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소녀에게 건네준 아티팩트는 어떠한 소리도 저장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데이빗은 소녀가 깊은 잠에 잠들었을 때 아티팩트를 가지고 나오게 해 무슨 일을 당했는지 그 속에 저장된 걸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된 진실.
[저는 남서쪽 파리엔즈 마을에 있는 고아원에 살았어요. 열여덟 살이 되면 독립을 해야 되었는데 원장님께서 일자리 소개서를 한 장 주셔서 가는 길이었어요.]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전 팔려 간다는 걸 알게 되었죠.]
[고문받던 언니 한 명이 죽었어요. 언니의 이름은 레이첼이었어요. 약혼자와 함께 납치당했다고 했어요.]
[처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었어요.]
[입에 솜뭉치를 쑤셔 넣어서 혀를 깨물고 스스로 죽을 수도 없었어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절 고문하던 사람이 흑마법사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는 제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고 즐거워했어요……. 소리를 지를수록 좋아했어요. 입을 꾹 다물면 소리 지를 때까지…… 흡…….]
흑마법사가 노예 매매와 연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데이빗은 푸링에게 부탁해 소녀의 기억을 지우도록 했다. 그녀 또한 그걸 간절히 원했다. 그렇게 해 줄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지워진 날 그녀의 얼굴은 세상 누구보다 평온해 보였다.
“카르펜 제국을 뒤에서 지배하고 있는 집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들은 노예매매는 기본이며 마약과 밀수, 도박, 사기 등등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봐주는 사람이 흑마법사라는 이야기군요.”
“맞습니다, 대공 각하.”
이야기를 듣던 테오도르의 미간이 한층 좁아졌다.
“하지만 흑마법사는 혼자서 움직이지 못합니다. 제가 알기론 계약한 자가 있어야지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이죠.”
그 계약자를 알아내기 위해 많은 부하들이 희생됐다.
그리고 어느 날이었다. 도박장에 잠입을 한 부하가 찾아왔다.
<공작 각하,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루다, 갑자기 무슨 말이지?>
루다는 뭔가 각오가 된 듯한 필사적인 얼굴이었다.
<저희 가족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제가 영광스럽게 죽었다는 것을요.>
<죽는다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공작 각하를 살해하려고 합니다. 데미안 황…….>
뿌득, 빠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목이 꺾이며 머리가 터졌다. 피가 분수처럼 치솟아 올랐다. 방 안이 온통 빨갛게 되었다.
<아무래도 일하는 자들에게는 발설하면 죽게 만드는 저주를 건 모양이군……. 너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루다 알케토.>
“부하의 죽음으로 데미안 황자가 흑마법사와 연관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리고 그가 우리 부부를 죽이려고 했다는 걸 알게 되어 황제 폐하에게 비밀리로 보고를 했습니다. 물론 황제 폐하에게는 데미안 황자가 흑마법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빼고 노예 매매상을 잡기 위해 잠복해야 된다고만 전했습니다.”
데미안을 아끼는 황제 폐하에게 무작정 당신 아들은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순 없다.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말을 꺼내야 된다. 그래서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왜 흑마법사와 함께하는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황태자 자리를 얻기 위해서 그런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돈? 명예? 권력? 대체 원하는 게 무엇일까? 설마…… 아직도 메이아를 원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데이빗은 눈을 감으면 아직도 데미안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데미안 황자님, 새를 왜 죽이신 겁니까?>
<메이아의 시선을 빼앗아 가서 굉장히 싫었어.>
<메이는 새를 좋아합니다. 죽은 걸 알면 슬퍼할 겁니다.>
<메이가 슬퍼? 왜?>
<좋아하는 무언가를 잃으면 사람은 슬퍼합니다.>
<괜찮아. 새가 멀리 날아갔다고 하면 돼. 마침 하츠벨루아 공작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데미안은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피 묻은 손을 옷에 쓱 닦았다. 그리고 죽은 새의 시체를 발로 차 버렸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메이아 공녀와 결혼시켜 줘.>
<데미안 황자님,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만 하면 안 돼. 난 메이아 공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아바마마한테도 말할 거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리고 약한 동물을 죽이고 웃는 괴물과 메이아를 결혼시킬 생각은 조금도 없다. 데미안 발에 차여 힘없이 뒹구는 새의 시신이 꼭 메이아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불안했다.
그렇다고 황가의 결혼은 세 번 이상 거절할 수 없다.
<메이아 공녀가 너무 좋아.>
괴물이 무표정한 얼굴로 달콤한 말을 내뱉는 모습은 괴기스러웠다.
황가에서 데미안과 메이아의 결혼시키는 걸 막기 위해 데이빗은 큰 결심을 했다.
<저희 딸이 비롯 어리지만 파츠래리 황태자와 약혼시켰으면 합니다.>
<그러면 하츠벨루아가는 황제파가 되겠다는 것인가?>
<예.>
오랫동안 중립을 지켜왔지만 메이아와 데미안의 약혼을 막기 위해 기꺼이 황제파 편에 섰다.
