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황제에게 간다고만 편지를 보냈다고요?”
메이아는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거리며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아무리 카르펜 제국의 황제에게 통보해도 되는 위치라 하더라도 막상 겪어 보니 그가 가진 위치와 그리고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 알게 되었다.
“그렇습니다.”
테오도르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의 기본은 황제에 대한 충성이다. 메이아는 카르펜 제국의 공녀이기에 카르펜 황제에게 충성심이 있다는 가정하에 통보했단 말에 언짢을 수도 있다.
“제가 메이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말을 한 듯합니다.”
하지만 메이아는 고개를 저으며 웃어 줬다.
“테오는 통보해도 되는 입장이잖아요.”
“그래도 다음부턴 조심하겠습니다.”
테오도르는 그녀의 등과 허리를 두 팔로 감싸며 끌어안으며 안도했다. 메이아의 향긋한 체향이 맡아지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그리웠던 순간인지 그녀는 모를 거다.
“메이의 팔을 치료한 다음 저와 함께 카르펜으로 가는 겁니다.”
“대공저는요?”
“가신들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메이의 성인식이 끝나면 바로 돌아간다 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속살거렸다.
“하츠벨루아 공작저에서 지낼 제 방은 준비하셨습니까?”
“물론이죠.”
공작저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그를 생각하며 자신의 맞은편 방을 정리한 일이다.
“제 방과 가까운 곳으로 준비했어요.”
테오도르는 고개를 살짝 떨어뜨리며 열기가 가득 찬 눈빛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한 방을 같이 쓰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와 보낸 사랑스러운 밤을 저절로 떠올린 메이아는 그의 어깨를 콩콩 때리며 빨개진 얼굴을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테오도르는 큰 소리로 웃으며 메이아가 너무 사랑스럽다며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전 살짝 기대 중이었는데 방을 따로 써야 하는 겁니까? 몹시 아쉽습니다…….”
“테오, 너무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눈이 보이네요.”
“메이 한정으로 엉큼합니다.”
테오도르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며 말했다. 그의 속내가 다 보이는 말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내 여왕님한테 엉큼하게 굴면 안 되는 겁니까?”
“언제부터 내가 테오의 여왕님이 된 거죠?”
“처음부터 메이는 내 여왕이 될 거라는 걸 예감했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지금 피어오른 분위기가 테오도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 메이아는 방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테오한테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황제의 얼굴이 상상이 안 되네요.”
언제나 근엄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황제가 테오도르의 편지를 읽고 우왕좌왕하는 표정이 떠올리자 웃음이 나왔다.
그가 무슨 편지를 보냈는지 내용이 궁금했다. 그냥 간다고 통보만 했을까? 궁금해서 물어보기 전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데미안 황자를 감옥에 가두라 했습니다.”
테오도르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풀며 말을 이어 나갔다.
“데미안 황자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것도 제국 간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아주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걸 편지에 적어 황제에게 보냈습니다.”
만약 전쟁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파츠래리와 데미안을 차례대로 목을 베어 두 번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상상을 했다. 테오도르는 살벌한 상상을 숨기며 상처받은 듯한 애틋한 눈빛으로 메이아를 멍든 팔을 쳐다봤다.
“그는 예비 플로렌스 대공비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테오도르는 예비 플로렌스 대공비에게 상처를 입힌 황족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 입장이며 벌을 줄 수 있는 위치다.
“감옥에 가두지 않는다면 전쟁을 한다고 편지에 써 보냈습니다.”
제국 간 문제가 생긴다면 각 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들이 서로 합의점을 찾아야만 하지만 그는 협의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데미안을 감옥에 가두지 않으면 전쟁이라는 말을 바로 했다는 건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보여줬다.
“감옥에 가두지 않는다면 정말 전쟁을 선포할 생각이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쟁을 하게 된다면 록벨리온 공작에게 부탁할 겁니다.”
그는 소드 마스터인 록벨리온 공작을 사냥개 취급을 하며 방긋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록벨리온 공작이라면 자기 일처럼 화내며 저 대신 전쟁에 나설 겁니다. 물론 소드 마스터이니 질 리도 없죠.”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하다. 요번 성국과의 전쟁은 시리우스 제국의 황족을 살해하려는 죄, 흑마법사들과의 인체 실험, 그리고 그 외 잔인한 죄의 증거들이 확실하기에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카르펜 제국과의 갑작스러운 전쟁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는 어려울 수 있다.
물론 테오도르 입장에선 전쟁의 명분이 있다. 그렇지만 메이아 쪽에서 본다면 카르펜 제국은 자신이 자란 곳이다. 협의점을 찾지도 않고 전쟁으로 쓸어버린다면 그의 잔혹함에 사람들은 수군거릴 거다. 오히려 나고 자란 제국을 버린 매정한 대공비라며 메이아를 보며 숙덕거릴 수도 있다.
“골칫거리를 치울 수 있는 방법이 전쟁이라면 저는 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이야기하든 신경 안 씁니다.”
메이아는 자신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테오도르의 말에 그를 쳐다봤다. 테오도르는 상냥하게 메이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개는 만만한 상대를 보면 짖는다 하죠.”
