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성국은 사람들을 납치해 흑마법사가 할 법한 잔인한 짓을 벌여 왔으며, 많은 증거들이 나온 상황이었다. 성국의 교황을 비롯해 신관, 성기사, 성녀를 존경한 만큼 사람들의 배신감이 크게 자리 잡게 되었다.
땅속에서 나오는 마물들은 교황이 집어삼키며 몸집까지 키웠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흑마법사와 성국이 손잡았다는 말에 힘이 실렸고 사람들은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니 지금 와서 마물과 흑마법은 상관이 없다 외쳐도 믿을 사람은 절대 없다.
물론 전쟁을 선포한 시리우스 제국 또한 사람들에게 굳이 진실을 말할 생각은 없다. 당연하다. 성국과의 전쟁을 벌이는 것과 약혼녀 구출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진실을 말하고 다닐 생각 또한 없었다.
“뭐, 사람들은 때론 진실보다 거짓된 연극을 더 선호하는 법이죠.”
“흑마법과 관련이 없는 마물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흑마법사 손에 소환된 마물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사람들을 공격한다.
하지만 성국에서 출몰되고 있는 마물들은 오로지 교황에게만 돌진했다.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물을 부리고 저주에 거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은 흑마법사뿐이니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하더라도 사람들은 오히려 진실을 거짓이라 우길 겁니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고 배운 지식만 허락하는 잣대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죠.”
“그렇다면 마물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데이빗의 물음에 록벨리온 공작은 후후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제 부인이 조사 중입니다.”
록벨리온의 부인 발언에 테오도르는 뜬금없다는 듯 물었다.
“얼마 전 약혼하지 않으셨나요? 대체 언제 결혼하신 겁니까?”
얼마 전 약혼했던 일이 떠오른 테오도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배가 부르기 전에 빨리 식을 올릴 생각이야.”
배가 부른다는 뜻을 알아챈 테오도르는 기쁘게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테오가 축하해 주니 기분이 좋네.”
싱글싱글 웃는 록벨리온 공작을 보며 테오도르는 낮게 부럽다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웃음기를 지운 록벨리온 공작은 데이빗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물과 성국 그리고 흑마법에 관련된 진실을 하츠벨루아 공작님과 공작 부인에게 말한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록벨리온은 둥글게 올라간 입매를 일자로 만들며 말했다.
“앞으로 플로렌스가와 가까운 가족이 되어 주실 분들이니 믿고 말한 것입니다.”
플로렌스 전 대공 부부가 없었다면 지금의 시리우스 제국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지금의 시리우스 제국을 존재하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을 구했지만 순식간에 부모를 잃은 어린 테오도르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다. 할 일만 하고 사람들이 다가오는 극도로 거부하고 감정을 죽이고 모든 걸 등한시했던 테오도르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약혼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카르펜 제국과 좋은 교류를 했으면 합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
“저희 메이가 여기서 지내는 방을 보고 싶네요.”
“베나블.”
“예, 주인님.”
“대공비 방을 보여 드리도록.”
“알겠습니다, 주인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바이올렛 님, 데이빗 님.”
데이빗과 바이올렛은 메이아가 약혼식 이후로 옮겨진 대공비 방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방문 앞에 보이는 건 마정석으로 꾸며진 복도와 문이었다.
“마법사이신 대공비 마마를 위해서 록벨리온령에서 공수해 온 최상급 마정석으로 만든 문과 복도입니다.”
바이올렛은 문에 손을 가까이 대보며 감탄했다.
“웅장하군요. 문손잡이와 무늬 세공도 훌륭하고요.”
“주인님께서는 대공비 마마께서 입는 것, 먹는 것, 걸어가는 길 등등 모든 것을 최상급으로 준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베나블은 메이아의 방문을 열었다. 그녀가 없더라도 언제나 방 안은 최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확 풍기는 은은한 라벤더향이 먼저 반겨 줬다. 심플한 인테리어와 유명 화가의 작품 그리고 천장까지 방 입구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신경 쓰고 꾸민 게 느껴졌다.
사용인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메이아의 방을 관리하는지 느껴지자 바이올렛의 입꼬리는 내려갈 줄 몰랐다.
“멋지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대공비 마마를 위해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방을 어느 정도 둘러본 바이올렛에게 베나블은 말했다.
“바이올렛 님과 데이빗 님께서 머무실 방도 준비했습니다.”
“그런가요?”
“대공비 마마의 방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공저에서 제일 좋은 방으로 준비했습니다. 계시는 동안 불편함 없이 두 분을 모시겠습니다.”
베나블의 눈가와 입매는 한없이 부드러워 보였지만 그의 눈동자 안쪽은 마치 먹이를 포획하기 전 맹수의 눈빛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베나블은 메이아의 부모인 데이빗과 바이올렛에게 플로렌스 대공가로 시집보내도 안심할 수 있다는 어필을 잔뜩 할 생각이었다. 이미 대공저 시녀장인 한나부터 모든 사용인들이 함께 참여한 계획 A부터 계획 D까지 준비를 해 두었다. 그들이 지금보다 더욱 플로렌스가를 마음에 들어 하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우선…… 퀴니 님과 아그니타 양을 만나게 해 드려야 되겠지.”
메릴에게 학대받아 탈출한 아그니타와 퀴니를 대공저에서 보호해 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플로렌스 대공가의 좋은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베나블은 씩 웃으며 바이올렛과 데이빗에게 대공저에 아그니타와 퀴니가 와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죽은 자가 되었던 바이올렛과 데이빗에게 대공저에 있는 아그니타와 퀴니에게도 계속 비밀로 해야 되냐 물었다.
“퀴니와 아그니타가 이곳에 있다는 건가?”
