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아르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설사 데미안이 사고를 쳤다 치자. 제국 간의 문제가 생긴다면 외교 사절단이 오고 가며 협의점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플로렌스 대공은 통보했을 뿐이다. 그래도 되는 위치이기 때문에 협의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다.
‘황자를 가두지 않으면 전쟁이라니!’
아르헨은 개인 집무실로 들어가 황실 외교관들을 입궁하라 명했다. 마침 황궁에 있던 외교관이 급하게 그를 찾아와 인사했다.
“제국의 태양을…….”
“인사는 됐다.”
아르헨은 그에게 테오도르가 보낸 편지를 건넸다.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가에서 보낸 편지다.”
외교관 에겐은 성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단 이틀 만에 전쟁 종결을 한 시리우스 제국의 대공이 보낸 편지라는 말에 긴장한 채 받아 들었다.
“예.”
편지를 건네받은 외교관 에겐은 구겨진 종이를 펴고 읽기 시작했다. 그는 다 읽은 편지를 곱게 접어 다시 황제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폐하.”
“뭐지?”
“하나는 정말로 데미안 황자께서 예비 플로렌스 대공비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
“또 하나는?”
“데미안 황자를 사칭한 자가 있던 게죠.”
“사칭한 자라…….”
사칭범이 왜 데미안을 팔았을까?
“하지만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입니다. 사칭범 하나 구분 못 하고 일방적으로 편지를 보냈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이 편지의 내용은 진짜일 수도 있습니다.”
에겐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헨은 차갑게 내려앉은 눈빛으로 책상 위 편지만 뚫어지게 쳐다만 볼 뿐이었다. 에겐은 그런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폐하, 이게 잘못된 편지가 아니라면 먼저 데미안 황자를 불러 상황을 물어보시는 게 빠르실 것 같습니다. 외람되오나 만에 하나 예비 플로렌스 대공비를 다치게 한 것이 맞다면…… 데미안 황자를 감옥에 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쾅!
책상을 강하게 내리치며 아르헨은 에겐에게 호통쳤다.
“내 아들을 감옥에 보내라? 외교관이 왜 존재하는지 잊은 모양이지? 방법을 찾으란 말이다!”
“하지만 편지에는 협의할 의향이 전혀 없을뿐더러 통보만 했습니다. 내용을 유추해 보면 빠른 시일 내에 플로렌스 대공이 카르펜 제국으로 올 듯합니다.”
아르헨은 이빨을 부득부득 갈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일말의 여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당장 가두지 마시고, 그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때 황자님을 감옥에 보내셔야 합니다.”
황제의 개인 응접실에 외교관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그들도 플로렌스 대공의 편지를 읽고 에겐과 똑같은 의견을 내놓을 뿐이었다.
아르헨의 미간의 주름이 깊어져만 갔다. 방법이 없다.
시리우스 제국은 전 제국이 알 만큼 강대국이다. 전쟁이라도 난다면 카르펜은 속절없이 당할 뿐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군사력부터 힘도, 자금도 시리우스 제국이 압도적이니 말이다.
대제국의 횡포가 따로 없다. 그렇다고 이쪽이 불만을 토해 낸다거나 화를 낼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데미안이 잘못한 일이라면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깊은 한숨을 쉰 아르헨의 미간의 주름이 깊어져만 갔다. 방법이 없었다.
*
메릴은 방 안에서 초조하게 왔다 갔다 했다. 몰래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맞아…….”
메릴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방 밖에 있는 하녀를 불렀다.
“파츠래리 황태자 전하에게 편지를 전해 줘.”
하녀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현재 방 밖으로 나올 수 없으니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루만 또한 그리 생각해 편지를 검수하지 않고, 황궁에 보냈다.
집무실에서 일을 보던 파츠래리는 메릴의 편지라는 말에 의아했다.
“이상하군. 메릴 공녀가 편지를 보낼 리가 없을 텐데…….”
편지를 받아 든 파츠래리는 궁금한 표정으로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안부 인사와 함께 경매장 일 때문에 집 밖으로 못 나와서 저녁 식사를 같이 못 한다는 내용이다.
그녀와 요즘 저녁을 함께 먹은 적이 없다. 서로 파혼을 원하는데 만나서 정답게 저녁을 먹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있지도 않은 저녁 약속을 만들어 지키지 못한다며 편지를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파츠래리는 다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유난히 한 줄에서 멈춰 읽고 또 읽었다.
[메이아가 공작저로 돌아왔습니다.]
메이아가 돌아왔다는 이야기와 현재 그녀는 황궁에서 황태후 로즈를 만나고 있는데 알고 있냐는 내용이었다. 메릴은 황궁에 있을 그녀를 데리고 속히 공작저로 와 달라고도 적혀 있었다.
“메이아가?”
편지를 읽다가 생소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보좌관 앤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해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메이아가 왔어…….”
앤디는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파츠래리를 쳐다봤다.
“그녀가 황궁으로 왔어!”
파츠래리는 벌떡 일어서 황태후 로즈가 있는 궁으로 향했다.
“전하, 복도를 뛰시면 안 됩니다.”
