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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124화 (124/163)

124화

“아니지? 농담이지? 약혼이라니……. 파혼한 지 얼마 안 되었고, 마탑에 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파츠래리 황태자 전하도 파혼하자마자 메릴 공녀님하고 약혼을 올리셨습니다.”

“그거랑 이거랑 같아?”

메릴은 항상 자기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한다.

스스로 한 말과 행동에 전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유디는 잘 알고 있었기에 표정 변화 없이 지그시 그녀를 쳐다만 봤다.

메릴의 화법을 처음 겪어 본 사람들은 당혹스러움에 입을 다물지만 유디는 어릴 때부터 한 번씩 그녀의 성질을 겪어 왔다. 그러므로 절대 메릴이 듣고 좋아할 말은 해 주지 않는다.

“아주 좋은 분하고 약혼하셨습니다.”

약혼했냐고 여러 번 따져 묻는 메릴의 질문에 덤덤한 얼굴로 그녀의 말에 답했다.

“메이아가 누구랑 약혼했는데?”

“그만!”

루만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메릴에게 소리쳤다.

“뭘 그만하라는 거에요? 메이아가 누구와 약혼했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메릴은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루만과 유디를 번갈아 보았다.

“별 시답잖은 사내라면 당장 파혼시켜야죠!”

메릴의 말에 유디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메이아와 약혼한 사람이 감히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별 시답잖은 사내라 말하니 어처구니없었다.

“메이아는 황태자비가 되어야 하는데……. 대체 누구랑 약혼한 거야? 파혼할 수 있는 거지?”

유디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메릴을 쳐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허’ 하며 기가 막혀 웃을 뻔했다.

마음대로 약혼녀 자리를 가져갈 땐 언제고 지금 와서는 약혼녀 자리를 줄 테니 메이아가 원하는 약혼을 파혼시키라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메릴, 황태자비 자리가 너 가져라, 나 가져라, 하는 자리인 줄 아느냐!”

“싫어! 나 파츠래리 님이 너무 싫다고! 나 파혼하고 싶어.”

루만은 메릴의 말에 놀람과 화남을 넘어 경악에 물들었다.

“메릴, 잘 들어라.”

“아빠!”

“메이아는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가 되지 못해.”

“왜? 나는 메이아가 포기해 줘서 쉽게 약혼녀가 되었잖아. 그렇다면 내가 포기해 주면 다시 메이아가 될 거 아니야!”

메릴에게 약혼녀 자리를 양보한 메이아는 아쉬울 게 없다는 듯 아주 시원한 표정으로 떠나기 전 루만과 이렇게 대화했다.

<넌 평생 황후가 되고 싶어 했는데 고작 자유 결혼서 한 장과 맞바꾸기에는 아까운 자리 아니었느냐?>

<이젠 제가 카르펜 제국의 황후가 되더라도 기뻐해 주실 어머니, 아버지가 안 계세요.>

그렇게 메이아는 떠났다.

“메이아는 황후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그때 쉽게 약혼녀 자리를 내려놓은 거란다.”

“자유 결혼서 얻었잖아! 그 조건으로 한 거잖아.”

“메이아가 약혼녀 자리 하나 못 지켜서 그런 조건을 건 줄 아느냐?”

메이아는 웃으며 “자유 결혼서 약속해 주지 않는다면 여기 남아서 파츠래리 님을 흔들어 볼까요?”라는 말을 했다. 그 말뜻은 얼마든지 약혼녀 자리를 지킬 수 있지만 자유 결혼서만 주면 포기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왜 자유 결혼서를 원했을까?

메이아가 마탑을 떠나고 나서 그 해답을 얻었다.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메이아와의 혼사를 바랐다. 만에 하나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주는 곳이 있었다면 정략혼을 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다이아몬드 광산을 주겠다는 곳이 있었다.

그렇지만 자유 결혼서를 신의 앞에서 맹세했기 때문에 꼼짝없이 지켜야만 했다.

주도면밀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번에 메릴이 친 사고 수습도 보면 메이아가 아군일 때 얼마나 든든한지 알게 되었다.

“넌 그 애를 몰라. 그리고 메이아의 약혼이 깨질 일은 절대 없다.”

절대 깨질 리 없다. 메이아가 설사 원한다 하더라도 테오도르는 그걸 막을 거다.

루만은 마탑에서 짧게 만났던 플로렌스 대공을 생각했다.

테오도르는 메이아 곁에서 오로지 조카만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자신을 쳐다볼 때도 사슴 같은 눈망울을 보여 주며 해맑게 웃으며 볼까지 붉게 물들였다. 심지어 예의까지 밝았다. 그 모습이 충성심 높은 커다란 강아지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건 모두 착각이었다.

작별 인사를 나눌 때 커다란 강아지처럼 보였던 그의 민낯을 보았다.