“하지만 맹수 앞에서는 짖지도 못하고 꼬리를 말아 내립니다. 개는 그런 동물입니다.”
메이아는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테오도르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조금 있으면 제 성인식이고 그 뒤에 우리 결혼식 준비도 해야 하는데 전쟁까지 하면 너무 바빠질 것 같은데요.”
“결혼…….”
결혼이라는 말에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데미안에게 화가 난 테오도르를 진정시키기에 이만큼 좋은 단어는 없을 거다.
“전쟁을 하게 되면 바빠지게 될 테고…… 바빠지면 결혼을 미루어도 저는 괜찮아요.”
“결혼을 미루어선 안 됩니다!”
고개를 저으며 테오도르는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절대 안 됩니다.”
테오도르는 좌우로 도리질하며 안 된다고 말했다. 메이아는 도리질하는 그의 모습이 귀여워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최대한 빨리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 테오도르의 뺨을 쓰다듬었다.
“저도 테오와 같은 마음이에요.”
그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메이아는 손을 뻗어 테오도르의 검은 머리카락을 살짝 쓸었다.
그는 그녀와 시선을 맞춘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대로 대공가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다리 사이로 천천히 파고 들어오는 그의 몸이 어떤 반응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대공가로 가고 싶다는 뜻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깨닫자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테오도르를 진정시켜야 한다.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르네요.”
“무슨 말씀입니까?”
“참는 사람에게 복이 온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 참는 거 잘합니다.”
“전혀 참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요.”
시선이 그의 은밀한 곳에 닿았다. 테오도르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얼마나 참는 걸 잘하고 있는지 메이는 모르실 겁니다.”
떨어져 있는 동안 카르펜 제국을 몇 번이나 가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테오도르를 보며 메이아는 결국 크게 웃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미소 지었다. 그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나 또한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
테오도르의 손이 메이아의 턱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대로 얼굴을 좌우로 살피며 미소 지었다.
“테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예, 묻었습니다.”
“어디요?”
“제가 닦아 드리겠습니다.”
그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뺨을 비비자 그 감촉이 몹시 간지러워 메이아는 웃으며 몸을 비틀었다.
“후훗, 너무 간지러워요. 제가 거울 보고 닦을게요.”
“싫습니다. 제가 닦아 드릴 겁니다.”
“진짜 뭐 묻은 거 맞아요?”
“네, 묻었습니다.”
뺨과 목덜미에 느껴지는 그의 손바닥의 열기에 몸이 멋대로 움찔거렸다.
움찔거리는 메이아의 모습을 만족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며 테오도르의 왼손이 허리를 지분거렸다.
“왜 자꾸 몸을 빼십니까? 많이 간지러워서 그런 겁니까?”
“알면서 왜 물어봐요.”
“알고 있지만 대답을 듣는 것과 내 생각대로 하는 건 다르니까요.”
“그러면 제가 무슨 대답을 하길 원하세요?”
“메이가 무슨 대답을 하든 저는 무조건 좋다고 할 겁니다.”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뺨을 쓰다듬으며 눈가를 곱게 휘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고, 싫어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않을 겁니다.”
테오도르는 메이아를 내려다보며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메이, 너무 귀엽습니다.”
그렇게 말한 테오도르는 방긋방긋 웃으며 품 안에 있는 메이아를 보고 무척 만족스러워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메이, 저에게 대답이 아닌 명령을 내려 주셔도 됩니다. 명령을 받은 저는 착실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움직이겠습니다.”
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심장을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저에게 내리실 명령은 없으십니까?”
블랙 레트리버가 장난감을 물어와 다시 던져 달라는 듯한 모습처럼 보였다.
“이럴 때면 빨리 결혼을 올리고 싶습니다.”
메이아는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자신의 뺨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더우십니까? 메이, 뺨이 빨개졌습니다.”
테오도르는 입술 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 모습이 꼭 손을 달라는 주인의 요청에도 앞발을 주지 않고, 꼬리를 흔들며 잔망스럽게 주위를 돌아다니며 뛰어다니는 강아지 같아 보였다.
“아무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테오도르는 메이아에게서 몸을 떼고 떨어졌다. 메이아는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더 곁에 있다가는…….”
참지 못하는 짐승이 될 것 같아서, 라는 말을 삼킨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요! 테오.”
“네?”
“명령 내려 달라면서요.”
테오도르는 메이아 옆에 앉았다.
“앉았습니다.”
테오도르는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또 내리실 명령은 없으십니까?”
메이아의 뺨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갔다.
“없으면 저는 일어나 있겠습니다.”
“옆에 있어 줘요.”
메이아는 일어서는 테오도르의 옷깃을 붙잡았다.
“제 옆에 와서 앉아 줘요…… 떨어져 있지 말고…….”
테오도르의 입술이 달싹였다. 옆에 있어 달라는 메이아의 말에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왕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테오도르는 자신을 쳐다보는 메이아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며 문밖에서 푸링이 들어간다 외쳤다. 테오도르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며 다리를 꼬아 앉았다.
메이아 또한 지금 이곳이 마탑의 응접실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단둘이 파스타 먹으러 갈래요?”
테오도르의 검은 눈동자가 확장됐다가 이내 제자리를 찾으며 입술을 호선을 그렸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