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테베린은 데미안 곁에 있기를 원했다. 그러니 방법을 찾는 척하면서 곁에 있다면 문제 되지 않을 거란 생각했다.
생각을 마친 테베린은 천천히 데미안에게 다가서며 악수하자는 듯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도와줄게.”
“난 뭘 하면 되지?”
“마침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그게 뭐지?”
“황태자가 되어야겠지.”
테베린은 시간을 끌며 옆에서 그의 부정의 힘만 흡수하고 도망갈 궁리를 세웠다.
“황태자가 되면 내가 너와 계약해 줄지도 모르잖아.”
“그래? 지금의 나는 약해서 계약 맺기 싫다는 거야?”
“맞아. 어리고 약해. 화낼 줄밖에 모르는 소년과의 계약은 내게 아무런 이득이 없어. 먼저 황태자가 돼. 그 뒤에 도와줄게.”
황자가 살아 있는 황태자를 제치고 황태자가 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황태자를 먼저 죽이면 편하잖아.”
“물론이야. 그런데 계약 내용을 ‘내가 황태자가 되게 해 줘!’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맞아…….”
“데미안 황자는 오로지 메이아 공녀와 이루어지는 계약을 맺고 싶어지는 거잖아. 그러니 황태자가 되든 뭐가 되든 지금은 노력할 때야.”
“좋아. 노력해 보지.”
데미안은 검술과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언제 황태자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갑자기 철들어 버린 그를 바라보는 귀족파는 데미안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지금 받는 품위 유지비로 돈을 불리고 싶어. 좋은 방법이 있을까?”
“걱정 마. 도와줄게. 좋은 사업이 있거든. 불법적인 일인데도 해도 될까?”
“불법적인 일?”
“그래. 남들이 안 하는 짓거리들. 그렇지만 엄청 돈이 돼.”
“좋아.”
데미안은 테베린과 함께 관여하는 사업마다 엄청난 흑자를 남기며 승승장구했다.
테베린은 데미안 곁에 있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애꿎은 사람들을 어둠 속에서 고문하는 것보다는 데미안 곁에서 그의 부정을 쪽쪽 빨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았다.
가끔 고문 실력이 떨어질까 봐 주기적으로 노예상을 돌아다니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비명을 삼켜 먹곤 한다.
테베린은 흑마법사로 살아오면서 지금이 가장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데미안은 똑똑해지고 강해지고 부유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원하는 건 메이아를 갖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원하는 것 하나쯤 찾을 거라 생각했지만 데미안은 변하지 않았다. 바람을 억누를 수 없는 것처럼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을 제어하기란 불가능하다고까지 느껴졌다. 그 마음은 무척 불결하고 음침했다.
가질 수 없는 걸 바라는 인간의 욕심은 그 어떤 감정보다도 달콤하다.
데미안은 파츠래리와 항상 함께하는 그녀를 멀리서 바라볼수록 지금은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때를 기다리며 힘을 키웠다.
“테베린…….”
“말해.”
“그녀의 부모를 죽여야 되겠어.”
데미안은 조만간 그녀가 성인이 되면 바로 파츠래리와 국혼을 올리게 될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했다.
테베린은 더는 시간을 끌 수 없다는 사실에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데이빗을 암살하려고 기회를 보았지만 대마법사 푸링이 상주하고 있어 어려웠다. 결국은 그들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에 암살자를 보내고 그 뒤에 산사태를 내 깊은 골짜기에 마차를 떨어뜨리게 되었다.
그렇게 메이아의 부모는 자연재해처럼 보이는 위장 사고로 인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데미안은 테베린에게 그녀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말하라 재촉했다.
“차라리 황제가 되라고! 그러면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밀어붙이면 될 일이잖아! 다 죽이고!”
물론 황족을 죽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마음먹으면 죽일 수 있지만 그것보다 다른 문제가 있었다.
“잘 들어. 처음 만났을 때 힘도, 돈도 없었던 멍청한 황자는 내 앞에 이젠 없어.”
이젠 데미안은 자신이 없더라도 충분히 황태자를 죽이고 자리를 뺏을 수도 있다.
“데미안 황자, 넌 강해졌어. 파츠래리 따위는 네 상대가 안 돼.”
테베린은 데미안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 부정적인 힘을 받아 힘을 잘 키워줬다. 그리고 강해졌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사랑을 이룰 수 있는 흑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없기에 도망간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그 순간이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죽이고 싶어. 오로지 이 세상에 나와 그녀만 존재하게 만들고 싶어…….”
테베린의 전신에 오싹함이 빠르게 감돌았다. 오래간만에 느껴지는 빠른 흥분감도 들었다.
“단둘이? 네가 원하는 게 그거야?”
“그녀와 나 오로지 단둘만 존재하고 싶어. 그러려면 다 죽여야 되겠지.”
“아아…… 데미안…….”
달콤해.
아! 달콤해! 너무 달콤해서 미쳐 버리겠어.
테베린은 자신의 오른팔을 쓸어내리며 돋아난 닭살을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이렇게나 깊은 쾌감을 주는 데미안을 두고 떠나기는 힘들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차라리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끊는 게 빠를 거다.
그리고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테베린을 스쳐 지나갔다. 사랑을 이루어줄 순 없지만 그가 원하는 걸 들어 주면서 자신에게 이득을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생각이.
“그래. 맞아! 데미안 황자.”
테베린은 앞머리를 젖히면서 데미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영원히 메이아를 소유하는 것. 영원히 함께 단둘이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그렇다면 그렇게 만들어 주면 될 일 아닌가!
