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메이아는 푸링이 테오도르에게 편지를 보낼 줄만 알았지, 플로렌스령으로 바로 달려가 그를 데리고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스승님의 행동력은 정말…….”
“푸링 님의 행동에 감사할 뿐입니다. 역시 대마법사는 다르십니다.”
테오도르는 푸링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 마탑에 기부금을 더 내겠다는 의사를 강력히 내보였다.
“기부금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건 따로 있습니다. 공녀님이 다치지만 않으면 됩니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푸링의 말을 꼭 지키겠노라 굳은 다짐을 했다.
“알겠습니다.”
“공녀님, 마탑의 규칙을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푸링은 테오도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대공 각하는 모르시겠지만 마탑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은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를 지키는 일입니다.”
의지를 갖춘 마탑은 마법사를 무척 귀하게 여긴다.
“텔레포트 스크롤을 쓴 경위에 따라 쓰게 만든 사람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참고로 데미안 황자가 마탑의 마법사인 공녀님에게 위해를 가했으니 마탑에 넣었던 의뢰에 관해서는 곧 취소 통보가 될 겁니다.”
메이아는 그의 의뢰를 생각했다. 데미안은 자신을 찾아 달라며 마탑에 의뢰했다.
어차피 의뢰 내용은 카르펜 제국 성인식 전에 메이아 하츠벨루아를 찾아 달라는 것뿐이다.
따로 마법사 지명을 하지 않아 수락했다.
“기억나네요. 하지만 그는 저를 만났어요. 그렇다면 의뢰 성공 아닌가요? 스승님.”
메이아는 싱긋 웃었다.
“공녀님 말씀이 맞습니다.”
“의뢰금은 나중에 찾아갈게요.”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마탑에서는 데미안 황자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공문을 보낼 겁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푸링은 볼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우고, 베르샤는 밖으로 나가 경호를 하느라 메이아와 테오도르만이 단둘이 응접실에 남았다.
“전쟁은 어떻게 되었나요? 뭐 안 봐도 결과는 뻔하겠지만 궁금하네요.”
“록벨리온 공작이 잠도 자지 않고 행군을 했습니다…….”
시리우스 제국이 성국과의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했다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교황에 관한 문제가 처리가 안 되었습니다. 그는 음험한 흑마법으로 각종 신종 마물을 부르고 있다 합니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이 많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쓸 수 있는 텔레포트는 다 쓸 수 있도록 인장을 찍어 줬습니다.”
군대를 옮기는 텔레포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과 마정석이 든다.
“그리고 그것보다 저에게는 메이가 더 중요합니다.”
“테오…….”
약혼녀가 다쳤다는 말에 자신에게 달려온 그에게 무척 고마웠다. 사실 그가 무척 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지라 이렇게 찾아온 그가 반갑기만 했다.
“바쁠 텐데도 저에게 와 줘서 고마워요.”
“해야 할 일은 있지만 급한 일은 없어 괜찮습니다. 설사 급한 일이 있더라도 메이보다 급한 일은 제 인생에서 없습니다.”
말도 참 예쁘게 한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나에게 제일 먼저 온다는 뜻.
본인에게 있어 내가 언제나 0순위라는 마음.
그의 든든한 말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테오도르는 약간 시선을 내려 메이아의 팔목을 쳐다봤다.
그녀의 멍든 팔을 보던 테오도르의 눈빛이 사납게 일렁거렸다.
그녀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실제로 다친 모습을 보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사랑하는 그녀가 이렇게 다친 걸 보니 심장이 불에 탈 것처럼 분노가 올라왔다.
그는 메이아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며 꼭 껴안았다.
메이아는 자신을 꼭 끌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고 떨리는 그의 몸을 말없이 토닥였다.
“지켜 드려야 했는데…….”
“괜찮아요, 테오.”
“함께 카르펜으로 갔어야 하는 건데…….”
그녀가 다친 일이 꼭 자신의 탓인 것처럼 테오도르는 힘겨워했다.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만에 하나 데미안이 정신 차리고 용서를 구한들 그의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좌절과 모멸감을 주고, 철저하게 벌을 내릴 겁니다.”
메이아는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얼굴 보여 줘요.”
고개를 든 테오도르의 뺨을 매만지며 계속 괜찮다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팔에 든 멍을 보고 눈가를 붉혔다.
“멍든 팔 그만 보고 나 좀 봐요, 테오.”
테오도르의 시선이 팔에서 떨어져 메이아의 눈동자를 향했다.
“메이, 팔 치료하면 안 되겠습니까? 제발 치료하세요. 부탁입니다.”
팔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다. 이 욱신거림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다친 날 보고 마음 아파하는 그를 보고 있으니, 데미안을 잡아 죽일 생각보다는 울려고 하는 테오도르를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메이아의 갑작스러운 접촉에 테오도르는 흠칫했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그의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었다.
“메이…….”
“치료할게요. 테오가 마음 아파하는 거 보니 기분이 좋지 않네요.”
테오도르는 제 가슴에 놓인 메이아의 손을 잡아 입술로 이끌었다.
