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129화 (129/163)
  • 129화

    메릴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참아야만 했다. 토마스가 어떤 여자와 데이트하는 모습에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맛이 어떤지도 몰랐다.

    ‘나는 토마스가 걱정되어서 어떻게 하면 탈출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메릴은 1층 종업원에게 약간의 팁을 주며 토마스에게 쪽지를 전해 달라 말했다.

    “3층으로 안내해.”

    “지금 자리가…….”

    “빨리 안내하는 게 좋을 거야.”

    메릴은 품에서 백지수표 한 장을 꺼내 많은 금액을 적어 건넸다. 예비 황태자비의 명령이기도 하고 많은 돈을 내었으니 어쩔 수 없이 3층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자리를 이용하는 귀족에게 정중히 나가 달라는 말을 해야 하며 그 와중 어마어마하게 욕을 들어먹는 건 당연했다.

    다행히 나가는 손님들이 있어 메릴을 3층으로 안내할 수 있었다.

    “이걸 쿠룬달스 영식에게 넘겨 줘.”

    “에?”

    황태자비가 될 메릴이 파츠래리를 보내고, 쿠룬달스 영식을 불러 달라? 그것도 밀실로?!

    쪽지를 건네받은 직원은 떨떠름한 표정을 애써 지우며 토마스에게 쪽지를 몰래 전달했다.

    내용을 확인한 토마스는 함께 있던 영애를 마차에 태워 보내고 메릴를 만나러 3층으로 올라왔다. 그를 보자마자 메릴은 쏘아붙였다.

    “그 여자는 누구예요?”

    토마스는 패트리 영애와 즐거운 데이트를 방해받아 기분이 나빠졌다. 그렇다고 돈줄인 메릴에게 화를 낼 순 없었다.

    “사업상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사업상 파트너가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요?”

    “메릴, 질투도 좋지만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메릴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명치는 답답해지고 마차 안이 아닌데도 멀미가 느껴질 정도로 속이 울렁거리고 불편했다. 화가 나는 동시에 이성적으로 대화하고 싶었지만 생각과 다르게 입 밖으로는 거친 말만 쏟아 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다른 여자랑 노닥거리는 거예요?”

    메릴은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절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러면 왜 그 여자의 뺨을 만지고 음식도 덜어 주고 그랬는데요!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시면서!”

    “무슨 일 있으십니까?”

    “토마스가 잡혀갈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메릴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토마스는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걸 예감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세요. 메릴.”

    토마스는 손수건을 꺼내 메릴에게 건넸다. 메릴은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며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익명 경매장 일 때문에 토마스를 잡는다고 했어요.”

    메릴은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허수아비를 내세웠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수아비요?”

    “제 이름으로 경매 이름에 출품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걸릴 일은 없을 겁니다.”

    그의 말에 메릴은 부루퉁하니 입을 내밀며 훌쩍거렸다.

    “지금 상황이 이런데 토마스는 다른 여자랑 희희낙락거리기나 하고…… 흐윽.”

    토마스는 짜증이 치솟아 올랐지만 메릴에게 뭐라 할 순 없었다.

    “질투하는 메릴도 정말 귀엽군요.”

    토마스는 최대한 올라오는 짜증을 누르며 말했다. 칭얼거리던 메릴은 갑작스러운 그의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녀를 토마스는 끌어안으며 속살거렸다.

    “전 당신밖에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뒤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이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이렇게 껴안고 있을 수 없습니다.”

    메릴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다른 여자와 그렇게 다정하게 있으면…….”

    “사실!”

    메릴은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말하는 토마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와 함께 들어오는 메릴을 보며 저는 질투에 휩싸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과도하게 앞에 있는 여성분에게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토마스…….”

    “우리는 서로에게 질투했다는 사실이 몹시 기분 좋으면서도 다시 한번 제가 메릴에 대한 사랑이 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둘의 시선이 마주치며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질투 많이 했어요? 토마스.”

    “질투가 너무 많이 났습니다. 화가 나고 정말…….”

    토마스는 메릴을 좀 더 꽉 껴안았다. 그 포옹은 몹시 괴로워 보였다.

    “저는 당신의 숨은 정부로 살아도 괜찮습니다, 메릴.”

    “토마스…… 우리 멀리 떠날까요?”

    “진심입니까?”

    “네.”

    “메릴이 원한다면 우리 멀리 떠나죠.”

    토마스는 입을 실룩거리는 걸 감추기 위해 메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들썩거렸다.

    “그러면 우리 지낼 곳을 찾아봐야 되겠군요.”

    당신의 얼굴과 몸매는 괜찮은 편이니…… 라는 뒷말을 속으로 삼키며 토마스는 활짝 웃었다.

    “우리가 새로 정착하는 곳에서는 아주 행복할 겁니다.”

    “토마스…….”

    그리고 둘의 애틋한 모습을 쥬안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데미안은 하츠벨루아 공작저를 한바탕 휘젓고 황궁으로 들어왔다. 메이아를 찾을 수 없어 악에 받쳐 들어온 그를 시종장이 발견하고 뛰어갔다.

    “황자님!”

    애타게 부르는 시종장은 헉헉거리며 숨을 한 번 들이켜고 내쉬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데미안은 웃음을 지었다.

    “아바마마가 나를?”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에 절대 부를 일이 없던 아르헨이 시종장을 시켜 불렀다는 건 뭔가 일이 있다는 뜻이다.

    “무슨 일로 나를 찾으시는지는 알고 있어? 시종장.”

    시종장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편지 한 통을 받으신 다음에 회의를 파하시고 찾으십니다. 편지의 내용은 모릅니다.”