데이빗은 놀라 베나블에게 되물었다.
“예, 데이빗 님, 바이올렛 님. 퀴니 님은 화가로서 대공저와 1년 계약을 맺으셨고, 아그니타 양은 대공비 마마를 따라오셨습니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퀴니가 이곳에 계약직으로?”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물어보시면 됩니다.”
“혹시 그들은 공작저로 돌아갈 예정이 있는 건가?”
“단연코 현재는 없습니다.”
“그들을 불러 주게.”
당연한 일이지만 화가 퀴니와 아그니타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살아 돌아온 데이빗과 바이올렛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바이올렛 님!”
“아그니타…… 퀴니!”
바이올렛이 아그니타를 보자마자 손을 잡으며 반가워했고, 화가 퀴니 또한 데이빗을 보며 눈물 흘렀다. 그들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
데이빗과 바이올렛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안내받은 뒤 응접실 안에 록벨리온 공작과 테오도르만 덩그러니 남아 남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흑마법과 성국 그리고 데미안 황자까지 엮어 넣는다면…… 꽤 재밌는 일이 발생할 것 같습니다.”
아니, 재밌는 일보다는 지긋지긋한 거머리 데미안을 치워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더 컸다.
“저도 록벨리온 공작이 교황과 성국을 치워 버린 것처럼 데미안 황자와 카르펜 제국을 치워 버리고 싶습니다.”
“물론 테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철저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곤란해. 잡초는 밟을수록 더 억세지거든. 그런 잡초를 뽑기 위해서는 뿌리를 뽑는 게 아닌 뿌리 내린 토지까지도 다 뒤집고 불태워 없애야 해.”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결혼식은 언제 올리십니까?”
“다음 주.”
“바쁜 와중에 메이의 부모님을 모시고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이야. 난 전 대공 부부에게 맹세했어. 당신들이 못다 한 행복과 사랑을 테오가 모두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그리고 넌 지금 행복과 사랑을 잡은 남자가 되었어. 그걸 소중히 지켜 줄 의무는 나에게 있어.”
폭정을 일삼은 시리우스 2세를 몰아세우기 위해 황태자였던 시리우스 3세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치열한 전투 도중에 플로렌스 전 대공 부부는 죽음을 맞이했고, 그들의 죽음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록벨리온 얀투스였다.
<안 돼!>
눈을 감으면 선명히 떠오르는 두 사람.
눈을 감는 순간에도 자신의 아들인 테오도르를 부탁한다면서 살기 좋은 시리우스 제국으로 만들어 달라 부탁했다.
“테오, 넌 행복해져야 해. 이건 의형제로서만 진심으로 말하는 게 아니야.”
록벨리온 공작은 온화하게 미소 짓는 테오도르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명백히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이다.
“역시 사랑은 좋아.”
“예……, 전 그녀를 만나고 비로소 안정을 찾았고, 행복해졌습니다.”
그녀의 푸른 바다와 같은 깊은 눈동자는 언제나 안식을 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예전에 행복한 게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행복하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
“다행이군. 사실 오필리아 황녀와 결혼할까 봐. 조마조마했었다고.”
“얀 형을 쫓아다닌다는 황녀 말입니까?”
테오도르는 록벨리온의 애칭을 부르며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 심지어 내 약혼녀까지 건드려서 황궁을 뒤집을 뻔했지. 아니, 뒤집은 건가.”
오필리아 황녀를 떠올리자 록벨리온 공작은 몸서리치며 자리에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이공간을 열어 보석 하나를 꺼내 테오도르에게 건넸다.
“흑마법사와 계약한 사람이 이 보석을 만지면 보라색으로 반짝 빛날 거야.”
“계약한 사람이 아니라면 빛을 내지 않는 겁니까?”
“빛을 내지 않지. 이 마정석에는 특별한 마법 부여가 되어 있거든. 만에 하나 데미안 황자를 만나서 빛을 낸다면 계약자라는 건 100%야.”
“무슨 원리인 거죠?”
“이 마정석엔 흑마법의 기운을 빨아들이고 그 힘으로 반짝반짝 빛을 내는 거야.”
“신기하군요.”
“안톤이 고생 꽤나 했지. 카르펜 제국으로 가거든 그 보석을 데미안 황자가 만질 수 있도록 해. 만약 빛이 난다면 얼른 나에게 편지를 보내.”
“알겠습니다.”
데이빗은 데미안 황자가 흑마법사와 계약한 사람이 확실하다고 말했지만 록벨리온 공작은 한 번 확인을 해야 된다면서 쐐기를 박는 말을 했다.
“하츠벨루아 공작에게 데미안 황자가 범인이라고 말하고 죽은 부하의 말을 못 믿어. 그러니 확인을 한 번 더 할 뿐이야. 뭐든지 신중해야지.”
“알겠습니다.”
테오도르는 록벨리온 공작이 건넨 보석을 받아 자신의 이공간 속에 넣었다.
“난 이젠 가 볼게.”
“식사는 하지 않으십니까?”
“결혼 준비 때문에 바빠. 그리고 가는 길에 딸기 좀 따 갈게.”
“임신하신 공작 부인에게 가져다주시려는 거군요.”
“맞아. 내 여자가 우리의 아이를 가진 일은 멋진 일이지. 테오도 나중에 경험할 일이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무척 기쁘고, 가슴이 벅차올라서 심장이 멈출 것 같았지.”
기지개를 피며 떠날 준비를 하는 록벨리온 공작은 테오도르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결혼식에 최대한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만 바쁘면 참여 못 합니다.”
“참석하지 못한다면 선물이나 보내 줘.”
씩 웃는 록벨리온 공작의 얼굴에선 웃음이 한가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