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너무 오래간만에 부르는 거 아니야? 데미안 황자.]
“조금 바빴어.”
[오늘은 심기가 꽤 나빠 보이는데? 기분 안 좋은 일 있었어? 얼굴에서 짜증이 엄청 나 있는데.]
“자꾸 귓가에 모기가 윙윙거리며 울어대니 짜증이 날 수밖에.”
[그러면 모기를 잡으면 되잖아, 클클클.]
“테베린.”
[말해, 데미안 황자.]
“내가 카르펜 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되겠어.”
데미안은 이빨을 부득거리며 갈았다. 머릿속이 짜증스러움으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림자는 빠른 속도로 일렁거리며 데미안을 달래며 속살거렸다.
[그래서 내가 저번부터 이야기했잖아. 황태자 말고 바로 황제가 되라고! 지금 원하는 걸 말해. 데미안 황자, 넌 다 이룰 수 있어.]
데미안은 원하는 걸 말하라는 말에 생각나는 건 단 하나였다.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메이아뿐이야.”
[어차피 그녀는 네 것이야. 대마법사 푸링만 아니었다면 좀 더 일찍 네 것이 되었을 텐데.]
“다 죽이고 싶어.”
[도와줄게.]
“다 죽여……, 다!”
분노가 가득 실린 그의 음성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테베린은 화내는 데미안에게 말했다.
[잊지 마. 흑마법은 일부러 만들어 낸 기적이라는 걸.]
순수한 기적은 선물과도 같아 받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적을 좋아한다. 하지만 흑마법은 다르다. 기적을 받는 사람에게 책임지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물거품 같은 거야. 얼마든지 터질 수 있는 그런 거지.]
기적이 없어지는 일은 없다. 기적이 일어난 순간 사람들은 감동하며 신에게 감사한다. 하지만 흑마법으로 만들어 낸 기적은 없어질 수 있다. 테베린은 그걸 물거품이라 빗대어 말했다.
“물거품처럼 예쁜 건 없지.”
데미안은 생긋 웃어 보였다.
“못 하면 요번 성국에서 일처럼 마물들을 보내 카르펜 제국을 초토화시켜도 괜찮아, 테베린.”
성국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림자는 일렁거리며 사나운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성국 이야기도 꺼내지 마!]
데미안은 성국의 일이 잘 안 되어 화가 났다 생각에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그림자를 쳐다봤다.
[우리는 성국 교황과 그 어떠한 거래도 하지 않았어! 마물 일도 모르는 일이야! 그런데 시리우스 제국에서는 그걸 왜 성국의 일을 흑마법으로 몰고 가는지 모르겠지만 억울하게 누명을 받는 상황란 말이지! 망할!]
테베린의 말에 데미안은 헛 하고 웃었다.
“상관이 없다고? 마물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데? 흑마법과 마물은 짝 같은 거잖아.”
[억울해! 억울하다고! 그 마물은 흑마법으로 만들어 낸 키메라 같은 것도 아니라고!]
“아무리 아니라고 외쳐 봤자 사람들은 모두 흑마법이라고 알고 있어.”
[직접 나서서 흑마법과 성국은 어떠한 연관도 없다고, 정말 아니라고 해명하는 것도 말도 안 되고 믿어 주지를 않을 거야. 그래서 흑마법사들은 모두 화가 난 상태지. 아니, 억울한 입장이라고!]
“그렇다면 그 마물들은 대체 뭐지?”
[마물에게서는 짙은 어둠이 느껴질 뿐 흑마법과는 관련이 없어. 오로지 순수한 어둠만 느껴졌지.]
흑마법이 어둡다고 하지만 순수한 어둠과는 본질 자체가 다르다. 오히려 순수한 어둠은 휴식을 뜻한다. 순수한 만큼 부정하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흑마법은 순수함과는 다른 부정적인 곳에서 힘을 얻기 때문에 사람들이 꺼린다.
“그렇게 말해도 나는 잘 몰라.”
[어둠과 흑마법은 같으면서도 본질 자체가 다르단 말이다.]
데미안은 관심 없다는 듯 고개만 저었다.
“테베린 너의 말은 결론적으로 요번 성국의 일과 흑마법은 관련이 없어 억울하다는 건가?”
[맞아!]
“무슨 상관있어? 어차피 쌓인 악명 추가로 더 쌓이는 것뿐인데.”
[상관있어! 사람들은 흑마법사는 피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이번 성국에 일어났던 일의 계기로 흑마법사들은 꼭 없애야 할 존재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고!]
데미안은 무슨 상관이냐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
“그래 나라도 억울하다는 걸 알아줄게. 그리고 테베린, 노예들은 충분히 준비해서 오스카 산맥에 가져다줄게.”
[뭐…… 그래, 알았어. 마음 굳힌 거야?]
“그래. 내가 황제가 될 거야.”
[계약이 이루어질 때까지 열심히 도와주겠어.]
테베린은 음산한 웃음소리를 냈다.
[약속해. 데미안 황자 너는 황제가 되고, 메이아와 영원히 단둘이 있게 만들어 줄게.]
테베린의 달콤한 속삭임에 데미안은 나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아…… 그거야말로 내가 원하는 거야.”
데미안은 황제가 되고, 메이아의 약혼자를 죽이고 그가 속했던 제국을 전쟁으로 초토화시킬 생각에 즐거워져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검을 들고 수련장으로 향했다.
*
데미안과 테베린의 만남은 필연이었다. 흑마법사 테베린은 카르펜을 지나갈 때 황궁에서 부정적인 기운을 강하게 느꼈다. 흑마법사로서 어두운 기운에 이끌리는 건 당연했다.