그는 그녀의 손목에 입을 맞추며 서서히 멍든 팔에도 살포시 입술을 내렸다.
그의 촉촉한 입술이 얇은 살갗을 문지르며 지나갈 때마다 온몸이 들썩거리며 부끄러워졌다.
“테오……, 여기는 공공장소예요.”
“나머지는 메이가 원하는 곳에다 하겠습니다.”
그의 낮은 속삭임에 야릇한 상상이 저절로 떠올라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테오도르는 그녀에게 점점 상체를 기울였다.
서로의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하는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입술이 그녀의 희고 고운 손바닥에 갇혔다. 그 때문에 가까워지는 상체가 더는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그녀의 두 손바닥에 갇힌 테오도르는 사슴 같은 눈망울을 보이며 손바닥을 치워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안 돼요.”
여기서 막지 않으면 뭘 하게 될지 뻔하다. 물론 싫은 건 아니지만, 장소는 가려야 하지 않는가!
“한 번만, 메이.”
그의 갈망 어린 눈빛을 마주하자 마음이 약해진다.
그의 유혹을 이겨 내기 위해 메이아는 손바닥에 더욱 힘을 줘 그의 입술을 밀어 냈다.
“장소는 가려야죠.”
“장소만 가리면 되죠?”
“때와 장소.”
“때는 못 가리겠고, 장소는 가려 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쉬운 눈빛을 애써 감추며 상체를 일으킨 그의 눈길은 집요하게 메이아를 쫓았다.
애가 달은 그의 모습을 메이아는 모르는 척했다.
“아니, 왜 ‘때’는 못 가리는 건데요?”
“낮에도, 밤에도, 저녁에도, 새벽에도 때를 가릴 필요가 있는 겁니까?”
테오도르는 정말 때를 왜 가리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메이 때문에 ‘때’를 못 가리게 되었습니다. 평생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메이아는 살짝 붉어진 뺨을 보이며 말했다.
“그 ‘때’라는 건 제가 정해도 되는 거겠죠?”
“사람은 언제나 상황에 따라 ‘때’가 달라집니다. 그러니 정해 주신 ‘때’라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의 당당한 기세와 눈빛에 메이아는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예전에는 눈만 마주쳐도 부끄럽다며 피해 다니던 수줍은 테오도르는 어디 갔지?
잔뜩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도망 다녔던 그는 어디 갔니?
“때를 못 가리다니…….”
“하지만 메이가 싫다면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싫다면 지금처럼 밀어내 주십시오. 다만, 때와 장소가 맞는다면 밀어 낸 만큼 나중에 배로 당겨 주시면 됩니다. 아니, 제가 배로 당기겠습니다.”
테오도르는 메이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카르펜 제국에는 같이 가겠습니다. 대공저에서 마탑으로 오기 전에 카르펜 제국의 황제에게 간다고 통보했습니다.”
*
데미안은 메이아가 사라지자 곧바로 하츠벨루아 공작저를 찾아왔다. 노크도 없이 무례하게 문을 열고 들어와 빨리 메이아를 내놓으라며 루만에게 소리치고 한바탕 뒤집고 갔다.
루만은 식은땀을 연신 닦으며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찬물을 세 잔이나 마셨다.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놀란 가슴을 꾹꾹 누르며 마사지했다.
“후유.”
곁을 지키던 집사 드이임은 깨진 물건들을 정리하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후유.”
“긍지 높은 하츠벨루아 공작가입니다. 아무리 황자님이시더라도 이럴 순 없습니다.”
드이임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비록, 데이빗 공작과 비교하면 모신 기간은 짧았지만 현재 하츠벨루아 공작은 루만이다.
“눈빛이 거의 미친놈이었어…….”
루만은 처음 보는 데미안의 오싹한 눈빛에서 짙은 살기를 느꼈다. 루만은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몇 시간 전, 루만은 메릴에게 익명 경매장 일을 말했다.
<네가 아는 지인이 벌을 받을 것이다. 예비 황태자비에게 사기를 친 것으로.>
<아빠! 벌을 받는다니요? 저랑 친한 지인이란 말이에요. 그냥 넘어가 주세요.>
<넘어갈 수 없다. 그리 알고 있어라.>
<싫어요!>
<이미 메이아가 황태후 마마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네가 아무리 싫다 하더라도 벌을 주기로 합의를 봤다.>
메릴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굳어 갔다.
<안 돼요. 그 사람한테 벌을 주지 마세요.>
메릴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속 지인을 벌주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저도 같이한 거란 말이에요……. 흑흑. 아빠, 제발.>
<이미 너는 지인에게 속은 걸로 이야기는 끝이 났다. 친한 사이라도 잊어라.>
메릴은 울며 매달렸고 루만은 침묵했다. 애처로운 딸의 부탁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비가 되지 않을 거예요! 메이아 보고 다시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가 되라 하세요!>
메릴이 울며불며 황태자비가 되지 않겠다고 말하자 루만은 망연자실했다.
분노라기보다는 회한이라는 감정이 배어 있는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메이아는 이미 다른 사람과…….>
그때였다.
집무실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리고 데미안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