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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139화 (139/163)
  • 139화

    그녀의 부모님을 만난 건 다행이다. 살아 계셔서 기쁘다. 데이빗과 바이올렛이 살아 있단 소식을 들으면 메이아는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을 거다.

    어쩌면 뽀뽀를 해 주면서 칭찬해 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키스를 해 줄지도 모른다. 자신을 끌어안은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마음껏 쓰다듬으며 더 칭찬해 달라고 조를지도 모른다. 귓가, 목덜미, 뺨을 차례대로 입술로 훑고 내려가면서…….

    테오도르는 자신의 입술에 손을 대 보았다. 꼭 끌어안으면 그녀의 달콤한 입술을 수없이 맞닿았던 감각이 떠올랐다.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도리질했지만 자꾸만 보드라운 몸이 자신의 피부에 맞닿을 때가 떠오르니 하반신에 난감함이 느껴졌다.

    “후우…… 찬물로 샤워로 해야 되나…….”

    분명히 그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것만 생각해야 되는데, 그래야 되는데…… 자꾸만 메이아를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만 정신없이 그녀를 안고 있는 상상만 줄기차게 난다.

    테오도르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한 번 생각난 그녀의 상상은 간단하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자리 잡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 그리고 흐트러진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눈앞에 그려졌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메이아와 같이 있을 땐 멀쩡한 심장은 그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수시로 망가지고 아파 온다.

    테오도르는 힘겹게 오른손을 공중으로 올린 다음 마력을 주입하자 이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 손을 집어넣은 테오도르는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액자 하나를 꺼냈다. 액자에는 메이아가 싱그럽게 웃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요즘 테오도르가 제일 마음에 들어 하는 메이아의 초상화다.

    “후우…….”

    그녀의 웃는 모습이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서 심호흡을 하자 심장의 통증이 멎어 가는 게 느껴졌다.

    지금 당장 메이아에게 날아가고 싶었지만 손님이 와 있을 때 저택을 비울 순 없다. 그건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데이빗과 바이올렛은 자신의 장인어른과 장모다.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가족이 방문했을 경우에는 잠시 저택을 맡기고 집을 비워도 되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들에게 대공저를 맡기고 카르펜으로 가면 된다. 하지만 순순히 허락해 줄까? 그래도 부딪치지 않으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생각을 정리한 테오도르는 테이블 위에 종을 흔들었다. 문을 열고 바로 베나블이 들어왔다.

    *

    “바이, 괜찮은 거야?”

    “몸이 너무 몽롱하고 그냥 피곤해요.”

    바이올렛은 연신 하품을 했다. 가시지 않은 피곤 때문인지 계속 잠이 쏟아졌다.

    “바이, 자기 전에 식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바이올렛은 드레스를 벗은 다음 얇은 차림으로 침대에 쏙 들어갔다.

    “졸려…… 요. 식사…… 흐아아…… 보다는 잠…….”

    그 말과 끝으로 바이올렛은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때였다.

    똑똑.

    “베나블입니다, 데이빗 님.”

    데이빗은 노크 소리에 바이올렛이 깰까 봐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문을 닫으며 베나블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지?”

    “저희 주인님께서 만나 뵙길 청하십니다.”

    “그 전에…….”

    “예.”

    “의원 한 명을 보내 줬으면 해.”

    요즘 들어 바이올렛이 평소와 다른 몸 상태를 보여 줘 살짝 신경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달거리를 안 한 지 일주일이나 지나 그 ‘증상’이 의심스러웠다. 만약에 그 ‘증상’이 맞다면…….

    데이빗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입꼬리를 쓱 올렸다.

    “데이빗 님,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어디 아파서 그런 게 아니고 바이올렛이 많이 피곤해해서 몸 상태 좀 알기 위해서 불러 달라는 거야. 두 시간 후쯤 오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데이빗 님.”

    데이빗이 안내받은 곳은 서재로 쓰이는 것 같은 방이었다. 방 안에 커다란 창문 앞에 테오도르가 서 있었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과 함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테오도르는 데이빗 앞으로 다가섰다.

    “어서 오십시오.”

    눈웃음을 지으며 테오도르가 손을 내밀었다. 체격이 큰 만큼 손도 엄청나게 컸다.

    데이빗은 그와 악수를 나누며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부드러운 검은색 눈동자는 순간적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깊은 어둠이라 생각하게 만들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베나블은 은색 식기 세트가 담긴 트롤리를 밀고 들어왔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네.”

    테오도르와 베나블은 테이블 사이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베나블은 찻잔에 따뜻한 딸기 차를 따르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견과류 쿠키를 올려놓은 뒤 허리를 숙이고 트롤리를 끌고 나갔다.

    데이빗은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테오도르를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테오도르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원래의 피부로 돌아갔다. 자신을 통해서 누군가를 떠올리고 얼굴이 빨개진 걸까?

    데이빗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테오도르를 바라봤다. 메이아와 약혼을 했다지만 완벽하게 찬성한 마음은 아니었다.

