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123화 (123/163)
  • 123화

    들어오자마자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읽은 데미안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부녀간의 오붓한 대화를 내가 방해했나 보군. 어라? 메릴 공녀, 울고 있는 건가?>

    데미안을 따라 방으로 뛰어 들어온 집사 드이임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가 봐.>

    <예, 주인님.>

    데미안은 루만의 책상 위로 쾅 소리 나도록 두 손을 내려치며 말했다.

    <공작, 나한테 할 말 없어?>

    루만은 평소의 데미안과 다른 모습에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책상에 짚은 두 손을 떼어 낸 데미안은 고개를 들고 앉아 있는 루만을 내려보며 미소 지었다.

    <메이 어딨어? 공작.>

    <황궁에 가 있는 거로 압니다.>

    황궁에 있는 거로 아니, 정확히 어디 갔는지 모른다는 뜻을 담아 말했다.

    <메이 약혼했어?>

    루만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어느새 눈물을 멈춘 메릴이 그의 말에 놀라며 질문했다.

    <데미안 황자님, 그게 무슨 소리세요?>

    <아아, 메릴 공녀는 쿠룬달스 백작 영식이랑 연애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동생한테는 관심이 없나 보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연, 연애라니요.>

    <왜 말은 더듬고 그래? 찔리는 거 있어? 그런 찔리는 표정을 지으니까 진짜인 줄 알겠어. 내가 공녀에게 농담한 거잖아, 농담.>

    <함부로 그런 농담 하지 말아 주세요.>

    메릴은 속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데미안은 사슴을 사냥하기 전 어슬렁거리는 맹수처럼 느릿하게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메이가 나에게 약혼을 했다고 말해 줬는데 그 말이 너무 거짓말 같아서 확인하러 온 거야.>

    루만은 데미안의 말에 침묵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메릴, 넌 나가 보아라.>

    <아빠! 메이아가 약혼을 했다니! 무슨 말이에요! 아니죠?>

    <메릴 공녀, 정말 몰랐어? 난 메이에게 직접 들었어. 하하하, 웃기지? 난 너무 웃겨서 웃음이 절로 나와.>

    소리 내 웃는 데미안 모습에 루만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참을 끅끅거리며 웃던 데미안은 루만을 노려보았다.

    <공작, 거짓말이지? 그렇지?>

    <조카가 원하는 남자가 황자님이시라면 결혼시킬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약혼한 건 맞고?>

    <약혼한 것은 맞습니다.>

    사실 루만은 메이아에게 자유 결혼권을 약속한 것을 너무 섣부르게 행동한 것에 후회했다.

    만약에 데미안과 결혼이라도 해서 그를 황태자로 만들면 메릴은 정말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다행히 메이아는 플로렌스 대공비가 될 예정이다.

    비록 자신보다 신분이 높아졌지만 메릴의 자리를 넘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차피 타국으로 가면 끝날 인연이니.

    <조카가 그 남자와 약혼을 원했습니다.>

    <역시 나와 결혼시킬 마음이 없었어. 공작, 안 그래?>

    <그건 결코 아닙니다. 조카가 원한다면 그 누구라도 결혼시킬 의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데미안은 말했다.

    <지참금 얼마에 메이를 팔아치운 거야! 메이를 사랑한다고 말한 내가 우스운 거야? 공작, 그런 거야?>

    데미안의 눈동자 속에서 번들거리는 광기에 루만의 몸이 저절로 경직되었다.

    <고아가 된 조카의 약혼녀 자리도 빼앗고 마탑으로 쫓아냈으면 그걸로 된 거잖아!>

    그의 서늘한 목소리에 담긴 위압감에 루만의 손이 잘게 떨렸다.

    <말씀이 과하십니다, 황자님.>

    데미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만이 앉아 있는 책상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과해? 내 말에 틀린 거 있어? 그녀를! 내 메이를 지참금 얼마에 팔았는지 말만 해. 내가 그 돈의 몇 배를 줄게.>

    <데미안 폰 마브로 황자님!>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 루만은 참지 않고 소리쳤다.

    <더는 하츠벨루아 가문을 더럽히는 발언을 삼가셔야 할 것입니다.>

    데미안은 소리치는 루만이 우습다는 듯 책상에 양손을 짚고 상체를 기울이며 그에게 가까이 몸을 숙였다.

    <내 말이 우스워? 공작.>

    가까이 오는 데미안을 루만 또한 피하지 않았다.

    <이만 저택에서 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루만은 축객령을 내렸다.

    데미안은 섬뜩한 눈동자를 보이며 굽혔던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뭐, 그녀가 누구와 약혼을 해도 상관없어.>

    누구와 약혼을 하든, 결혼을 하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예쁜 새장 속에 넣어 버린 뒤 나와 그곳에서 영원히 살 건데.

    그렇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은 루만이 데이빗 공작처럼 몹시 싫어졌다.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거야, 하츠벨루아 공작.>

    <조카는 이미 약혼을 해서 그 남자와 둘이 같이 살고…….>

    루만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분을 이기지 못한 데미안이 루만의 책상을 쾅 하고 발로 차 버렸기 때문이다.

    책상 위 쌓인 서류 더미들이 흩어지고, 꽃병이 떨어져 깨졌다.