“천천히 가십시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그의 귓가에 꽂히지 않았다. 메이아가 왔다는 사실만으로 기쁘고 설레는 마음이 가득할 뿐이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로즈의 궁에 방문했을 때에는 황태후도, 메이아도 없는 상황이었다.
“벌써 공작저로 돌아간 건가? 아니면 길이 엇갈렸을까?”
파츠래리는 황궁에 와서 로즈만 보고 갔다는 메이아를 생각한 순간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손끝까지 차가워지는 기분에 우울함이 몰려왔다. 솔직히 기대했었다.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예전 관계로 돌아가요’라고 말하며 자신을 다시 받아 주는 상상을 했다. 마음속으로는 메이아와 국혼까지 올리는 상상을 하며 살짝 들뜨고 행복해했다.
티 나게 큰 한숨을 내쉬는 파츠래리를 옆에서 보던 보좌관 앤디를 그의 눈치를 슬슬 보며 곁을 지켰다.
그때였다.
“전하!”
누군가 파츠래리를 불러 세웠다. 황제의 시종장이 뛰어오고 있었다.
“시종장 아닌가?”
숨을 거칠게 내쉬던 시종장 호프만은 숨을 진정시키며 파츠래리에게 인사했다.
“제국의 다음 태양을 뵈옵니다.”
“무슨 일이지?”
“데미안 황자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
갑자기 데미안을 찾는 시종장의 얼굴은 어딘가 아파 보이는 사람처럼 창백해 보였다.
“오늘은 데미안을 보지 못했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그게……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아바마마가?”
“예.”
무슨 일로 데미안을 찾는 것일까? 시종장 얼굴을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찾는 이유는?”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플로렌스 대공가에서 편지를 보냈는데 그걸 읽으신 이후 급히 찾으십니다.”
“플로렌스 대공이라면…….”
시종장 입에서 나온 플로렌스 대공이라면 마탑에 메이아를 보러 갔을 때 응접실에서 마주친 사내였다. 그가 왜 데미안을 찾는 것일까?
“그가 왜 데미안을 찾는 거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메이아를 만나러 하츠벨루아 공작저로 가는 것보다는 황제 아르헨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마친 파츠래리는 발길을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플로렌스 대공가에서 편지가 왔다고 들었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파츠래리의 말을 들은 아르헨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시종장을 만난 모양이구나.”
“예, 황태후 마마의 궁 앞에서 만났습니다.”
파츠래리는 평소에도 볼 수 없던 아르헨의 얼굴을 보며 놀랐다. 그는 평소에 절대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지만 오늘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플로렌스 대공이 대체 무슨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며, 그게 데미안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황제는 평소에 데미안을 찾지 않는다. 찾을 이유도 없을뿐더러 찾는다 하더라도 굳이 시종장을 시키지 않는다.
“눈치가 제법 빨라졌구나, 파츠래리.”
아르헨은 손짓으로 파츠래리를 불러 테오도르가 보낸 편지를 건넸다.
건네받은 편지를 공손히 받아든 파츠래리는 접힌 종이를 펴 읽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데미안이 플로렌스 약혼녀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이런 생뚱맞은 내용이 정녕 플로렌스 대공가에서 온 것이 맞습니까?”
“맞다.”
파츠래리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편지를 읽고 또 읽었지만 데미안을 감옥에 가두라는 통보만 있었다. 마탑에서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매우 사랑하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로 달콤한 눈빛으로 약혼녀를 생각하던 플로렌스 대공이었다.
잠깐의 대화 속에서도 그가 얼마나 그녀를 깊이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데미안이 그의 약혼녀에게 상처를 입혔다? 큰일도 보통 큰일이 아니다. 시리우스 제국에서 일방적으로 전쟁을 걸어 온다면 카르펜 제국은 질 수밖에 없다. 전쟁을 일으킬 명분 또한 충분하다.
“데미안이 도대체 플로렌스 대공의 약혼녀에게 무슨 짓을…….”
설마 메이아를 만나러 갔던 그날 데미안도 마탑에 왔었나? 혹시 날 따라온 것인가? 대체 언제 플로렌스 대공의 약혼녀를 만나 실례를 저지른 것인가!
편지를 읽고 책상 위에 내려놓은 파츠래리는 좀처럼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시리우스 제국이 가진 힘을 잘 알고 있다. 마탑에서도 그와 좋은 관계로 있어야 했지만 그는 대놓고 인사를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난처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그 난감한 상황을 수습할 시간도 없이 그는 흥미 없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고는 사라져 버렸다.
“외교관들이 해결 방안이라고 내놓은 게 플로렌스 대공이 오면 그 당일에 데미안을 감옥에 가두자는 말뿐이더구나.”
그는 머리를 짚으며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편지의 내용을 본다면 플로렌스 대공은 곧 카르펜 제국으로 온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마탑에서 만났을 때 그가 생각이 났다.
<나는 카르펜의 황태자에게 인사를 받고 싶지 않네.>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몹시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는 플로렌스 대공이다. 대제국의 대공이자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자다. 척을 지면 안 되는 관계에서 이미 척을 져 버렸다.
그 사실을 아르헨이 안다면 얼마나 실망할지 예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