    계획대로라면 흑마법사와 연관이 되었다는 증거를 찾아 데미안 황자를 치워 버린 뒤에 메이아와 파츠래리의 약혼을 파혼시키고 공작 위를 잇게 한 다음, 철저하게 고른 데릴사위를 맞이할 생각이었다. 물론 메이아 마음에 드는 남자로 말이다.

    계획은 완벽했다.

    하지만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그 누가 말했다. 계획 세운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데미안을 잡기 위한 증거는 찾기 어려웠고, 메이아와 파츠래리는 보기 좋게 파혼을 해 버렸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남자가 자신의 사위가 되게 생겼다.

    지금의 데이빗에게는 테오도르를 보면 아름다운 딸을 보고 첫눈에 반해 쫓아다니기만 했을 거란 부정적인 생각이 큰 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메이아의 선택을 믿고 있다. 그러니 딸의 선택을 받은 테오도르라는 남자를 믿어야 한다. 그게 부모로서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큰 신뢰다.

    마음에 차지 않은 남자이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약혼했다는 걸.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할 거다.

    “대공 각하.”

    “네.”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테오도르는 데이빗의 말에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 즉 사과받는 걸 싫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사과합니다.”

    “실수라는 건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인해 잘못된 상황들을 보고 실수라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튼튼하고 크고 멋진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그 높은 나무를 올라가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나무 기둥을 붙잡고 몸을 이용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올라가다 자꾸 미끄러지고 떨어집니다.”

    “예.”

    “자신의 힘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하다 발이 미끄러지고, 떨어진 걸 보고 실수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실수라는 건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과정일 뿐이지 잘못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실수하는 사람들의 사과를 진심으로 받지 않은 편입니다. 말 그대로 실수지 잘못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데이빗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스스로의 힘으로 나무를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스스로 올라갈 수 없는 무능력한 것들이 그 나무를 올라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요. 설사 그게 나무를 망가뜨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올라가는 걸 멈추지 않습니다.”

    테오도르는 데이빗이 말하는 크고 튼튼한 나무 한 그루가 메이아를 빗대어 말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대공 각하, 나무에 못을 박으면 어떻게 될까요?”

    “나무가 상처를 입습니다.”

    “그걸 모르는 이들이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못을 박으면 못을 뽑더라도 못 자국이 나무에 지워지지 않고 남는 걸 알고 있으면서 어쩔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못을 쾅쾅 박아 버립니다. 나무에 못질을 잘못하면 속 안이 썩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썩어 버린 나무를 보면서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면서 사과하고, 실수로 나무에 못을 박았다면서 변명하기 급급합니다. 뻔히 나무에 못을 박는 것이 어떤 건지 알면서 말이죠.”

    나무에 못을 대고 망치질한 순간 실수가 될 수 없다. 못을 박으면 나무가 어떻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저지르기 때문에 실수가 아닌 잘못이 된다.

    “하면 안 되는 짓을 알고 저질러 놓은 다음 사과한다는 건 무슨 마음일까요?”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하기 전 분명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면서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고 나중에 문제가 되면 사과 한마디에 반성한다.

    아니, 반성하는 척을 하면서 문제가 된 걸 문제가 되었다며 어쩔 수 없이 하는 억지 사과. 그걸 진심으로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피해자를 기만하는 행동이다.

    “다 알면서도 잘못을 저질러 놓고 사과하는 건 책임감 없는 짓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나무가 괜찮다면서 못을 박아도 된다고 허락했다 하더라도…… 그 나무를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못을 박은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

    이건 데이빗의 경고였다. 메이아를 책임지지 못할 행동은 하지도 말고, 잘못할 짓 따위 벌이지 말라는 경고.

    “전 그 나무를 무척 사랑하고 아낍니다. 만약 못 모르는 맹수가 발톱을 세우고 내가 사랑하는 나무를 긁어 상처 입힌다면 전 그 맹수를 최선을 다해 죽일 겁니다.”

    데이빗의 등 뒤로 노골적인 살기가 흘러나왔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을 담아 답했다.

    “전 나무나 꽃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걸 좋아합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무에게 최고의 비료만 뿌려 주고, 아름다운 새들이 둥지를 틀 수 있게 주위 환경을 개선할 것이며, 언제나 사랑한다는 말을 하며 물도 줄 것이며, 나무가 이곳에서 뿌리내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무를 사랑하는 이들도 행복해하는 나무를 보며 함께 행복해질 겁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하하하.”

    데이빗은 소리 내어 웃었다. 자신의 앞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말을 맞받아치는 그의 모습에 만족스러웠다. 사실 이런 말을 꺼내면 눈치를 채지 못하거나 눈치를 채더라도 ‘나무에 못을 박지 않겠습니다’라는 진부한 말을 할 줄 알았지만 테오도르는 기대 이상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만큼 메이아에게 진심이고 책임을 다해 사랑하겠다는 선전 포고를 자신의 앞에서 한 것이다.

    “대공 각하.”

    “예.”

    “정말 마음에 드는 대답입니다.”

    데이빗은 노골적으로 흘러나오게 한 살기를 거둬들이며 산뜻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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