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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128화 (128/163)
  • 128화

    파츠래리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강대국이라지만 일국을 다스리는 태양에게 너무 일방적인 통보 편지입니다.”

    아르헨은 관자 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래리, 네 기분을 내가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시리우스 제국과는 척을 져선 안 된다.”

    “압니다. 그렇지만 화가 납니다. 사실 플로렌스 대공을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만난 적이 있다고?”

    파츠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메이아 공녀를 만나러 마탑에 갔다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응접실에서 그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플로렌스 대공인 걸 알게 되어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파츠래리는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왜 그러냐? 래리.”

    “사실 말씀드리기 너무 창피한 일이지만…….”

    “말해 보거라.”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일국의 황태자로서 먼저 인사를 했지만 깔끔하게 무시 받았습니다.”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아?!”

    풀이 죽은 파츠래리는 얼굴을 살짝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절 아랫사람 내려보듯 깔보았습니다.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바마마한테까지 이런 편지를 보내다니…… 너무 화가 납니다.”

    파츠래리는 비스듬하게 고개를 숙이며 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를 보였다.

    아르헨은 그런 황태자의 분노어린 모습에 공감하지 않았다.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화가 난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힘없는 자가 화났다는 걸 보여 주는 건 오히려 보기 흉할 뿐이다.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화를 내 보았자 내 약함만 보일 뿐이다, 파츠래리.”

    “하지만!”

    “그만하거라. 어차피 방법이 없다면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밖에 없다. 데미안이 정말 예비 플로렌스 대공비를 다치게 했다면 전쟁의 명분은 충분하다.”

    데미안이 감옥에 가야 하는 현실에 파츠래리는 만족스러웠지만 그가 카르펜 제국으로 온다면 아르헨 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무시할 거라는 것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파츠래리는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잘 활용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플로렌스 대공은 예의도 없고 아랫사람을 깔아 보며 폭력적이라 사람들에게 말하면 될 일이다. 그러면 그가 카르펜 제국에 와서 자신을 무시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파츠래리 황태자 말이 맞았다’라며 수긍하며 동정표를 보낼 것이다.

    “플로렌스 대공이 카르펜 제국으로 와서 안하무인으로 굴 텐데…… 걱정입니다.”

    파츠래리의 걱정 어린 말에 아르헨은 고개만 저었다. 플로렌스 대공이 안하무인 하게 언행을 하더라도 참아야 하는 입장이다.

    “그는 그래도 되는 위치에 있다. 카르펜 제국을 지키고 싶다면 그가 왔을 때 눈치껏 행동하거라.”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고 나가라는 손짓을 보였다.

    “그만 나가서 데미안을 보면 이리로 오라 말하거라.”

    “알겠습니다.”

    플로렌스 대공이 온다는 건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는 미소를 숨기며 아르헨의 집무실을 나섰다.

    파츠래리는 곧바로 황궁에서 나와 하츠벨루아 공작저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루만에게 메이아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루만은 갑자기 찾아온 그를 반갑게 응대해 줬다. 그런 그에게 보자마자 메이아 이야기를 꺼낸다면 기분 나쁠 것이다. 그래서 파츠래리는 메릴이 보낸 편지 내용에 맞춰 말했다.

    “메릴 공녀와 약속이 있었는데 못 만난다는 편지를 받았네.”

    “그러셨습니까? 경매장 일로 사고 친 거 때문에 자숙하라 했습니다.”

    루만은 순진한 메릴을 꼬드겨 메이아의 물건을 팔아넘긴 사람을 잡아야 된다는 말을 했다. 솔직히 범인을 잡든 말든 파츠래리는 상관없었지만 그의 말을 경청하며 공감해 줬다.

    루만은 집사 드이임에게 메릴에게 황태자 파츠래리가 왔다는 걸 전하라 시켰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메릴이 들어왔다.

    “황태자 전하……,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메릴 공녀, 오늘 저녁 약속이 취소됐다기에 걱정이 되어 와 봤네.”

    “자숙 중이라서…….”

    파츠래리는 루만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근사한 곳에서 메릴 공녀와 저녁을 먹기로 했네.”

    “그러셨습니까. 하하, 그러면 다녀오셔야죠.”

    루만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메릴의 표정이 활짝 폈다.

    “아빠, 고마워요!”

    “그래, 황태자 전하와 맛난 저녁을 먹고 들어오렴.”

    “알겠어요.”

    외출을 허락받은 메릴은 파츠래리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메이아 공녀가 정말 이곳으로 돌아온 건가?”

    “예, 돌아왔어요. 그런데…….”

    메릴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초조한 표정을 짓다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메이아가…….”

    “공녀가?”

    메릴은 메이아의 약혼을 이야기해 줘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숨기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라면 조금 늦게 알게 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을까?

    “황태자 전하와 재결합 의사가 없어 보였어요.”

    이건 사실이니 말해도 되겠지.

    파츠래리는 재약혼을 확고하게 거절했던 메이아를 떠올리며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피며 관자를 꾹꾹 눌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단둘이 있을 수 있도록 자리만 마련해 주면 되네, 메릴 공녀.”

    “알겠어요.”

    “잊지 말게, 메릴 공녀. 나는 그대와 국혼을 올리든, 메이아와 국혼을 올리든 상관이 없어. 내가 원하는 건 하츠벨루아가의 힘이야.”

    메이아가 계속 거절한다면 메릴과 국혼을 올릴 수밖에 없다. 하츠벨루아 가문의 힘만 필요할 뿐이지 메릴은 필요하지 않다.