    <그 이상 말하면 죽여 버릴 거야, 공작.>

    데미안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굶주린 맹수가 눈앞의 사냥감을 찢어 먹을 것 같은 지독한 살기가 느껴지자 루만은 몸을 흠칫 떨었다. 데미안은 책상 위의 어지럽게 흩어진 서류를 손으로 뻗어 짓이겨 버리며 그를 응시했다.

    데미안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난 분명 경고했어, 공작.>

    집무실을 초토화시키고 돌아간 데미안의 모습은 평소와 많이 달랐다. 그는 항상 생글거리며 잘 미소 짓고 언제나 여유롭고 매너가 좋은 남자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마치…… 그동안 본성을 숨기고 있었다는 확신을 줬다.

    <휴……, 여우 새끼인 줄 알았는데…….>

    메릴은 눈물을 멈추고 루만에게 물었다.

    <아빠……. 메이아가 정말 약혼을 했어? 누구랑? 언제?>

    <아빤 머리가 아프니 방으로 가 보거라. 쉬고 싶구나.>

    <지금 쉴 때가 아니잖아! 메이아가 약혼을 했는데 왜 나에게 말 안 한 거야?>

    <넌 방에 들어가서 나가지 말고 얌전히…….>

    <내 친한 지인이 벌을 받게 생겼고 나도 모르는 사이 메이아가 약혼까지 했다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메릴은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앞이 깜깜했다.

    자칫 잘못하면 토마스는 벌을 받게 될 것이고 사랑하지도 않은 남자와 국혼까지 올리게 된다.

    돈을 챙겨서 토마스와 멀리 떠나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모른 척해야 할까?

    황태자의 약혼녀로서 다른 남자와 바람피운 것을 알게 된다면 루만이라도 용서해 주지 않을 거다. 아니, 들키는 순간 카르펜 제국에서 살지 못한다.

    <나 어떡해……. 나는…… 흑…….>

    두 손에 얼굴을 묻은 메릴은 계속 어떡하느냐며 웅얼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메릴에게 울지 말라며 달래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루만은 너무 지쳐 있었다.

    *

    유디는 데미안이 찾아와 메이아를 찾으며 한바탕 루만의 집무실을 뒤집고 나갔다는 소리를 듣고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메이아는 황궁으로 갔다. 황궁에 있을 데미안이 메이아를 만나지 못해 공작저로 왜 찾아온 것일까?

    유디는 불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초조한 발걸음으로 루만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머릿속이 메이아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차며 아무 일 없길 기도했다.

    똑똑.

    유디는 노크를 하고 집무실을 열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유디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여기저기 종이들로 책상과 바닥에 어지러워진 방 안을 보자 유디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리 황자님이시더라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집사 드이임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유디에게 말했다.

    “하츠벨루아가를 우습게 보고 있습니다.”

    “정녕 데미안 황자님께서 이렇게 만들고 가셨습니까?”

    아무리 황족이라고 한들 하츠벨루아 공작은 대귀족이다.

    아무리 루만이 덜떨어진 가주라 할지라도 공작이 있는 집무실을 어질러 놓고 나가다니.

    보통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황자님께서 메이아 아가씨께서 약혼을 했다고 하시던데 알고 계십니까?”

    드이임이 유디에게 물었다.

    “약혼하신 것이 맞습니다.”

    그녀의 말에 드이임을 화들짝 놀랐다.

    “언제 약혼을…….”

    “요번 휴가를 내고 아가씨 약혼을 도와주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드이임은 데미안이 왜 난리를 쳤는지 이해되었다는 표정으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데미안 황자님께서 하신 행동은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드이임의 말에 유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 사실을 알았다는 건 데미안이 메이아에게 약혼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데미안은 확인을 위해 루만을 찾아온 것이고, 그게 사실이라는 말을 듣고 난장판으로 만든 거라 예상했다. 그렇다면 메이아는 황궁에서 데미안을 만났다는 건데…….

    “그러면 아가씨는 대체 어디로…….”

    유디는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루만을 쳐다봤다.

    굳은 표정의 그는 입을 꾹 닫은 채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유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유디는 루만에게서 시선을 떼고 소파에 앉아 있는 메릴을 쳐다봤다.

    “말해 봐!”

    눈물을 펑펑 쏟아 눈가가 잔뜩 빨개진 메릴이 유디를 보자 다급하게 말했다.

    “말하라고!”

    유디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메릴 공녀님, 상대방에게 질문을 먼저 하신 다음에 말을 해 달라고 요청하셔야 합니다.”

    메릴은 눈가를 한 번 쓱 닦으며 굉장히 짜증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 순간까지 잔소리야! 나 운 거 안 보여? 그래, 유디는 메이아밖에 모르니깐 내가 울든 뭘 하든 신경 안 쓰고 잔소리만 하지!”

    ‘그냥 네가 너무 개념 없는 건 생각 안 하느냐?’

    유디는 머릿속에서 소리쳤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속병이 날 게 분명했다.

    “메이아가 정말 약혼을 했단 말이야?”

    유디는 멀뚱멀뚱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메이아가 약혼했다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달라는 듯한 말투와 얼굴이었다.

    “아니지? 마탑에 있던 애가 갑자기 약혼이라니?”

    메이아는 말했었다. 누군가 약혼 사실을 물어보면 있는 그대로 말하라고.

    “약혼하신 거 맞습니다. 방금 전 저와 드이임 집사장님의 대화 들으셨지 않습니까.”

    유디는 무척이나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녀의 확실한 대답에 메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