에게 물었다.
“장인어른의 부탁이 무엇입니까?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무조건 들어드리겠습니다.”
“제가 어떤 부탁을 하실지 알고 다 들어준다는 겁니까?”
“제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을 하실 거란 생각에 답한 것입니다.”
“잘 파악하셨습니다.”
테오도르가 순둥순둥해 보이는 이미지와 다르게 묘하게 머리도 좋은 편이라는 걸 데이빗은 느꼈다.
“제 부탁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부탁 또한 제가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부탁하시는 거 아닙니까?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카르펜 제국으로 가서 제 딸을 지켜 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카르펜 제국에 있는 메이아에게 가고 싶다는 말을 하며 데이빗에게 바이올렛과 함께 대공저에 있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데이빗이 먼저 카르펜 제국으로 가 달라고 말해 주다니…… 이건 정말로 사위로 인정함과 동시에 공작저에서 지내라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
기뻐서 하늘 위로 날아갈 것 같은 마음을 억누르며 테오도르는 데이빗에게 말했다.
“그녀를 지키는 일이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대신 저도 부탁이 있습니다, 장인어른.”
무조건 알겠다고 말할 줄 알았던 테오도르를 보며 데이빗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무조건 알겠다며 끌려오는 것이 아니라 협상하려 드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입니까?”
“제가 카르펜 제국에 가서 메이를 지키고, 데미안 황자의 증거를 만들어 올 테니 장모님과 함께 이 대공저에 편하게 계셔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게 제 부탁입니다.”
진심을 담아 부탁하는 테오도르를 바라보며 데이빗은 오른손을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좋습니다.”
테오도르는 그가 내민 오른손을 맞잡으며 악수하며 활짝 미소 지었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녀오셨습니까? 아가씨.”
유디는 외출했다 돌아온 메이아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곧이어 건네받은 말은 메이아를 미소를 짓게 했다.
“페르젠 후작가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페르젠 후작가라는 말에 딱 한 사람이 떠올랐다.
“올리비아 영애의 편지야?”
“예, 맞습니다.”
파혼당하고 떠나기 전 그녀와 친구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카르펜 제국에 오면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올리비아였다.
편지를 건네받아 읽은 메이아는 연신 미소 지었다. 참 그녀다운 카드였다.
고급스러운 종이 재질과 단정한 글씨체도 인상적이지만 마지막 이름에 눈길이 갔다.
보통 편지에는 페르젠가의 올리비아라며 이름과 가문을 마지막 마무리 표시를 하지만 지금 올리비아가 보낸 편지에는 ‘당신의 친구 올리비아가’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방문한다고 답장을 써 줘야 되겠어. 유디, 편지지와 펜을 준비해 둬.”
메이아가 직접 답장을 쓴다는 건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상대라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보통 친한 친구의 초대를 받으면 방문할 수 있는 날과 시간을 적어 보내거나 받은 카드를 들고 직접 초대한 이의 저택으로 찾아간다.
갑자기 찾아가는 건 예의에 어긋나지만 그건 초대장 카드가 없을 때 이야기다. 올리비아는 갑작스러운 방문도 괜찮다고 카드에 적어 놓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페르젠 후작가를 찾아가도 예의에 어긋난 일이 아니게 된다.
이대로 찾아갈까? 고민이 되었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올리비아를 만나면 할 이야기가 한가득이다. 그중에 베르샤를 소개해 줘야 한다. 반가움에 급한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보다는 어떤 대화를 해야 될지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베르샤를 소개해 준 순간부터 약혼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갈 것이며, 이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또 꼬리를 물고 점점 커져만 가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기로 한 황후 마마의 티 파티에 참석하고 싶어 난리를 피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후 마마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겠지.”
그리고 오래간만에 맛본 인기인의 삶에 황후 엘르민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갈 것이다.
“힘을 준 만큼 그 곱절로 힘이 쭉 빠진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는데.”
파츠래리는 자신이 험담하던 플로렌스 대공의 약혼녀가 나라는 사실을 알면 무슨 표정을 지으며 무슨 말을 할까?
