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예전 제 장인어른께서 바이올렛과 저와의 결혼을 반대할 때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딸 가진 아빠가 되어 보니 장인어른의 심정이 무척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죠. 어쩌면 나는 장인어른보다 더하면 더할 아주 지독한 장인어른이 될 거라는 걸 말이죠.”
데이빗은 잠자코 테오도르의 표정을 살피며 입술 꼬리를 서서히 올렸다.
“제 딸을 무례하게 껴안은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 중입니다.”
테오도르는 한순간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데이빗은 유람선 위에서 메이아를 껴안은 남자가 자신이라는 걸 알고 말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테오도르는 심호흡하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유람선 위에서 메이아를 끌어안은 일에 대해 돌려 묻는 거라면 자신 있게 몇 번이나 말할 수 있다.
“해적들의 칼이 그녀에게 향해 있었고, 남자는 몸을 날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껴안았을 겁니다. 머릿속에 오로지 지켜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을 겁니다.”
테오도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때 당시의 감정을 거짓 없이 말했다.
“첫눈에 반한 그녀 대신 칼이든, 화살이든 맞기 위해서 말이죠.”
메이아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전율.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사랑이란 걸 깨닫기도 전에 이미 몸과 마음은 그녀를 지켜야 된다는 걸로 꽉 차 있었다.
“앞뒤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밖에 모르고 한 행동이었을 겁니다.”
긴장감이 살짝 감도는 침묵이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침묵을 먼저 깬 건 데이빗이었다.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몸을 날린다는 건 꽤 로맨틱하지만 다음부터는 몸을 날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역시 저라는 걸 알고 질문하신 거군요.”
“맞습니다. 앞으로 제 딸아이의 목숨을 살리려는 행동은 하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해할 수 없는 데이빗의 말에 테오도르의 눈에 적개심이 차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그녀의 부모님이라 하더라도 그의 말은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바이올렛은 결혼 전에 기사였습니다. 그녀는 대공 각하처럼 몸을 날려 저 대신 화살이나 칼에 맞아준 일이 있었죠. 전 그때의 기분을 결코, 메이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랑해서 목숨을 내놓는다는 건 상대방의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나 대신 죽는다 하더라도 상대방은 전혀 행복해지지 않을 텐데…… 오히려 나 때문에 다쳤다고…… 그리고 죽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예전 바이올렛이 자신을 쫓아다니던 스토커들에게 대신 칼이나 화살에 맞고 쓰러졌을 때 느꼈던 죄책감 그리고 자괴감이 해일처럼 몰려와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럼에도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이 너무 못나 보였다.
“전 만약 그런 상황이 또 생긴다면 주저하지 않고 똑같이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릴 겁니다. 꼭 그렇게 할 것입니다.”
테오도르의 말에 데이빗은 차갑게 응대했다.
“책임감이 없으신 행동입니다. 플로렌스 대공가라는 가문의 무게를 사랑과 바꾸시려는 겁니까?”
대공가를 책임지는 가주로서 사랑 때문에 쉽게 목숨을 내놓는 걸 지적한 데이빗의 날카로운 지적에 테오도르는 담담히 대답했다.
“전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하게 된 건 처음입니다. 계속 메이의 미소를 보고 싶어서 그녀가 원하는 모든 걸 다 해 주고 싶어집니다. 그녀는 너무 사랑스럽고 저에게 덧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물론 가문의 무게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걸 아셨으면 합니다. 메이에 대한 저의 사랑을 바꿀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않으며, 제 사랑의 무게는 생각하신 것보다 많이 무겁습니다.”
테오도르의 말을 듣던 바이올렛이 낮게 웃었다. 우직하면서도 올곧게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말하는 테오도르의 대답에 바이올렛은 만족스러워했다.
뭔가 결심한 표정의 테오도르는 자리에 일어서 데이빗과 바이올렛에게 허리를 숙였다.
“인사를 너무 늦게 해 죄송합니다. 저는 플로렌스 대공가의 가주, 테오도르입니다. 그리고 하츠벨루아가의 메이아의 약혼자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에 데이빗은 한껏 미간을 좁혔고, 바이올렛은 웃으며 테오도르에게 말했다.
“메이와 어떻게 만나고 약혼까지 갔는지 궁금한데 말씀해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바이올렛은 기분 좋게 웃으며 테오도르에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메이는 그동안 마탑에 있던 게 아니고 이곳 대공저에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공작 부인.”
“공작 부인이 뭐예요. 편하게 장모님이라고 불러요.”
바이올렛에게서 장모님이라고 불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자 테오도르의 표정이 밝아졌다.
“알겠습니다……, 장…… 모님.”
