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얼굴을 살짝 붉힌 메이아는 활짝 피어오른 한 송이 꽃처럼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확하게 말할게. 내 약혼자가 플로렌스 대공님이야.”
수줍게 뺨을 복숭앗빛처럼 붉힌 메이아를 바라본 메릴의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어 가며 몸을 살짝 떨었다.
“언니, 왜 그래? 어디 아파? 안색이 좋지가 않네.”
“메이아, 정말이야? 네 약혼자가 플로렌스 대공이라는 게?”
“응, 삼촌한테 못 들었어?”
“너 계약서에…… 5년 동안은…… 약혼이나 결혼하지 않기로 했잖아!”
“언니, 잊었어? 내가 5년 동안 약혼이나 결혼을 하지 않을 상대로는 카르펜 제국의 남자 한정으로만 정해 놓았었잖아. 타 제국은 없었어.”
메이아가 플로렌스 대공과 약혼했다는 사실에 잊고 있었다.
“왜 내가 조건을 그렇게 정해 놓았는지는 언니가 더 잘 알잖아.”
5년 동안 카르펜 제국의 남자와 약혼과 결혼을 하지 않는다. 그건 메릴과 파츠래리 두 사람이 약혼과 국혼을 올리고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최대의 기간을 정해 놓은 것이다.
“언니가 국혼 올리는 모습을 보고 나도 플로렌스 대공님과 결혼을 올릴 생각이야.”
“어디서, 어떻게 만난 거야?”
“마탑 가는 길에 엘른 항구에서 만났어. 식사를 하는데 젠타스 귀족이 와서 치근덕거리는 걸 대공님이 구해 주셨어.”
“꽤…… 로맨틱한 만남이네…….”
메릴은 여자들끼리 이야기하고 싶다며 베르샤를 내보냈다.
“메이아……, 플로렌스 대공이 어떤 남자인지 알고 그러는 거야?”
“언니가 내 약혼자를 알아?”
“물론이지. 플로렌스 대공은…… 파.”
파츠래리가 이야기하던 걸 말해 주려다 메릴은 입을 다물었다. 강대국의 시리우스 제국의 대공에 대해 험담했다는 말을 어떻게 말해 주겠는가!
메이아는 커다란 푸른 눈동자를 한 차례 깜빡이며 물었다.
“내 약혼자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말해 줘, 언니.”
메이아는 궁금하니 이야기해 달라며 메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다가오는 메이아를 보며 메릴은 계속 뒤로 물러섰다.
메이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메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언니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솔직히 말해 줘.”
메릴은 잠깐의 침묵을 지키다 이내 입을 열었다.
“플로렌스 대공 각하의 소문이 그리 좋지 않아서…… 걱정이야.”
“좋지 않은 소문이라…….”
“으응……, 나도 누군가에게 들었던 건데 그렇게 썩 좋은 건 아니었어.”
메릴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군가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의 소문이 좋지 않아도 상관없어.”
“메이아, 무엇이 상관없다는 거야?”
“이미 그와 약혼을 올렸어. 그에게 어떤 소문이 나더라도 나는 내 약혼자만을 믿어 줘야 해. 그리고 그는 상냥하고 다정해.”
“메이아.”
“시리우스 제국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있어. 요번에 성국과 전쟁에서도 단 이틀 만에 이긴 거 언니도 알고 있지?”
성국은 단 이틀 만에 텔레포트 된 시리우스의 병력에 무너졌다. 너무 유명해진 이야기라 전 제국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런 강한 제국의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높은 위치의 대공이 나에게 결혼하자고 한 거야. 하지만 내가 성인식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약혼 먼저 하게 된 거지.”
메이아는 행복하다는 듯 만면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게 멋진 남성이 나에게 결혼하자는데 어떻게 거부해. 그리고 난 대공님을 사랑하게 되었어.”
“사랑? 네가 사랑이라고? 10년을 파츠래리 황태자 곁에 있었어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사랑? 제정신으로 말하는 거야?”
사람들은 아무리 옆에서 진실을 말해 줘도 믿고 싶고, 듣고 싶은 대로만 받아들이고 믿는다. 참으로 어리석지 않은가!
지금의 메릴처럼…….
“난 그를 사랑해. 많이 사랑해.”
“메이…… 너 설마…….”
메릴은 떨리는 손으로 메이아의 손을 힘주어 꽉 맞잡았다.
“혹시 플로렌스 대공께서 결혼 안 해 주면 카르펜 제국을 성국처럼 만들어 버리겠다고 한 거는 아니지?”
새하얗게 질린 메릴의 얼굴을 보며 메이아는 눈만 깜박거렸다. 그 모습에 답답함을 느낀 메릴은 소리쳤다.
“그런 거냐고! 협박받은 거냐고!”
“언니, 나 귀 안 먹었어. 소리를 낮춰.”
파츠래리에게서 들은 플로렌스 대공은 극악무도한 나쁜 남자다. 그런 남자가 메이아에게 카르펜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결혼하자고 협박했다면……. 갑작스러운 메이아의 약혼이 이해가 되었다.