마법사는 물, 바람, 불, 땅에 깃든 자연의 힘을 빌려 쓰는 선택받은 자들이다. 마법사들은 불에서 느끼는 뜨거운 감각. 물에서 느끼는 청량함. 바람에서 느껴지는 상쾌함. 땅에서 느껴지는 단단하고 견고한 감각들을 느끼며 자연에서부터 마나를 제공받아 주문을 외운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은 마나에게 버림받은 자들 내지는 스스로 부정의 힘을 좇는 자들이다. 흑마법을 생각하면 많은 이들은 어둠을 생각하겠지만 어둠과 흑마법은 어두운 면은 같으나 본질 자체는 다르다.
어둠의 또 다른 말은 휴식이며 비밀을 숨겨 준다. 그리고 무언가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가려 주는 것이 어둠의 힘이다. 어둠의 힘을 이어받을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림자 일족이며 그들의 또 다른 지칭은 어둠의 일족이라고도 불린다.
흑마법 또한 어두울수록 그 기운이 강해진다. 정확히 어두워질수록 보통 사람이라면 공포를 느낀다. 흑마법은 그 공포를 느낀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에서 힘을 얻는다. 그러니 흑마법사들은 그림자 일족처럼 어둠 자체에서 힘을 받는 건 아니다.
흑마법은 부정적인 기운을 받아야지만 그 힘을 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흑마법사들은 어둠의 힘을 빌려 쓰는 자들이 아닌 부정적인 기운을 받아 쓰는 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부정적인 힘을 모으기 위해 사람들을 납치해 악마 같은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그중에서 흑마법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정적인 감정은 분노와 질투다.
그리고 흑마법사 테베린은 카르펜 제국에서 강한 분노와 질투,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부정적인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만난 사람이 바로 데미안이었다. 읽을 수 없는 눈동자와 무표정한 모습은 꼭 인형 같았다.
”아름다운 얼굴은 그저 껍데기구나.“
그때 데미안은 메이아의 약혼 소식을 접한 이후 한동안 방에 칩거하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을 때였다. 테베린은 그 분노에 이끌려 온 것이다.
“넌 누구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두운 사내를 보며 데미안은 궁금해했다.
“나는 흑마법사 테베린이라고 해.”
“흑마법사?”
테베린은 데미안에게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떨릴 정도로 엄청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느낀 부정의 힘이었다.
무척 어둡고, 무척 분노해 있으며, 무척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그래, 흑마법사야.”
테베린은 데미안을 본 순간 빵과 수프만 먹다 갑자기 나타난 화려한 케이크를 본 기분마저 들었다.
“나에게 무슨 볼일이지? 흑마법사.”
카르펜 제국은 현재 황좌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 또한 없고 평화로운데 무엇 때문에 저 어린 소년에게서 어두운 분노가 느껴지는지 테베린은 궁금했다.
테베린은 데미안에게 가까이 갈수록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어린 소년의 손끝에서는 지울 수 없는 혈향이 느껴져 코를 킁킁거렸다.
“손끝에 피 냄새가 가득하네.”
데미안은 어떠한 표정 변화 없이 테베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흑마법사라는 걸 알고는 뒷걸음질 치며 무서워하는데…… 넌 아니구나.”
테베린은 흑마법사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은 어린 데미안을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데미안의 입에서 내뱉은 대답에 더욱더 호기심이 일어났다.
“무서운 게 뭐지? 흑마법사.”
“무서운 게 뭔지 모르나?”
“무서운 게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보통 사람들은 날 보고 무서워해.”
“아, 그래? 그렇다면 다음에 본다면 무서워하도록 하지.”
“뭐야. 학습하는 듯한 말투는?”
“사람들이 널 무서워한다면 나 또한 널 무서워해야 날 평범하게 생각하겠지.”
그 말에 테베린은 데미안에게 매료되었다. 둘은 한참 대화를 했다.
테베린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데미안 주위를 떠돌며 그를 살피기 시작했다.
감정을 잘 모르고, 보이는 모든 표정이 연기였다. 하지만 그에게 진심인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메이아였다.
하지만 데미안이 좋아하는 여자는 자신의 이복형과 약혼을 했다고 하니 그가 가진 분노가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힘은 부정을 부르며 그 기운은 테베린에게 매우 달콤했다.
어느 날, 데미안은 테베린에게 물었다.
“메이아를 갖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지? 흑마법에는 그런 거 없어?”
“사랑을 이룰 수 있는 흑마법은 없어.”
“사랑이 아니더라도 괜찮아. 난 평생 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그게 아니라면 파츠래리를 죽여도 좋겠어.”
짙고 짙은 집착 속에서 부정적인 힘이 넘쳐 흘렀다. 테베린은 그걸 놓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끌어들이며 달콤하게 맛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먼저 황태자가 되면 되지 않을까? 나 같아도 황자비보다는 황태자비가 낫잖아. 안 그래?”
“파츠래리를 죽이면 쉽지 않을까? 그러면 내가 다음 황태자가 될 텐데.”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넌 아직 어리고 힘도 없어. 그리고 나는 약해빠진 상대에게 계약을 맺게 하기 싫어.”
“난 이 나라 황자야. 돈은 원하면 얼마든지 줄 수 있어.”
“흑마법은 돈을 원하지 않아.”
“그러면 뭘 원하지?”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난 그녀를 원해. 나와 같은 마음이면 좋겠어. 영원히.”
흑마법을 떠나 사랑을 이룰 수 있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데미안에게 없다고 한다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 같다. 테베린은 그의 부정적인 기운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거면 돼?”
“응, 난 그녀만 원해. 다른 거 필요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