메이아는 테오도르는 열심히 험담한 파츠래리가 생각나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자꾸 울컥거리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야. 너무 조바심 낼 필요는 없어. 지금은 참을 때야.’
당한 만큼 철저히 되돌려 주면 된다.
이 조바심도 불타는 분노도 지금은 가라앉힐 것이다. 막다른 길에 몰린 기분이 들더라도 지금은 절대 터뜨리면 안 된다.
“올리비아 영애!”
“메이아 공녀님.”
메이아는 페르젠 후작가를 방문했다. 올리비아는 만나자마자 메이아의 양손을 붙잡으며 살짝 뺨을 붉혔다.
“제가 카르펜 제국에 온 걸 어떻게 아시고 편지를 보내신 거예요?”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오셨다는 걸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메이아 공녀님.”
기뻐하는 올리비아의 반응에 메이아는 천천히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올리비아 영애, 보고 싶었습니다.”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공녀님.”
올리비아는 짧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공녀님께서 없는 사교계가 얼마나 재미없어졌는지 아세요?”
파츠래리와 파혼을 한 뒤에 마탑을 떠난 메이아를 두고 사교계에선 그녀를 몹시 불쌍하게 여기는 동정론이 퍼졌다. 올리비아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사교계에 나서지 않았다.
사실 메이아가 돌아오면 함께 돌아다니며 라이벌에서 친구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친오빠인 마커스와 메이아가 결혼한다면…… 이란 상상까지 하면서 홀로 행복해했다.
“저도 올리비아 영애가 있는 사교계가 그리웠습니다.”
메이아는 촉촉하게 눈가를 적시며 말했다.
짧게 ‘호호’ 하는 웃음소리를 낸 올리비아는 메이아 뒤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호위가 바뀌신 거예요? 참 잘생긴 호위네요.”
호위가 바뀌었냐는 말에 메이아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올리비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세상에 지금 메이아가 얼굴을 붉힌 거야?
“저…… 사실…… 올리비아 영애…….”
“네, 말씀하세요.”
“지금 저를 호위하는 기사는 제 약혼자 가문의 제1 기사단장이세요.”
“지금 약혼자라고 하셨습니까?”
“……네.”
메이아의 말은 그야말로 폭탄 발언이었다. 파혼을 하고 난 뒤 그녀는 마탑에 쭉 있는 걸로 안다.
그런데 뜬금없이 약혼자?
머릿속에서 친오빠인 마커스와 메이아의 결혼에 대한 상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말문이 제대로 막힌 올리비아는 얼이 확 빠진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눈앞의 메이아와 베르샤를 번갈아 쳐다봤다.
올리비아의 머릿속은 지진이 난 것처럼 아니, 해일이 마을을 덮쳐 버린 것 같은 큰 충격에 빠졌다. 만약에 메이아가 다른 사람과 약혼이나 결혼을 한다면…… 마커스 내지는 데미안 황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대체 어느 가문과…….”
“베르샤.”
메이아의 부름에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온 베르샤는 자신을 소개했다.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가를 섬기는 아이작가의 베르샤라고 합니다.”
베르샤의 소개를 받은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최근에 플로렌스 대공가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다. 얼마 전부터 흉흉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시리우스 제국의 대공 가문의 이름이 분명 플로렌스 대공이었다.
“……페르젠가의 올리비아입니다.”
베르샤는 허리를 숙이고 예를 보인 다음 다시 메이아 뒤에 섰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며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메이아가 약혼을 했다는 것이다. 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것도 상대가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이라고? 맙소사! 소문을 듣자 하니 그 남자는 몹시 무례하다는데!
그리고 메이아가 걱정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플로렌스 대공은 마탑에 있는 아름다운 공녀의 소문을 듣고 그녀를 찾아갔을까? 어쩌면 메이아는 강대국의 대공이니 약혼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지금 메이아의 얼굴을 보면 어쩔 수 없이 한 약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올리비아 영애.”
“약혼을 하셨다는 소식이 갑작스러워서…….”
그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비아! 그리고 아아……, 메이아 공녀님!”
마커스는 복숭앗빛으로 물든 뺨과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메이아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