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삼촌, 몸은 괜찮으신 거죠?”
침대에서 끙끙거리던 루만은 상체를 일으켰다.
메이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에 물을 따라 루만에게 건넸다.
루만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한숨을 쉬었다.
“메이아, 넌 알고 있었던 게냐?”
“무엇을요?”
“시리우스 제국이 성국과 전쟁을 선포한 이유 말이다.”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물어보지 않고 섣부르게 움직인 사람이 잘못이 아닌가!
메이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만 갸웃거렸다.
“전쟁이 일어날 것만 알았지, 전쟁의 원인은 듣지 못했어요.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그나저나 성국이 저지른 짓이 너무 끔찍한 일이라 찜찜해서 저도 아침에 물약과 아티팩트를 모두 버렸어요.”
“그렇구나.”
루만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메이아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삼촌, 무슨 일 있으셨던 거예요?”
“아니다, 아무 일도.”
루만은 결국 입을 닫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난 머리가 아파 쉬어야 되겠구나.”
“삼촌, 지금 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메이아의 심각한 눈빛에 루만은 무슨 할 이야기 있느냐 되물었다.
“메릴 언니는 요번 경매장 일을 실수라고 말하고 있어요.”
“실수라면 실수지. 넌 왜 메릴한테 그런 걸 부탁해서 이 사달을 내느냐!”
“전 분명히 힘들 것 같으면 하지 말아 달라고 편지에 적어 놓았어요.”
가뜩이나 대출한 것도 머리가 아픈데 메릴의 일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루만의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다른 분들하고는 잘 이야기해서 오해를 풀 수 있지만, 황태후 마마는 그런 실수를 용납할 분이 아니라는 거 삼촌이 더 잘 알고 계시죠?”
루만의 속마음이 편치 않았다. 얼마 전 황태후 로즈에게 불려갔던 일이 생각났다.
<메릴이 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선 경매에 물건을 출품해 본 경험이 없어서. 하하하.>
<하츠벨루아 공작.>
<예, 황태후 마마.>
<사람을 죽여 놓고 실수였습니다. 전 이 말이 가장 웃기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수라는 단어를 아주 혐오합니다.>
<황태후 마마, 메릴에게 분명 무슨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공작이 말하는 그 사정이라는 게 제 마음에 들어야 할 것입니다.>
<…….>
<공작저에서 일을 그만둔 하녀를 내가 데리고 있습니다. 그 하녀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더군요.>
<무슨 이야길.>
<제가 말하는 뜻을 못 알아듣는 겁니까? 그러면 직설적으로 말하죠. 메이의 물건을 훔친 하녀가 있다든지 그런 어설픈 사정 따위는 만들지 말라는 제 경고입니다.>
루만은 아직도 황태후 로즈와 대화한 것만 떠올려도 몸이 저절로 떨렸다.
“황태후 마마는 다 알고 계실 거예요. 그리고 실수라는 단어를 가장 혐오하시죠.”
“후유.”
메릴하고 싸운 영애들과 귀부인들 때문에 인맥이 잘려 나가 현재 상황도 좋지 않았다.
만에 하나 황태후 로즈의 눈 밖에 나서 메릴이 황태자비 되지 못한다면 하던 사업들이 더욱 휘청거릴 것이 분명하다.
“언니가 잘못했다고 빌어도 사람들은 동생 물건을 마음대로 처분했다며 오히려 더 욕을 할 거예요.”
“그래서 내가 너에게 부탁하는 거란다. 메이아 네가 말만 잘한다면 황태후 마마께서 메릴을 봐주실 거 아니냐.”
“익명으로 운영되는 경매장은 인맥이 없다면 참여할 수가 없는 곳이에요. 삼촌, 그러니 황태후 마마는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래도 황태자비가 될 메릴인데 봐주시지 않을까?”
“아니요. 절대 안 봐주실 거예요. 황태후 마마가 어떤 분이신지 겪어 보셔서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분은 실수했으니 봐 달라고 봐주시는 분은 절대 아니라는 거.”
“이를 어쩌면 좋겠냐. 잘못했다고 빌어도 손가락질받고, 실수라고 해도 손가락질받고! 답이 없다! 정말 답이 없어.”
루만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푹 쉬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메이아의 말에 한숨만 쉬던 루만은 귀를 쫑긋했다.
“방법이 있다고?”
동생의 물건을 훔쳐 판 걸로 오해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
루만은 자신의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메이아를 쳐다봤다.
“정말이냐?”
또 한 번 확인하듯 묻는 루만의 표정은 무척 초조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메이아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일이 떠올랐다.
<부모님 시신을 찾아서 장례를 치르게 해 주세요!>
<땅의 정령들도 찾지 못한 시신을 어떻게 찾는다고! 그냥 받아들이거라!>
<헬레나! 제발 시신을 찾아 줘. 한 분만이라도 좋으니까!>
산사태가 부모님이 탄 마차를 덮치고, 마차는 깊은 골짜기로 떨어졌다.
땅의 정령사인 정원사 헬레나는 골짜기로 떨어져 물에 휩쓸려 간 거라면 땅의 정령들도 수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제 땅의 정령들은 물속을 살펴볼 수 없습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원망했다. 나는 왜 정령사가 아니고, 마법사인 건가.
