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테오도르는 록벨리온 공작과 그가 데리고 온 손님들이 있는 다이아몬드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베나블의 말을 이해했다.
“아…….”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 갔다.
눈부신 은발에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 눈동자. 테오도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응접실에 앉아 시선이 마주친 사람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커다란 테이블 사이에 두고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오도르의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곧게 편 자세로 미소를 살짝 지었다.
잘 정돈된 은빛 머리카락에서 흐르는 윤기와 얼굴만 보면 아름다운 미의 여신같이 보이는 남자는 메이아와 무척 닮았다.
푸른 눈동자와 정리가 잘된 눈썹과 손은 옆에 여성의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여성은 보랏빛 눈동자와 붉은 머릿결이 무척 탐스러운 미인이었다.
분명 혼자 놓고 본다면 미인이 맞지만 미의 여신 같은 남자와 같이 있어서 그런지 눈길은 오히려 남자에게만 향했다.
하지만 너무 메이아와 닮았다. 머리 색과 눈동자까지 모두…….
<아직 부모님의 시신을 찾지 못했어요.>
메이아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설마?’라는 생각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은발의 남자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가슴에 손을 대고 허리를 살짝 숙이며 테오도르에게 귀족의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플로렌스 대공 각하. 저는 카르펜 제국의 하츠벨루아가의 데이빗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옆의 여성도 함께 귀족의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플로렌스 대공 각하. 저는 카르펜 제국의 하츠벨루아가의 바이올렛입니다.”
인사를 받은 테오도르는 선 채로 얼어 버렸다.
록벨리온 공작은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흥미롭게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선 채로 얼어 버린 그를 지켜본 록벨리온 공작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짧은 웃음을 갈무리하며 데이빗과 바이올렛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웃어서.”
록벨리온 공작의 웃음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의 눈동자는 계속 흔들렸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눈앞의 사람은 메이아의 부모님이다. 살아 있었던 거다. 살아 있다는 걸 알면 메이아가 정말 좋아할 거라는 생각까지 하고 정신을 가다듬은 테오도르는 긴장을 풀고 또 풀기 위해 집중했지만 쉽게 풀리지 않았다.
“테오도르 대공 각하, 자리에 앉으시죠.”
긴장한 그를 록벨리온 공작이 이끌었다.
데이빗과 마주 앉은 테오도르의 손바닥에는 땀이 차올랐다. 심장이 너무 쿵쾅거렸다.
그리고 예전에 들었던 데이빗에 관한 보고가 떠올랐다.
데이빗의 별명은 정의로운 미모다. 그가 사람을 죽여도 용서받을 수 있는 미모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만큼 눈에 띄는 미모였다. 메이아와 똑 닮은 만큼 무척 아름다웠다.
“대제국의 플로렌스 대공 각하께서 소국의 공작에게 뭘 그리 긴장하시는 겁니까?”
긴장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여자의 부모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어떻게 긴장이 안 될 수가 있는가!
최대한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어오르며 자제가 되지 않았다.
데이빗은 3초 정도 물끄러미 테오도르를 보고 있으려니 문득 예전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이올렛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안 됩니다, 공작님. 제 딸을 여자들의 공공의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예쁘장한 미모 때문에 쫓아다니는 스토커 수만큼 바이올렛의 부모님은 자신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날 쫓아다니는 여자들과 남자들로 인해 딸이 힘들어하는 걸 볼 수 없다면서 말이다. 설득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나 힘들었던가!
결국 바이올렛과 합의하에 외박을 하고 소문을 퍼지게 만들어 억지로 결혼으로 밀어붙였다.
그때 결혼 허락을 받지 못했던 기억이 왜 스쳐 지나갔을까?
그리고 록벨리온 공작은 뭐가 저리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을까?
대체 뭘까?
뭔가 자꾸 외면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데 왜일까?
“데이빗, 왜 그러세요?”
데이빗을 주시하던 바이올렛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푼 그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대제국의 플로렌스 대공 각하 앞이라 긴장했나 봅니다, 바이올렛.”
바이올렛은 데이빗만 들을 수 있도록 낮게 속삭였다.
“긴장은 대공 각하가 심하게 하신 것 같은데요?”
테오도르의 등 뒤에서 쉬지 않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번에 플로렌스 대공령에서 인신 매매업자와 노예들을 구출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예, 제 약혼녀 덕분입니다.”
살짝 붉어진 뺨을 긁적이며 말하는 테오도르를 보며 데이빗이 말했다.
“약혼녀분이 능력이 뛰어난가 봅니다.”
“그녀는 훌륭한 마법사입니다. 그녀 덕분에 흑마법과 인신매매가 관련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베나블은 평소 같지 않게 살짝 넋이 나간 채 말하는 자신의 주인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그렇지 않아도 인신매매 관련된 일 때문에 플로렌스 대공 각하를 뵙고 싶었습니다.”