“그것보다 내가 말하는 방법을 들어 보겠어? 영원히 너의 그녀와 단둘이 있을 방법인데…….”
테베린은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음산한 웃음을 보였다.
“영원히 말이야……?”
“그래, 데미안 황자. 너와 메이아 공녀 둘이 영원히 함께하는 흑마법이야. 이젠 나와 정식으로 계약할 수 있어.”
사실 테베린은 데미안과 계약을 하고 싶었지만 사랑을 이룰 수 있는 흑마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말로 계약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원하는 게 사랑이 아니라면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다.
“테베린, 넌 예전에 나와 계약을 하지 않는다 했어.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지?”
괜히 사랑이란 말을 꺼냈다가 메이아의 마음을 원한다고 해 버리면 골치 아프다.
“계약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졌으니깐.”
흑마법사는 계약자의 소원을 한 가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 준다.
대부분 인간들은 돈과 권력, 명예를 얻기 원한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어 준다. 하지만 본인의 노력 없이 이루어낸 무언가는 절대 계약자들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
돈이 갑자기 많이 생기면 돈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화를 내고 때론 외로워한다.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한가득 찰 때 흑마법사는 계약자에게서 나오는 기운을 흡수한다.
“난 원하는 걸 이루어 주었지만 그걸 끝까지 버틴 사람을 못 만났어. 그래서 다음 계약자는 꼭 버틸 수 있는 사람으로 하자 스스로 다짐했었지.”
“끝까지 못 버틴다라…….”
“약해 빠진 인간과 더는 계약하지 않기로 했어. 그렇지만 데미안 황자는 몇 년이 지나도 한결같이 메이아 공녀를 원하고 있잖아. 그리고 강해졌고 더는 어린애도 아니고…….”
어차피 흑마법사와 계약한 자는 환상 속에 빠져 살아간다. 그리고 온갖 감정을 겪으면서 비참한 기분만 맛보게 된다.
하지만 그 환상 속에서 지쳐 더는 부정적인 감정을 뽑아낼 수 없다면 그때는 계약이 끝난다. 그리고 다음 계약자를 만나기 전까지 힘을 받기 위해서 억지로 노예를 사고 고문해야만 한다.
“계약했던 이들 모두 만족하지를 못해서 스스로 계약을 지키지 않았던 게 대부분이야. 그래, 몹시 날 실망시켰지.”
그들이 원하는 꿈을 꾸게 해 준다. 하지만 다들 그 안에서 행복과 사랑을 바란다.
너무 이기적이다. 흑마법과 계약을 했다면 그런 감정을 바라면 안 된다. 그건 흑마법사에 대한 기만일 뿐이다.
“데미안 황자는 메이아 공녀만 있으면 만족할 거잖아. 그래서 계약하자고 말한 거야. 그리고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
“네 말이 맞아. 난 그녀와 단둘이 있을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어.”
“계약을 하게 되면 평생 넌 메이아 공녀와 영원히 함께할 거야.”
“그런 거라면 난 정말 좋을 것 같아. 테베린, 네가 말한 것이야말로 오히려 내가 진정 바라는 거야.”
데미안은 테베린과 계약을 했다. 단둘이 있을 수 있는 방법도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데이빗 부부가 사라졌고 이젠 그녀를 데리고 ‘그곳’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데 갑자기 메이아는 떠나 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데미안은 결심했다.
“이젠 때가 왔어, 테베린. 새를 새장에 넣을 때가 왔어…….”
“계약은 했지만 계약의 완성은 데미안 황자와 메이아 공녀가 한 공간에 함께 있을 때 완성될 거야, 클클클.”
데미안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탐욕스럽게 머물렀다. 테이블 위에는 메이아가 가장 좋아하는 딸기가 올려져 있었다.
“그 전에 메이의 약혼자를 죽여야 하겠어. 그리고 그 약혼자가 속한 제국까지도 잘근잘근 밟아놔야 속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아. 아주 조금이라고 풀릴 것 같아. 그 전에 아바마마도, 형님도 모두 죽여 버릴거야.”
테베린은 코를 킁킁거리며 데미안에게서 흘러나오는 부정적인 기운을 황홀하게 흡입했다. 이럴 때 그를 더 열받게 한다면 마시멜로 위에 초콜릿 시럽을 뿌린 것 같은 달콤함을 맛볼 수 있다는 걸 잘 알기에 열심히 맞장구치며 신경을 긁기 시작했다.
“죽여야지.”
“다 죽일 수 있도록 도와줄게! 넌 나의 소중한 계약자야.”
데미안은 테이블 위에 딸기를 한 움큼 집어 꽉 쥐어 으깨었다.
“도와주지 않으면 곤란해.”
그의 손가락 사이에 으깨진 새빨간 딸기즙이 피처럼 뚝뚝 바닥에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테베린, 널 죽이고 싶지 않아.”
테베린은 다시 오싹함을 느끼며 입술 꼬리를 활짝 위로 올렸다.
눈앞에 데미안은 바람에 훅 하고 꺼질 작은 불꽃이 아니다. 바람이 불면 불수록 더욱더 거세게 모든 걸 불태우는 커다란 불꽃이다. 저런 커다란 불꽃에 집어 삼켜진다면…….
어떤 느낌일까? 지금보다 더 오싹해지고 짜릿한 흥분을 얻을 수 있을까?
“너의 그 마음이 영원하다면 언제까지나 나는 네 편이야, 데미안 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