하루에도 몇 번씩 공작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사들을 보며 부모님의 시신을 찾았는지 초조하게 물었다. 하지만 끝내 부모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메이아, 애타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게 초조해한다고 죽은 형님네 부부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메이아는 부모님의 시신을 찾기 전까지 장례를 미루고 싶다 말했지만 끝내 삼촌은 들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시신 없는 장례를 치르고 삼촌은 하츠벨루아 공작이 되었다.
부모님이 살아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그때의 기다림이야말로 자신의 전부였다.
그렇지만 결국, 그 전부를 끝까지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나무의 열매가 달콤한 이유는 기다림이라 하지만 자신에게 있어 그 기다림은 달콤함보다는 쓰디쓴 처지만 알려 주었다.
나의 소중한 전부가 사라졌는데도 태양은 뜨고 지며 달빛은 창가를 비추고, 비는 내린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세상을 맞이하며 시간이 지나 썩어 버린 열매를 끌어안고 ‘넌 한때 굉장히 달콤한 열매였어’라며 위로한다.
기다려도 썩은 열매가 달콤한 열매로 다시 돌아갈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썩은 열매를 껴안으며 과거를 회상한다.
고작 메릴이 저지른 잘못을 감싸기 위해 초조해하며 해답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루만이 안타깝다기보다는 원망스러웠다.
루만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기 시작할 때 메이아는 마침내 입을 열어 정리된 머릿속 내용들을 말했다.
“메릴 언니는 돈에 눈이 먼 지인에게 속았던 거예요.”
“……!”
“메릴 언니는 자선 경매에 물건을 출품하는 걸 도와주겠다는 지인의 말을 믿고 제 물건을 맡긴 거죠. 하지만 돈에 눈이 먼 지인은 메이아 공녀가 카르펜 제국에 없으니 익명 운영의 경매장에 출품해도 모를 거란 생각을 했겠죠. 물론 메릴 언니는 자선 경매에 물건이 나간 줄 알았던 거고요.”
루만은 느슨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해답이었다.
“믿었던 지인에게 속은 메릴 언니에게 그 누가 손가락질을 할까요?”
메릴이 사기꾼에게 속았다는 걸 로즈를 비롯해 사람들이 안다면 비난이 아니라 동정할 것이다.
“하하하!”
루만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네 말이 맞다. 메이아, 착하고 순진한 내 딸이 속은 거야! 몹쓸 사기꾼들한테!”
기분 좋게 웃던 루만은 웃음을 멈추고 메이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넌 정말 데이빗 형님을 빼닮았어.”
루만은 무척 아쉬운 눈빛을 보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타국으로 시집가는 게 아쉽구나. 결혼하지 않고 오랫동안 공작저에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건 아무래도 힘들겠지?”
공작저에 있으면서 자신들을 위해 뒤치다꺼리하라는 걸 돌려 말하는 루만에게 메이아는 웃어 줄 뿐이었다.
“사기꾼으로 몰린 사람은 예비 황태자비를 속였다는 이유만으로 벌을 받게 될 거예요.”
“뭐, 적당한 허수아비를 한 명 세워야 되겠구나.”
만족스러운 답을 얻은 루만에게 메이아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언니를 꼬드겨서 익명 운영 경매장에 참가하게 한 것이 맞으니,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에요, 삼촌.”
이번 일을 대충 넘어가려는 그에게 메이아는 실망스럽고 답답했다.
허수아비를 세운다는 그의 발언은 마치 텁텁한 고구마를 물 없이 계속 먹으라는 것 같았다.
루만은 메릴이 왜 그런 익명 운영의 경매장을 이용하게 되었는지 본질적인 원인을 파악하지 않은 채 그저 시끄러운 구설수를 잠재울 수 있다는 것만 좋아했다.
“적당한 허수아비로 이 일을 넘어간다 하더라도 메릴 언니를 꼬드긴 사람이 또 언니를 꼬드기면 그때는 어쩌죠?”
루만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구나.”
메릴를 꼬드긴 지인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또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메이아의 말에 루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적당한 허수아비를 세우는 게 아니라 꼬드긴 사람을 잡아내는 게 맞겠구나.”
메이아는 엷은 미소를 띤 화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에게는 삼촌이 말씀해 주세요. 저는 황태후 마마에게 잘 전달하겠습니다.”
“벌이 무거울수록 좋겠구나. 두 번 다시 메릴 곁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물론이죠.”
예비 황태자비인 메릴을 속여 벌을 받을 사람은 토마스 쿠룬달스 백작 영식으로 정해져 있다.
이미 그렇게 정해 놓았다. 그는 벌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그러니 이젠 메릴은 선택하면 된다.
사랑하는 토마스를 감싸 주기 위해 진실을 밝힐까?
아니면 황태후 로즈와 사람들 눈치를 보며 토마스를 외면하고 사랑하는 남자를 사기꾼이라 몰아갈까?
사랑을 선택한다면 공녀로서 그리고 황태자비로서의 삶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사랑을 외면하면 사람들에게 동정받고 위로받으며 황태자비가 될 것이다.
비난만 받던 사람에게 위로와 동정은 굉장히 달콤할 텐데.
루만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나온 메이아는 황태후 로즈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빠르게 답장을 받아 황궁으로 찾아갔다. 황궁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메이아를 발견하자 크게 반가워했다.
“공녀님, 아예 돌아오신 겁니까?”
그저 미소를 보이며 로즈와의 약속 때문에 빨리 가 봐야 된다며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황궁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메이아는 곧장 로즈를 만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