    “누가 보낸 편지인데?”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입니다.”

    “그자라면…….”

    플로렌스 대공이라면 마탑으로 향하는 유람선 위에서 메이아를 강제로 껴안았던 인물인데…….

    데미안은 입을 다물고 시종장을 내려다봤다.

    “정말 플로렌스 대공이 편지를 보냈다고?”

    “그렇습니다. 빨리 황제 폐하에게 가셔야 합니다. 급하게 찾으십니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장을 따라 아르헨의 개인 응접실로 향했다.

    황제의 응접실 안에는 기본적으로 소리 차단 마법이 걸려 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데미안을 보자 맞은편에 앉으라 턱짓을 했다.

    그리고 아르헨은 자리에 앉아 한 마디도 말을 꺼내지 않은 채 데미안만을 쳐다봤다.

    뭔가 꾹 참고 있는 듯한 모습에 데미안은 궁금하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아르헨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플로렌스 대공을 아느냐?”

    “모릅니다.”

    아쉴롬이 쓴 기사에서만 본 것일 뿐 아는 사이는 아니다.

    “그렇다면 플로렌스 대공의 약혼녀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구나.”

    “네, 모릅니다.”

    아르헨은 손안에 들고 있는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데미안에게 공처럼 말아 던졌다.

    “읽어 보거라.”

    공처럼 말아 던진 종이를 받은 데미안은 조심스럽게 구겨진 종이를 폈다.

    몇 줄 안 되는 글씨가 써져 있어 금방 읽혔지만 내용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는 플로렌스 대공도, 예비 대공비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정말 모르겠다는 듯 데미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을 깜박였다.

    “혹시 최근이라든가, 전에 모르는 여자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데미안은 모르겠다는 듯 미간만 찌푸렸다.

    “만약에 플로렌스 대공이 카르펜 제국으로 온다면 데미안 너는 감옥에 잠시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 잘못한 게 없습니다.”

    “잘못한 게 없어도 시리우스 제국이다. 그들과 괜히 마찰을 일으켜선 안 된다. 대신 너의 무죄가 밝혀진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것이다.”

    아르헨의 말에 데미안은 선택의 길은 없었다.

    “알 수가 없군요. 저는 시리우스 제국도 가 본 적이 없을뿐더러 만난 여자라곤 메이아 공녀밖에 없었습니다.”

    “메이아 공녀?”

    아르헨은 눈을 크게 떴다. 마탑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메이아의 소식에 반가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예, 오늘 메이아 공녀는 황궁에 와서 황태후 마마를 뵙고 그 뒤에 저와 차 한 잔 마셨습니다.”

    메이아의 말이 떠올랐다.

    <약혼했습니다.>

    루만에게 가서 약혼 확인까지 받았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녀와 약혼을 했을까?

    데미안은 유람선 위에서 껴안은 테오도르와 메이아의 모습을 쓴 기사가 떠올랐다.

    데미안의 머릿속에 설마라는 단어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생각하기 싫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메이아의 약혼.

    그리고 플로렌스 대공의 약혼녀.

    싫다는 메이아의 팔을 꽉 잡았던 일…….

    “그래, 메이아 공녀와 좋은 이야기는 나누었느냐?”

    “예.”

    “메이아 공녀가 너와의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느냐?”

    “예. 저는 그녀와 결혼할 겁니다.”

    아르헨은 날카롭게 데미안의 얼굴을 살펴봤다.

    “황태자의 국혼을 올린 뒤에 이야기 하자구나. 그리고 지금은 플로렌스 대공과의 일이 우선이다. ”

    “알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데미안의 머리를 점점 지배해 나가기 시작했다.

    “……내 말 알아들었겠지? 데미안.”

    아르헨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

    데미안은 짜증스러움을 숨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헨에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나가며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방으로 돌아온 데미안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나의 예쁜 새가 다른 나무에서 둥지를 튼다면 나무를 베어 버려야 한다. 만약 플로렌스 대공이 그 나무라면 베어 버리는 걸로는 부족하다. 땅속에 뿌리가 살아 있다면 나무는 베어도 죽은 게 아니다.

    뿌리 한 줌까지 땅속에서 뽑아내 활활 불태워 버려야 한다. 원래부터 이 땅에 나무가 안 심겨 있었던 것처럼. 그렇다면 나무뿌리 뽑기 전에 준비를 해야겠지.

    나무를 잘 벨 수 있는 날 선 도끼와 불이 잘 붙을 수 있는 기름을 잔뜩 준비해야 한다.

    데미안은 미친 듯이 웃으며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메이아…… 내 예쁜 종달새. 네가 자꾸 도망가면 갈수록 내가 황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만 늘어나고 있어.”

    황태자가 되기 위해 세력을 키우고, 많은 돈을 모았다. 검술도,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난 황태자도…… 황제도 관심이 없는데…….”

    메이아만 곁에 있다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살든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복형의 약혼녀가 되었다.

    메이아가 내 약혼녀만 되었어도 지금의 고생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데미안은 자신의 이마를 치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반듯한 머리는 금세 흐트러졌다.

    “데이빗을 더 일찍 죽였어야 했었나.”

    애초에 어린 메이아가 파츠래리와 약혼하기도 전에 죽였더라면……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고 왔을 텐데…….

    이젠 황태자 지위로는 부족하다. 황제가 되어야만 한다.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다 죽이고, 필요하다면 전쟁을 일으키면 된다. 그리고 메이아를 데리고 ‘그곳’에 도착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나와 그녀는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

    “그렇지…… 테베린……?”

    데미안이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미소 짓자 그림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처럼 일렁거리더니 그 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