<그거 아십니까?>

<예?>

<난 절대 사랑이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존재한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죠. 물론 지금은 메이를 만나고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지만요.>

<아, 네…….>

<메이를 눈에 담는 순간 사랑이란 걸 알게 되었고, 그녀를 믿는 순간 사랑 또한 믿게 되었죠.>

<하하……, 그렇습니까.>

<메이가 카르펜 제국이 싫다면 저는 지도에서 깨끗하게 지워 버릴 겁니다.>

생긋 웃는 테오도르의 미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

<무서운 농담이십니다, 하하하. 메이가 카르펜 제국을 싫어할 리가요. 하하, 고향입니다, 고향.>

<원래대로라면 지도에서 지워진 카르펜 제국명을 ‘메이아’로 바꾸고 예쁘게 포장해서 그녀에게 선물할 생각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막말이냐며 테오도르에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루만은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지도에서 카르펜 제국을 지울 수 있는 군사력도.

제국명을 바꿀 권력도. 제국을 포장해 선물해 줄 능력도.

플로렌스 대공이라면 정말 그럴 수 있다.

<농담 아닙니다.>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웃고 있는 그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루만은 저절로 눈이 아래로 내리깔리면서 오한이 들었다.

<메이가 원하지 않으니 선물로 줄 수 없어 조금 슬펐습니다. 그렇지만 전 그녀를 사랑하니까 무조건 그녀의 말을 존중하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따라갈 겁니다. 저보고 죽으라고 해도 전 죽을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한 경고였다.

<그녀를 너무 사랑합니다.>

얼마든지 지도에서 카르펜 제국을 지울 수 있지만 메이아 때문에 안 지운 것이다.

메이아가 원한다면 카르펜 제국을 지운다는 뜻도 포함이다.

테오도르가 커다랗고 순한 강아지가 되는 건 메이아 앞에서일 뿐이었다.

그는 먹이사슬 최상위 포식자처럼 냉정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웃었다.

너 같은 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듯이…….

<그리고 하츠벨루아 공작, 고맙습니다. 메이와 황태자를 파혼시켜 줘서.>

만약에 파혼하라고 말하는 순간 카르펜 제국은 지도에서 지워질지도 모른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메릴은 계속 메이아가 파혼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하니 루만은 신경질이 났다.

“메이아가 파혼을 하지 않을 거다. 상대방 측도 파혼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설득할게, 아빠!”

메릴은 큰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 같으냐? 카르펜이 망하는 꼴을 봐야 속 시원하겠냐!”

“왜 소리를 질러! 누구랑 했는데? 나 황태자비 하지 않을 거야!”

루만은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비 하지 않을 거야. 국혼 올리기 싫어. 파혼시켜 달란 말이야. 메이아한테 다시 약혼녀 자리 돌려주고 싶단 말이야……. 흑.”

메릴의 징징거림에 질려 버린 루만이 신경질을 내며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드이임도 루만을 따라 나갔다.

엉망이 된 집무실에 유디와 메릴만 남았다.

“대체 누구랑 한 거야? 유디, 왜 아빠는 말 안 해 주는 거야, 흐끅.”

유디는 몇 차례 입술을 달싹이다 한숨을 또 내쉬었다.

“아가씨에게 직접 여쭤보십시오.”

“그냥 말해!”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메릴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메이아의 약혼은 설득하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토마스를 만나야 해!”

메릴은 그를 만나기 위해 공작저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루만의 명령으로 방에 갇혔다.

토마스를 만날 수 없었던 메릴은 어떻게서든 밖으로 나가기 위해 사용인들에게 금품을 주며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다들 거절했다.

돈 몇 푼에 가주의 명을 어길 사용인이 누가 있는가!

메릴은 방문 밖으로도, 창문 밖으로도 나갈 수 없었다.

방 안에서 초조하게 왔다 갔다 걸어 다니던 그녀는 평소에는 앉지도 않을 책상 앞에 앉았다.

깃펜과 잉크 그리고 편지지와 봉투를 꺼냈다.

“편지라도 어떻게서든 보내야 하는데…….”

그녀는 가벼운 깃펜에 잉크를 살짝 찍어 편지지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씨가 마음대로 써지지 않아 신경질적으로 깃펜을 벽에 던졌다.

글씨 쓰는 걸 싫어했던 메릴은 평소에 편지 쓸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대필을 시키는 편이었다.

“대필하는 애한테 시킬 수도 없고! 짜증 나.”

메릴은 다시 새로운 편지지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토마스에게 줄 편지를 한참을 적었지만 이걸 지금 누구에게 전하도록 시킨다면 루만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들었다.

이 편지가 루만의 손에 들어간다면 토마스가 범인이라는 걸 알리는 꼴이다.

그러니 절대 토마스만 봐야 하는 편지다.

“편지를 전해 줄 바에는 내가 가는 게 낫지.”

메릴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자신의 상황에 짜증만 계속 쌓였다.

뜻대로 되지 않으니 더욱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다.

“메이아가 오면 도움을 요청하자.”

저택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 말하기로 결정했다.

메릴은 희망적인 미래를 그리며 끝없이 자신을 스스로 되뇌며 마음을 위로했다.

“서로 파혼하고 나는 토마스와 결혼하고 메이아는 황태자비가 되면 되는 거야. 그러면 돼.”

메릴은 엄지손톱을 툭툭 물어뜯으며 계속 중얼거렸다.

“메이아는 나한테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 자리도 양보해 줬잖아. 그러니깐 요번에도 간절하게 부탁하면 그 남자랑 파혼하고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가 다시 되어 줄 거야. 그래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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