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그런데 쥬안,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무엇 때문이지?”
쥬안은 머뭇거리다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플로렌스 대공 각하의 안 좋은 이야기를 메릴 공녀에게 하셨습니다.”
“안 좋은 이야기를 했다고?”
“예.”
“뒤에서 안 좋은 이야기 할 이유는 전혀 없어…….”
파츠래리가 나와 테오도르의 약혼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뒷담화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리고 아직 약혼 일은 파츠래리가 현재 모르는 일이다. 그는 그만한 정보력을 갖추지 못했다.
“파츠래리 황태자 전하께서 테오도르 대공 각하의 안 좋은 이야길 하면 메릴 공녀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리고 그걸 주위에 있던 귀족들이 들었겠군.”
메이아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깊게 숨을 토해 냈다.
“더러운 걸 말하는 황태자 전하나 그 더러운 걸 받아먹는 메릴 언니나 둘 다 똑같아.”
쥬안은 그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웬만해선 한숨조차 쉬지 않고 표정을 읽기 어려운 사람이 메이아다. 그런데 지금 메이아의 표정에는 가라앉지 않는 노여움이 보였다.
“황태자 전하가 했다는 내 약혼자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모조리 말해 줘.”
“……알겠습니다.”
쥬안의 말이 이어질수록 메이아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깎여 나가는 걸 느꼈다.
지금 파츠래리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그런 사람을 뒤에서 험담을 했다는 건 뭔가 경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대체 파츠래리는 테오도르의 무엇을 경계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귀족들이 내 약혼자를 쓰레기로 보겠군.”
메이아는 일어섰다. 차갑게 내려앉은 푸른 눈동자는 하얀 눈으로 된 꽃송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창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창문 밖을 바라보며 메이아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테오도르를 험담하는 건 날 험담하는 것과 같은 짓이다. 이럴 때일수록 올라오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논리적으로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
“험담하고 싶은 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건 스스로 자신의 약점을 말하고 다닌 거와 같은 일이지.”
유디는 지독하게 절제되어 가는 메이아의 인위적인 미소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데이빗은 항상 화가 날수록 웃으며 여유를 가지라고 그녀에게 가르쳤다. 그렇기에 화가 날수록 메이아는 미소 짓는 편이다. 그래, 저렇게 억지로 말이다.
메이아가 저렇게 미소 지을 때에는 누군가는 꼭 망하거나 죽어 나갔다. 그 누군가가 걱정돼서 걱정하는 게 아니다. 저럴 때 미소 짓는 메이아는 무모할 정도로 상대를 철저하게 밟아 놓기 때문에 그 무모함을 걱정한 것이다.
“유디, 아까 들어오면서 이야기했던 황후마마에게 티 파티 초대장에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써 보내 줘.”
“알겠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직접 손으로 정성껏 답장을 써 황후에게 보내겠지만 더는 엘르민은 그런 정성을 보일 상대가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티 파티에 여러 가지 사정을 갖다 붙이며 참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겠지만 이젠 엘르민은 그럴 필요도 없는 상대다.
하지만.
“티 파티에 파츠래리 황태자 전하도 오겠지?”
그리고 많은 영애들과 귀부인들도 참석하겠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창가를 바라보던 메이아는 몸을 돌려 유디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내 생각도 그래.”
순간, 메이아에게서 무거운 마나가 배어 나왔다. 분명 입꼬리가 둥글게 올라갔고 눈웃음을 짓고 있지만 그녀의 웃음이 깃든 눈동자 안쪽에는 삼켜질 것만 같은 짙은 분노만 느껴졌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매섭고 무거운 분위기에 유디를 그녀를 타일렀다.
“아가씨 이럴 때일수록 좀 더 진정하셔야 합니다.”
“나 화난 거 티나?”
“예, 아가씨. 화가 많이 나신 걸로 보입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화가 났다는 걸 남에게 들키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직 멀었어.”
자제한다고 생각했는데 은연중에 그러지 못한 것 같아 메이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예전 데이빗 님께서도 바이올렛 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화를 내고 다니셨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를 내고 그걸 다른 사람이 본다는 건 그리 나쁜 일이 아닙니다.”
데이빗은 항상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친절하게 굴었다.
그 모습은 굶주림이 한계를 넘어섰는데도 그걸 꾹 억누르고 숨기고 사냥감에 다가가는 맹수의 사냥 모습 같다고 사람들이 이야기한 걸 들었다.
“화를 낸다는 건 내 약점을 드러내는 일이야.”
테오도르가 어느새 내 약점이 된 걸까?
“아가씨, 그 약점조차 지킬 수 있다면 화를 내셔도 괜찮습니다.”
유디의 위로에 메이아는 싱긋 웃으며 왼쪽 심장에 손을 갖다 대며 눈을 감았다.
몸속에서 울려 퍼지는 심장 소리를 진정시키며 조용히 눈을 뜨고 쥬안을 불렀다.
“쥬안.”
“예, 아가씨.”
“토마스 영식이 도주를 한다는 건 경매장 일로 붙잡힐 만한 증거들을 처리 못 했다는 뜻이기도 해. 그 증거들을 모조리 찾아내 나에게로 갖고 와.”
“예.”
“토마스 영식은 조용히 도망칠 가능성이 높아. 만에 하나 그런 정황이 발견된다면 조용히 그를 잡아서 공작저 지하 감옥 최하층에 가둬.”