“네가 섣불리 약혼할 리가 없잖아…….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역시 파츠래리 말이 맞았다. 하지만 메릴의 머릿속엔 메이아가 나쁜 남자와 결혼하게 된 일보다 메이아와 파츠래리를 재약혼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플로렌스 대공 때문에 모든 게 허사가 된 것 같아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이제 꼼짝없이 파츠래리와 국혼을 하게 생긴 거다.
“메이아…… 너를 마탑으로 보내는 게 아니었어. 어쩌다 그런 남자한테 걸려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런 남자라니! 언니……, 난 그를 사랑해서 약혼한 거야. 그리고 애초부터 내가 마탑에 간 이유가 뭐 때문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야?”
“파혼하더라도 마탑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난 그래도 마탑으로 갔어…… 아.”
메이아는 이마를 짚으며 휘청거리자 메릴은 비명을 질렀다. 밖에서 대기하던 베르샤는 비명에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공비 마마!”
어지럽다는 듯 휘청거리는 메이아를 보자 베르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잠시 어지러웠을 뿐입니다. 대공님에게 전달하지 마세요…… 걱정 끼치긴 싫습…….”
메이아는 애잔하게 눈물 한 방울 흘리는 모습을 메릴에게 보이며 비틀거리며 털썩 쓰러졌다.
베르샤는 사색이 되어 메이아를 부축했다. 그리고 방을 나가기 전 메릴를 살벌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대공비 마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분이 다치시면 플로렌스가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메릴 공녀님.”
메릴이 어떤 사람인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베르샤는 충고가 아닌 살기를 담아 진심을 담아 협박한 것이다.
메이아를 가볍게 들어 올린 베르샤가 방에서 빠져나가자 메릴은 주저앉았다.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서든 파츠래리 황태자 전하한테 알려야 하는데…….”
메릴은 엄지손톱을 뜯으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파츠래리를 만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
사실 테오도르는 메이아와 떨어지기 너무나도 싫었다. 하지만 마탑으로 급하게 찾아온 애튼의 소식 때문에 급하게 플로렌스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빨리 가셔야 합니다.”
“록벨리온 공작보다 메이가 더 중요해.”
“가셔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분을 록벨리온 공작님이 모시고 왔습니다.”
“황제라도 왔다는 거야?”
“가 보셔야 압니다!”
소식을 들고 온 애튼의 표정은 간절했다.
“바쁘시더라도 손님들이라도 보고 가 달라면 좋겠다는 록벨리온 공작님의 청도 있었습니다.”
록벨리온 공작은 부탁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부탁을 한 정도라면 굉장히 중요한 손님을 모시고 왔다는 건데…….
“테오.”
“네.”
“전 먼저 카르펜 제국으로 돌아가 있을 테니 록벨리온 공작님을 만나고 오세요.”
“베르샤.”
“예, 각하.”
“너는 목숨을 내놓고 대공비를 지켜라.”
“알겠습니다.”
“메이, 베르샤를 호위로 데리고 가 주십시오.”
“알겠어요, 테오.”
테오도르는 베르샤에게 시선을 맞추며 그만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로 한없이 차갑게 말했다.
“데미안 황자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주저하지 말고…… 손목을 잘라. 잊지 마. 데미안 황자는 플로렌스 대공비를 시해하려고 했던 자라는 걸.”
베르샤는 검집을 꽉 쥐며 말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돌려 메이아를 바라봤다. 그는 몹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파스타 먹으러 가고 싶었는데…….”
“공작저에서 준비할게요. 저희 하츠벨루아가의 요리장의 음식 솜씨는 매우 훌륭해요.”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은빛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파스타를 그런 뜻으로 말하신 겁니까?”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하는 거예요.”
“메이가 그런다면 그런 거겠죠.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살포시 그녀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대며 길게 입맞춤했다.
“메이만 보내기 너무 불안합니다.”
“테오…….”
“만나자마자 다시 이별이라니…….”
“대공 각하! 빨리 가셔야 합니다.”
다급한 애튼의 비명과도 같은 말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는 메이아를 좀 더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난처한 쓴웃음을 짓던 애튼은 메이아에게 계속 작별 인사를 하며 떨어지지 않고 미적거리는 테오도르를 억지로 끌고 텔레포트에 탑승했다.
플로렌스령에 도착하자 테오도르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왜 내 약혼녀는 아직 미성인인 걸까?”
미성인만 아니라면 당장 결혼식을 올리고 떨어져 있지 않아도 될 텐데.
“내가 성인이니 참아야 되겠지.”
“대공비 마마께서 성인식을 올리자마자 바로 결혼식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야, 애튼.”
애튼은 한숨 쉬는 테오도르를 위로했지만 그는 전혀 위로받지 못했다.
“대공저에 도착하시면 각오하셔야 됩니다. 다만 너무 놀라지만 않으셨으면 합니다.”
비장한 얼굴의 애튼에게 테오도르는 무슨 일이냐 물어보았지만 그는 만나 보면 알 거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뒷말을 흐렸다.
대공저에 도착하자 집사 베나블은 헐레벌떡 그에게 뛰어와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닮았습니다, 주인님. 너무 닮았습니다!”
베나블은 흥분한 채 계속 닮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진정하고 말해, 베나블. 무엇이 닮았다는 거야?”
“록벨리온 공작님께서 모셔 온 분이 우리 대공비 마마와 너무 닮으셨습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