황가에서 계속 데미안 이름으로 약혼을 밀어붙이면 세 번 이상은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귀족파의 세력이 커져 걱정이 많았는데…… 균형이 맞춰지겠군. 아니, 오히려 황제가 될 파츠래리의 지반이 단단해지겠어.>
파츠래리와의 약혼을 통해 메이아를 데미안과의 결혼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공작이 원하는 게 무엇인가?>
<메이를 황후 자리에 앉히는 것입니다.>
아니, 메이아가 안전하게 행복하게 지내는 것.
<하하, 보기보다 야망이 있구만.>
파츠래리와 메이아의 약혼이 결정되고 난 뒤 데미안은 크게 자신을 원망했다.
<하츠벨루아 공작…….>
<제 딸은 훗날 카르펜 제국의 황후가 될 것입니다, 데미안 황자님.>
<내가 메이아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잖아!>
<황자비로는 제가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내가 황태자가 되면 되는 건가?>
<전 파츠래리 황태자를 황제로 만들 생각입니다.>
<하츠벨루아 공작!>
아직 어린 소년의 눈빛은 섬뜩하면서도 익숙했다.
‘사랑해, 데이빗. 너만을 평생 쫓아다닐 거야.’
‘바이올렛을 죽이면 나한테 돌아와 줄까?’
데미안은 자신을 쫓아다니면 괴롭혔던 스토커의 눈빛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파츠래리와 메이아를 약혼시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딸아이에게 죽은 척하고 흑마법사의 증거를 잡으러 다녀야 된다는 말을 할까 고민도 했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흑마법과 관련되어 잘 해결이 된다면 괜찮지만 만에 하나 잘못되었을 경우가 염려되어 차마 말하지 못했습니다.”
“대공 각하.”
바이올렛은 테오도르를 부르며 싱긋 웃었다.
“예.”
“제 딸아이라면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 순간부터 함께 싸우려고 했을 겁니다. 저희는 그걸 원치 않았기에 숨겼을 뿐입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위험한 구멍에 밀어 넣겠습니까? 물론 우리의 실종으로 상처받았을 수 있지만 그 또한 극복할 거라 엄마로서 믿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테오도르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리운 표정과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딸기 차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은 데이빗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는 깊은 골짜기에서 그들이 덮치기를 기다렸습니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대로 저희는 골짜기로 떨어졌습니다.”
“너무 위험하셨습니다.”
“떨어지더라도 살 수 있는 방법을 미리 모색해 놓았습니다. 죽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순간을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데이빗은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는 외향을 바꾸는 반지를 끼고, 비밀리에 조사했지만 다른 제국에까지 퍼진 노예상을 덮쳐도 흑마법사를 찾을 수 없었죠. 그리고 시리우스 제국과 성국의 전쟁 선포와 성국과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록벨리온 공작을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플로렌스령에서 흑마법사와 관련된 노예상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대공 각하를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데이빗은 열이 받았는지 인상이 굳어지며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흑마법사고 뭐고 다 그만두고 다시 공작저로 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힘드셨겠군요.”
“힘든 것보다는 배신감 때문에 공작저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데이빗의 미소가 점차 어두워졌다.
“제 딸아이가 파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 것도 아니고 당했다고 하니 굉장히 열이 받더군요. 그렇지만 그 뒤의 소문이 더더욱 열받게 하더군요.”
“무슨 소문 말씀이십니까?”
“데미안 황자가 제 딸아이를 황자비로 맞이하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메이아가 황가에서 내쳐진 걸 알게 된 순간 분노했다. 그리고 데미안이 노린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된 것이다. 혼자가 된 딸을 황자비로 맞이하기 위해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며 그 목적을 위해 흑마법사와 계약한 것이다.
데이빗은 상당히 못마땅한 표정과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파혼해도 상관은 없었습니다. 어차피 데미안 황자 및 날벌레들이 꼬이지 말라고 약혼해 놓은 것뿐입니다. 적당할 때 파혼한 뒤에 하츠벨루아 공작가의 가주로 딸아이를 앉힌 다음 적당한 데릴사위나 하나 받으려고 했었습니다.”
그의 말을 경청하던 테오도르는 자신을 관찰하는 데이빗의 서늘한 시선과 마주쳤다. 등에서 식은땀이 계속 났다.
“딸아이의 소식은 계속 들렸습니다. 파혼을 당하고 마탑으로 떠났다는 소식에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죠. 마탑만큼 안전한 곳은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 딸아이의 소식은 아쉴롬 영식의 신문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유로운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딸아이가 마탑으로 가는 유람선 위에서 해적들에게서 사람들을 구한 것까지는 잘 읽었는데 그 뒤에 어떤 남자가 제가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딸아이를 끌어안았다는 기사를 읽고 사실 열받아 있는 상황입니다.”
데이빗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앞으로 굽히더니 눈을 접으며 아름답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푸른 동공에서는 웃음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제 딸아이는 무척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따라다니는 날벌레들을 방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껴안아 버렸다는 기사를 본 제 심정이 어떨 것 같습니까? 플로렌스 대공 각하.”
테오도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표정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