사건은 평범한 날에 일어났다.
“이름은 레이첼. 하츠벨루아가에 충심이 깊으며 바이올렛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기 때문에 저희가 무척 아끼는 하녀 중 한 명이었습니다.”
짧은 침묵 뒤, 데이빗은 한숨이 섞인 입을 열었다.
“어느 날, 휴가를 받은 레이첼이 약혼자인 발드와 함께 데이트를 하다 실종이 되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도 발드와 레이첼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기사들을 풀어 행방을 알아봤지만 마치 증발이라도 된 것처럼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이 사라지고 한 달 이후, 공작령 외곽 숲속에서 짐승에게 파헤쳐지고 뜯긴 시신 한 구를 발견하게 됩니다.”
테오도르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 시신이 레이첼이라는 하녀였겠군요.”
“맞습니다, 대공 각하.”
데이빗은 아직 그 일이 생생히 떠올랐다.
짐승에게 뜯긴 자국 이외 레이첼의 온몸에는 상처와 멍이 한가득이었으며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시신도 훼손되어 있었다. 그녀의 죽은 몸을 보며 얼마나 많은 고문을 겪었는지만 예상할 뿐이었다.
“감히 하츠벨루아가의 사람을 납치하고 고문해 죽였던 거죠.”
능숙한 고문 솜씨를 보아 레이첼이 첫 희생자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이라는 걸 알고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기 전에 빨리 범인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말하는 데이빗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자 옆에 있던 바이올렛은 그의 손을 토닥였다.
그녀를 바라본 그의 표정이 점차 풀리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조사를 하다 보니 고아 출신의 젊은 여자들이 납치 및 고문 살해당한 사건들이 여러 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고문 흔적 또한 레이첼과 비슷했죠. 다만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던 이유는 죽은 사람의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아 출신의 젊은 여자들이 죽으면 시신을 가져갈 가족이 없기 때문에 공터 무덤에 묻힌다.
“범인을 잡아 달라는 가족이 없고…… 범인을 잡더라도 알려 줄 피해자의 가족이 없었습니다.”
이런 식의 사건이나 사고는 매일 생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사가 종결이 되었을 확률이 높다. 범인은 그 점을 노린 것 같았다.
“약혼자 발드는 찾으셨습니까?”
“아직까지 발드는 행방불명입니다. 레이첼도 죽었으니 그 또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겠군요.”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기사들을 풀고 잠복 수사를 한 끝에 노예 매매상이 카르펜 제국 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대마법사 푸링의 도움을 받아 그 노예상을 덮쳤습니다. 잡힌 사람들도 풀어 주었고 말이죠…… 그런데…….”
레이첼의 복수를 해 주고 노예 매매상에게 합당한 벌을 줘서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될 줄 알았는데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사실 데이빗은 그날의 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
따뜻한 가정집처럼 보였던 지붕이 빨갛고 하얀 벽돌이 예쁜 집이 알고 보니 노예 매매상이었다.
“창의력에 박수를 칠 뻔했죠. 그렇게 예쁘장한 집 지하에 감옥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말이죠.”
그때 30명 남짓의 여자를 구했다. 그중 한 명의 상태는 아주 위중해 급히 의원에게 보였다.
<어떠한가.>
<매우 심각합니다.>
<심각한 건 나도 봐서 알고 있어.>
<갈비뼈 네 개가 부러져 있었으며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다 부서져 있고…… 양쪽 다리의 힘줄이 절단되어 있었으며…… 그리고…….>
<그리고?>
<하도 얼굴을 두들겨 맞아 그런지 입 안의 치아들이 부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체의 열상이 한가득 있었습니다.>
하체의 열상은 여자가 강제로 남자들에게 당한 일을 뜻한다.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겠군…….>
레이첼도 똑같은 일을 당했던 것일까?
<고통이 상당하니 마약을 먹여 고통을 완화시키며 고문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피해자는 마약 중독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쾅!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감히 황제 폐하가 있는 수도 내에 이런 끔찍한 일이 생기다니!
<성수를 써도 좋으니 살려.>
<알겠습니다. 다만 걱정되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무엇이지?>
<몸은 치유가 되더라도 정신적으로 무너져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거 또한 염두에 두겠네. 우선 살리고 죽지 않게 해.>
<예.>
다행히 목숨을 살렸지만 어린 소녀의 정신은 살릴 수가 없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 흐읍…… 니다만…… 이 끔찍한 기억이 안고 살 용기가 나지 않, 흑…… 습니…….>
데이빗은 소녀를 위로하며 마법 아티팩트를 건네주었다.
<이 장치를 가지고 있으렴.>
<이게 뭐예요?>
<여기에 네가 당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 아팠던 기억을 아티팩트가 모조리 가져가 버릴 거란다.>
<정말요?>
<그래, 물론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하기 힘들겠지만 그 순간만 넘어서면 네 기억은 사라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