도망가다 잡히면 여러모로 쓸모가 생길 거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메릴 언니를 만나러 가 볼까?”
창가를 바라보던 메이아는 몸을 돌려 베르샤를 쳐다봤다.
“베르샤, 에스코트해 주세요.”
“예.”
베르샤는 메이아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정중히 내밀었다. 메이아는 그가 내민 오른손 위에 손을 올렸다.
“유디.”
“예, 아가씨.”
“난 메릴 언니에게 가 봐야 되겠어.”
“알겠습니다.”
에스코트를 받으며 방에서 나온 메이아는 베르샤만 들을 수 있도록 낮게 말했다.
“득보다 실이 많을지도 모르는데도 그렇게까지 내 약혼자를 험담을 해야 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 약혼자를 험담한 이유는 분명 그 뒤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감당하지 못한 선물을 받은 파츠래리의 얼굴이 무척 궁금해졌다.
“대공 각하는 절대 남에게 무례하게 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누구보다 가장 귀족다우시고 누구나 존경하는 훌륭한 플로렌스가의 주인이십니다.”
베르샤는 무뚝뚝하고 오로지 검밖에 모른다. 그런 그가 테오도르의 험담을 듣고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면 변호를 하는 모습에 저절로 메이아는 미소가 지어졌다.
“베르샤 단장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난 파츠래리 황태자 전하가 말한 것을 단 한 마디도 믿지 않습니다.”
베르샤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메이아 안에서 이미 테오도르라는 남자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그리고 항상 믿음직스러운 남자다. 그런 그의 험담을 듣는다고 자신의 믿음이 무너질 리 없다.
“난 내가 보고 겪은 것만 믿습니다.”
그가 남에게 악인으로 비추어진다 하더라도 나에게 한없이 다정한 남자다. 플로렌스 대공저에 있는 사용인들은 테오도르를 존경하고 있다. 이런 상황들만 보더라도 그는 소문처럼 안하무인이 절대 아니다. 그러니 소문은 믿지 않는다.
“……대공비 마마.”
베르샤는 테오도르의 험담을 듣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내 사람의 험담을 듣는다면 한 번쯤 의심해 볼 수 있다. 혹시 원래 그랬던 사람이 숨긴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런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테오도르를 믿는다는 뜻이다.
“감사합니다…….”
베르샤는 안심한 얼굴을 보이며 메이아의 에스코트에 신경을 쏟으며 한 발씩 내디뎠다.
그리고 메릴의 방 앞까지 도착했다.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두 명은 메이아를 보자 경례를 하며 물러섰다.
*
“메이아…… 널 에스코트해서 온 남성분은 누구야? 혹시…… 약혼자야?”
날카로운 눈매가 차가운 인상의 남자가 메이아를 깨질까 조심히 다뤄야 하는 유리처럼 에스코트하며 들어왔다. 딱 봐도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아니야.”
메이아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메릴의 질문에 답했다.
“내 약혼자 가문의 제1 기사단장이야. 현재 내 호위로 옆에 있는 거야.”
약혼자 가문의 제1 기사단장이란 말에 메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이아는 부드럽게 웃음을 머금고 베르샤에게 메릴을 소개했다.
“베르샤 기사단장.”
“네, 대공비 마마.”
“대공비 마마?”
베르샤의 대공비 마마라는 호칭에 메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사촌이자 예비 황태자비인 하츠벨루아가의 메릴이에요. 인사하세요.”
베르샤는 살짝 허리와 머리를 숙이고 메릴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하츠벨루아가의 메릴 공녀님.”
“예.”
“전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가의 제1 기사단의 단장인 아이작가의 베르샤입니다.”
메릴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을 거라 착각을 했다.
“잠깐, 어디 대공가라고요?”
그래서 다시 물었다.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가의 제1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아이작가의 베르샤입니다.”
베르샤의 소개를 또 들었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시리우스…… 제국에 프…… 플로렌스 대공이라면…….”
메릴은 어제저녁에 만났던 파츠래리에게 플로렌스 대공이 어떤 사람인지 들었다.
무자비하고 개념도, 예의도 없으며 자신이 강한 권력자라는 걸 뽐내고 다니는 허세 노안남이라고 말이다. 플로렌스 대공가의 제1 기사단장이 호위를 위해 메이아 옆에 있다는 건 그 약혼자야말로 플로렌스 대공이라는 걸 메릴은 알게 되었다.
목에 목줄이 매여 단단히 죄어 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약혼자가 대공에게 부탁해서 제1 기사단장이 호위로 와 준 것일지도 모른다.
메릴의 찰나의 희망을 가지며 물었다.
“메이아…….”
“응? 언니 왜?”
“약혼자분이 대단하신 분인가 봐. 플로렌스 대공가의 기사단장을 호위로 붙여 주시고.”
메릴의 말에 메이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릴 언니.”
“응?”
“내 약혼자는 대단하다고 말하는 걸로 부족해.”
“그렇니? 하하, 아무튼 플로렌스 대공님하고 네 약혼자가 친한 사이인가 보다. 그렇지?”
“무슨 소리야, 메릴 언니.”
“응?”
“아무리 친해도 제1 기사단장을 붙여 주는 가주가 어딨어. 그리고 내 약혼자 가문이라고 말했잖아. 다른 생각 중이었어?”
메릴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메이아가 플로렌스 대공과의 약혼을 했다는 것이 아니길 빌었지만 그 희망은 처참히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