    황제가 된다면 메이아를 후궁으로 들이면 해결될 문제이고, 나중에 온전히 그녀에게 황후의 자리를 주어 메릴과 이혼하면 다 끝날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황후가 된 메릴을 후에 없애고 메이아를 황후로 올리면 될 일이다. 답은 정해져 있다. 어차피…….

    엘르민이 도와줄 테니 별걱정은 들지 않았다.

    “저보다 메이아를 원하시잖아요.”

    “원하지. 무척이나. 하지만 잊지 말게. 난 메이아를 후궁으로 둘 수 있는 위치라는 걸.”

    파츠래리의 노골적인 말에 메릴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데미안 황자가 오늘 공작저에 오셔서 메이아와 결혼하고 싶다 말하고 갔어요.”

    “어차피 그녀는 데미안과 결혼하지 못해.”

    “할 수도 있잖아요.”

    “아니, 절대 못 해.”

    데이빗의 부탁으로 어릴 때 메이아와 약혼을 하게 된 파츠래리다. 물론 얻어질 이득이 많기에 수락했다.

    오랫동안 중립을 유지했던 하츠벨루아 공작가의 힘이다. 그리고 약혼을 부탁한 이유는 데미안 때문이었다. 데이빗은 이복동생과 메이아의 결혼을 원치 않았기에 황태자인 자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메이아 또한 데미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두 사람의 결혼은 말도 안 된다.

    자신은 그저 시간을 들여 그녀를 설득하고 재약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마음을 보이면 된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꾸 플로렌스 대공의 말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지독히 원한다면 ‘노력’이 아니라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이름 모를 영식.>

    “하아…….”

    한숨을 쉬자 메릴이 무슨 일이냐 물었다. 파츠래리는 기다렸다는 듯 플로렌스 대공이 카르펜 제국을 방문한다는 이야기부터 그의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메릴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굉장히 무례한 자네요.”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은 본인의 위치를 잘 아니 갑질을 하는 거지. 귀족들 앞에서 나와 아바마마를 무시할 거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아.”

    “설마 기분 나쁘다고 전쟁 선포하는 건 아니겠죠?”

    “플로렌스 대공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걱정이네요…….”

    파츠래리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어느새 식사를 할 수 있는 고급 식당가에 도착했다.

    “이곳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잖아요.”

    “여기 와 보고 싶다고 말한 게 기억이 나서 이리로 왔는데, 메릴 공녀는 싫은가?”

    “아니에요. 갑갑한 공작저에서 나오게 해 주셔서 고마워요.”

    오늘따라 얌전한 메릴을 보며 파츠래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총 3층짜리 건물로 평민들은 출입 금지되는 곳이다. 1층은 각종 예술품들과 꽃이 매일 다르게 전시되어 단골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곳이다.

    올라가는 2층은 다양한 귀족들이 이용하는 곳이며 3층은 오로지 예약제로만 운영되는 곳이다. 갑작스러운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의 방문에 식당은 혼비백산으로 3층의 모든 예약을 취소하고 안내하겠다 했지만 파츠래리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인데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순 없네. 2층으로 안내하라.”

    “알겠습니다. 2층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로 안내하겠습니다.”

    털털한 파츠래리 모습에 식당 사장부터 종업원들은 그에게 호감을 느끼며 카르펜 제국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며 말했다.

    식당의 사장이 직접 파츠래리와 메릴이 앉을 곳을 안내했다. 2층으로 올라오자 많은 귀족들은 그들을 알아보며 자리에 일어서 인사했다.

    “인사할 필요는 없네. 다들 식사를 즐기게.”

    사람들은 파츠래리와 메릴이 데이트를 하러 온 것이라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눌지 귀를 쫑긋 세웠다.

    음식을 주문하자 곧바로 코스별로 나오기 시작했다.

    “메릴, 공녀 맛은 어떤가?”

    “그럭저럭 먹을 만하네요.”

    “하아…….”

    “왜 또 한숨을 쉬세요? 황태자 전하.”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이 온다면 무슨 음식을 대접해야 될지 막막해서 말이지…….”

    “걱정이네요. 하나부터 열까지 얼마나 다 우리를 우습게 볼까…….”

    “이미 우습게 보고 있지. 그러니 함부로 그런 편지를 보내는 것이지.”

    마차에서 충분히 테오도르의 이야기를 들은 메릴은 파츠래리의 말에 곧잘 맞받아쳤다.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의 이야기가 파츠래리 입을 통해 나오자 귀족들은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었다.

    파츠래리와 메릴은 쉬지 않고 테오도르의 뒷담화를 펼쳐 갔다.

    이야기를 듣던 주위 귀족들은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이 나쁜 사람이라 인식되었다.

    사람들의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파츠래리는 피식 웃으며 메릴과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파츠래리는 테오도르를 비방하는 소문을 제대로 퍼트렸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입에서 전해지는 소문일수록 몸집이 커진다 했다. 이로써 플로렌스 대공이 방문해 자신의 인사를 받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소문대로 예의 없는 갑질꾼이라며 뒤에서 손가락질할 거다.

    속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파츠래리는 메릴에게 웃어 줬다. 오늘 그녀는 자신의 말을 잘 맞받아쳤다. 처음으로 훌륭하다 칭찬해 주고 싶었다.

    “공작저에 데려다주겠소.”

    “아니에요. 먼저 황궁으로 돌아가세요. 아까 지인을 만났는데 인사를 제대로 못 해서 차 한잔하고 싶어서요. 오래간만에 외출이라서요.”

    공녀가 혼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다.

    “괜찮겠소?”

    “괜찮아요. 지인에게 공작저로 마차 한 번 태워다 달라고 하면 돼요.”

    “그러면 나 먼저 가겠소. 메이아 공녀가 저택으로 돌아오면 바로 편지를 보내 주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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