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황태후 마마, 하츠벨루아가의 메이아 인사 올립니다.”
“오, 메이.”
응접실로 들어온 로즈는 진심으로 메이아를 반가워했다.
“어서 자리에 앉아라.”
로즈의 맡은 편에 앉은 메이아 앞에 딸기 차와 딸기로 만든 다과들이 준비되었다.
그녀는 주위에 있는 시녀들에게 말했다.
“다들 물러나거라.”
시녀들은 입을 다물고 허리를 숙이며 응접실 안을 빠져나갔다.
조용해진 응접실 안.
로즈와 메이아 단둘만 남았다.
“내가 공작에게도 말했지만 메릴 공녀의 사정이 내 마음에 무척 들어야 할 거야.”
메이아의 물건이 왜 익명이 유지되는 경매장에 나왔는지 루만이나 메릴은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입을 닫은 부녀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루만이 메이아의 물건을 제멋대로 처분한다는 생각에 항의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메릴이 메이아에게 질투해 그녀의 물건을 다 팔아 버린 것 같다 말했다. 이번 경매장 일로 황실의 일원이 될 메릴의 평판이 떨어졌다. 아주 처참하게.
이건 곧 황가의 평판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로즈는 샤르딕 화가의 그림 문제와는 별개로 황실의 평판이 떨어지는 것에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제 곧 메릴 공녀가 황태자비가 되는데 잡음이 너무 많아 고민이 깊어지고 있단다, 메이.”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황태후 마마.”
로즈는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메이아를 지그시 바라봤다.
“난 말이다. 메이, 이상한 허수아비 세워 놓고, 그 허수아비가 도둑질했다는 그런 뻔한 사정은 듣기 싫구나.”
“설마 제가 뻔한 사정을 내놓을까요.”
메이아는 밝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츠벨루아 공작저에 도둑이 들 수 있지만, 그 사실을 알리면 저희 가문의 평판이 떨어지니 도둑이 들었어도 숨길 겁니다.”
로즈는 즐거운 눈으로 메이아를 쳐다보았다.
“계속 말해 보아라.”
“이번 일은 삼촌도, 언니의 잘못도 없습니다.”
“잘못이 없다?”
“메릴 언니는 믿었던 지인에게 속았을 뿐입니다.”
메이아는 자신이 메릴에게 자선 경매일을 부탁한 사실과 현재의 일어난 사건의 경위까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로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언니의 잘못이라면 너무 사람을 믿었던 것입니다.”
말을 마친 메이아는 로즈의 안색을 살폈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변화가 없었다.
“괜찮은 사정이구나.”
사기꾼에게 당한 예비 황태자비.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사람들의 비난이 멈출 것이다.
그리고 메릴은 순식간에 사람을 너무 믿었던 순진한 사람이 되며 위로와 동정을 받는 동시에 친한 지인에게 속았지만, 지인의 잘못을 용서하고 숨기려고 한 마음을 사람들은 나쁘게만 볼 리가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썩 나쁘지 않은 ‘사정’이다.
황가의 평판을 떨어뜨리지 않고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문을 한꺼번에 잠재울 수 있는 아주 좋은 ‘사정’.
“들려오는 잡음이 잔잔한 노랫소리로 바뀌겠구나.”
표정이 없던 로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면 황태자비가 될 메릴 공녀를 꼬드긴 그 지인부터 잡아들여야 하겠구나.”
로즈는 메이아를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커다란 응접실 문을 닫고 나온 메이아는 참았던 한숨을 내뱉었다.
약간 긴장한 채로 로즈와 대화를 하다 보니 온몸의 기운이 쭉 빠졌다.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쳐다봤다. 상쾌한 바람이 메이아의 이마를 스쳐 지나갔다.
테오도르가 보고 싶다. 잘 지내고 있을까?
사랑하는 남자를 생각하던 메이아의 귓가에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
자신을 황자비로 맞이할 거라며 말하고 다니는 남자.
데미안 폰 마브로 황자가 허락하지 않은 애칭을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데미안은 큰 키 탓에 자연스레 메이아를 내려다봤다.
“하츠벨루아가의 메이아, 데미안 폰 마브로 황자님에게 인사 올립니다.”
“보고 싶었어.”
데미안은 소유욕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메이아를 진득하게 쳐다봤다. 꼭 사냥감을 앞에 두고 잡아먹을 것 같은 맹수 같아 보였다.
“데미안 황자님, 애칭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데미안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허락해 달라고 말한다면 허락해 줄 거야?”
데미안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이며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을 훑어 내려 봤다.
“아니요.”
데미안은 다시 시선을 올리고 예쁘게 눈을 휘었다.
“같이 차 한잔하자. 할 이야기가 있어.”
“초대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바쁜 일이 있어 공작저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10분만.”
“거절해도 또 부탁하실 거죠.”
“당연하지. 어차피 세 번 이상 거절은 안 할 거잖아. 아니, 못하는 건가?”
귀족은 황족의 부탁을 세 번 이상 거절할 수 없다. 만에 하나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 타당할 때는 계속 거절할 수 있으나, 지금 데미안처럼 차 한잔하자는 말을 계속 거절하는 건 황족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9분만 있겠습니다.”