수줍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바이올렛의 눈은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그걸 본 데이빗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데빗, 표정을 풀어요.”
“바이, 난 표정을 풀고 있어. 봐 봐. 미간도 안 찌푸리고 있잖아.”
바이올렛의 말에 데이빗의 얼굴에서 잠시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려 버렸다.
그때였다.
짝짝.
박수를 치며 주목시킨 사람은 록벨리온 공작이었다.
“이젠 개인적인 말씀은 나중에 더 하시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죠.”
테오도르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살아 있다는 건 매우 기쁘지만 바로 메이아에게 날아갈 수 없다는 현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바람을 타고 그녀에게 날아가는 상상만 할 뿐이었다.
“요번 성국과의 전쟁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 록벨리온 공작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다면 성국은 흑마법과 관련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성국이 행했던 모든 일은 흑마법사와 똑같으니 똑같이 묶어 보는 게 맞다고 봅니다, 하츠벨루아 공작.”
소수만 아는 일이지만 성국의 교황은 록벨리온 공작의 약혼녀를 납치했다. 또한, 시리우스 제국의 황가 일족을 암살하려고 했다. 그리고 많은 평민들을 학살한 일 때문에라도 성국은 없어져야 된다고 록벨리온 공작은 말했다.
“그들은 성력을 지닌 남자나 여자, 심지어 그림자 일족까지 납치해 그들의 힘을 쥐어짜 내 죽이고 식인까지 했다 합니다.”
데이빗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성국의 진실에 놀람을 숨길 수 없었다.
“그 정도면 흑마법사들이 하는 급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마법사들이 교황의 상태를 보고 흑마법이라 할 수 없는 게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순수한 어둠, 좀 더 나아가면 편안한 밤이 느껴진다고들 했죠.”
“하지만 마물들이 튀어나오고 있다면 흑마법과 관련 있는 게 아닙니까?”
록벨리온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신종 마물에게서 더러운 흑마법의 기운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별과 달이 구름에 가려진 어두운 밤. 두 눈을 감으며 보이는 암흑이란 느낌이 좀 더 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흑마법사와 엮어 놓아야지만 전쟁 선포할 때 주의 제국들에게 지지받을 수 있어 흑마법과 성국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증거를 살짝 조작했지만 성국이 워낙 악행을 많이 저질러온 탓에 증거를 의심하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해했습니다, 록벨리온 공작님.”
“물론 음지에 숨어 사는 흑마법사들이 몸서리치며 부정하겠지만 그들이 튀어나와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입장 또한 아니니…….”
록벨리온 공작은 성국과 관련 없다고 말하는 흑마법사가 나타난다면 바로 죽일 생각이었다. 충분히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잘근잘근 밟아 줄 그의 생각을 읽은 것인가? 다행히 나서는 흑마법사들은 없었다.
“그나저나 데미안 황자가 흑마법사와 계약한 자라는 증거는 저희 쪽에 없으니 살짝 실망하셨겠습니다, 하츠벨루아 공작님.”
근심이 가득한 얼굴의 데이빗에게 테오도르는 심각하게 말했다.
“데미안 황자가 흑마법사와 무슨 계약을 맺었는지도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메이를 원한다고 했을 가능성을 높게 봅니다.”
“그건 저희도 생각하는 부분입니다만…….”
데이빗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 계약 중에서는 사랑을 이루는 게 하는 계약은 절대 없습니다.”
“흑마법의 계약은 돈, 명예, 권력을 얻게 하는 계약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가장 손쉽게 가질 수 있게 해 주고 계약자를 쉽게 망가뜨리면서 부정적인 기운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죠.”
“데미안 황자는 돈도, 권력도, 가지고 있는 편이니…… 흑마법사와 무슨 계약을 했는지 알 수 없어 저희도 답답합니다.”
이야기가 오고 갈수록 응접실의 분위기가 서서히 가라앉아 버렸다. 테오도르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의견을 내놓았다.
“데미안 황자가 흑마법사와의 계약한 자라는 증거가 필요하겠군요.”
“증거 찾는 게 쉽지 않습니다.”
데이빗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를 보며 테오도르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증거는 만들면 될 일입니다.”
테오도르의 말에 데이빗은 물었다.
“저희도 그렇게 해 보려고 했으나 흑마법사와 계약자 사이의 증거를 찾거나 만들기 위해 그동안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노력에 비해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테오도르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공 각하.”
“저희 시리우스 제국은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성국에게 전쟁을 선포하였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의롭게 승리했습니다.”
테오도르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데이빗의 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 채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와 성국이 관련 깊다는 증거를 시리우스 제국이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데미안 황자 이름 한 줄 넣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