메이아는 주먹을 꽉 쥐며 그를 응시했다.
“더 있어도 상관없는데.”
그는 에스코트하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항상 내 에스코트를 거절하더라.”
데미안의 응접실에서 억지로 차 한잔을 하게 된 메이아는 그를 무심히 쳐다봤다.
결혼하자고 말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차와 다과를 내어 주며 여유롭게 행동했다.
“메이가 좋아하는 딸기 차야. 마셔 봐.”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상냥한 목소리로 데미안은 말했다.
“메이, 딸기 차 맛 괜찮아? 맛있어?”
그의 눈이 더욱 짙게 휘어졌다. 찻잔을 들고 마시는 메이아를 더없이 소중하다는 듯 바라봤다.
“나쁘지 않습니다.”
그의 시선이 메이아의 입술에 머물다가 다시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쳐다봤다.
맞은편 자리에서 일어선 데미안은 메이아에게 다가가 허리를 구부려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의 팔걸이에 양손을 짚으며 눈을 맞췄다.
“황자님, 너무 가깝습니다.”
메이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매우 불편했다.
“난 더 가까워지고 싶은데, 안 돼?”
다가오는 그의 눈동자를 차갑게 응시했다.
“알았어. 그렇게 노려보지 마. 그런데 노려보는 것도 왜 이렇게 예쁘지? 환장하겠다.”
메이아를 지그시 바라보던 데미안은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다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싱긋 웃어 주었다.
“하실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직 9분의 시간이 남았어.”
데미안은 방긋방긋 웃으며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는 메이아를 응시할 뿐이었다.
만에 하나 황자비가 돼 달라는 말을 한다면 약혼했다는 걸 말할 생각이다. 물론 그는 화를 내며 테오도르를 죽이려고 들겠지만 그는 플로렌스 대공이다. 함부로 할 어떻게 할 대상이 아니다. 만에 하나 그가 그를 죽이려고 한다면 최선을 다해 지켜 낼 거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방긋방긋 웃기만 하던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혹시 황자비가 될 생각은 없어?”
“예.”
“바로 거절하면 나 꽤 상처받는데.”
“전 분명히 제 의사를 밝혔습니다.”
“내가 황자라서 그래? 파츠래리 형님처럼 황태자가 아니라서 거절하는 거야?”
“제가 데미안 황자님을 거절하는 이유는 많습니다. 꼭 황태자가 아니라서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메이아의 말에 데미안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고개를 숙였다.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유가 뭔데?”
“데미안 황자님은 항상 제 말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숙였던 데미안은 고개를 들었다.
“예전부터 제 애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황자님은 계속 절 부르실 때 애칭으로 부르셨습니다. 애칭으로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황자님은 무시하고 계속 메이라고 부르셨죠.”
어릴 때부터 그는 항상 그랬다.
<데미안 황자님, 다친 새를 치료해 주면 안 될까요?>
<네가 나보다 새에게 관심 두는 거 너무 싫어!>
<데미안 황자님, 손잡지 말아 주세요.>
<싫어. 난 메이랑 손잡을 거야.>
<손이 아파요, 데미안 황자님.>
<놓아 주지 않을 거야!>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다 지쳐 버렸다. 더는 데미안이 뭘 하든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리고 파츠래리와의 약혼이 성사되고, 그는 반쯤 미쳐 버렸다.
<형님이 죽으면 내가 황태자가 될 거고, 메이는 내 약혼녀가 되겠네?>
그가 약혼식 날 했던 말이었다.
약혼식 날 이후 데미안은 하지 않던 공부를 시작하고,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이좋은 형제는 순식간에 원수가 되었다.
“당연하지, 나의 메이.”
데미안은 자리에서 일어서 메이아가 앉은 소파 뒤로 천천히 걸어갔다.
메이아 뒤에서 걸어 다니던 그는 바로 그녀의 뒤에 섰다.
데미안은 메이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메이, 네가 나에게 애칭을 허락해 주지 않았으니까.”
“애칭은 가족 아니면 약혼자 혹은 친한 동성 내지는 결혼할 사람에게만 허락하는 겁니다. 그때 당시 저는 파츠래리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였으니 데미안 황자님에게 애칭을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메이아는 등 뒤에 느껴지는 위화감에 더욱 차갑게 말했다.
“지금은?”
“황자비가 될 생각이 없으니 당연히 애칭은 허락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결혼하자, 메이.”
“전 분명히 제 의사를 밝혔습니다, 데미안 폰 마브로 황자님.”
더는 그와의 대화가 싫어 메이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선 그녀의 팔을 데미안이 강하게 붙잡았다.
“앉아, 메이아 하츠벨루아.”
“약속된 9분이 다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장 제 몸에서 손 떼 주십시오!”
“난 너만 보고 있는데, 메이는 날 안 보고 시계를 본 거야?”
팔을 잡고 있던 데미안의 엄지손가락이 좌우로 움직였다. 메이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쾌함으로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