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메릴은 오래간만에 토마스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공작저로 돌아갈 시간이 되니 침울해졌다.
“오늘 메이아가 오는 날이에요. 어쩌죠? 토마스.”
“괜찮습니다. 경매장만 다르게 했을 뿐 기부한 것이 거짓은 아니니. 그것보다 사업 투자금에 관련되어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메릴.”
“벌써…… 돈을 다 쓰신 거예요?”
토마스는 메릴의 말에 터지는 실소를 감추기 위해 입가에 힘줬다.
멍청이가 따로 없다. 사업을 하다 보면 돈을 계속 쓰게 되는 법인데 벌써 돈을 다 썼냐고 물어보는 모습에 정이 확 떨어진다.
공녀라는 타이틀 이외 별 볼 일 없는 계집애다.
“사업을 하다 보면 계속 돈이 필요합니다. 플로렌스 대공령으로 가는 배 두 척이 태풍에 침몰당하여 많은 적자를 만들었습니다.”
메릴은 메이아의 물건을 빼돌려 토마스에게 맡겼다.
경매 일을 도와준 일은 너무 고맙지만, 사업하는 데 이렇게 돈이 많이 들어갈 줄은 몰랐다.
“나쁜 태풍.”
어린애처럼 뾰로통해져서 말하는 메릴을 토마스는 사랑스럽다는 듯 껴안으며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요번에 만든 배는 태풍이 와도 끄떡없습니다.”
“왜요?”
“마법 아티팩트를 구매했습니다. 만약에 태풍을 만나 배가 부서져도 아티팩트로 인해 물건들은 상하지 않고 출발한 지점으로 텔레포트 되도록 해 놓았습니다. 적어도 배는 망가지겠지만 수출하고 수입하는 물건들만 무사하다면 앞으로의 적자는 없을 겁니다. 요번 태풍은 워낙 특수하게 일어난 자연재해로, 저도 처음 겪은 일입니다.”
“후유.”
한숨 쉬는 메릴을 보며 토마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면 우리 계약 없던 일로 하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돈 때문에 인상 쓰는 메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제 여자가 항상 웃었으면 하는데 사업과 돈 이야기가 나오면 인상을 쓰니 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십시오.”
토마스는 침울하고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비 내리는 날 버림받은 새끼 고양이처럼 파들파들 떨었다.
“아니에요! 토마스. 그저 저는, 어떻게 하면 토마스에게 도움이 될까 생각하는 거밖에 없어요. 지금 메이아가 돌아와서 물건에 더 손댈 수도 없고.”
메릴이 훌쩍이기 시작하자 토마스는 그녀를 더욱 꽉 껴안으며 절절한 자신의 마음을 토해 냈다.
“괜찮습니다, 메릴. 그냥 제 곁에만 있어 주시겠습니까?”
사랑에 빠진 어리석은 여자.
“저는 메릴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어리석으니 사랑에 빠진 거겠지.
“사랑합니다. 떨어지기 너무 싫습니다, 메릴.”
“저도요. 떨어지기 싫어요, 토마스.”
뭐, 메릴이 결혼하면 황태자비 아니, 황후의 정부가 되는 것이고, 결혼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하츠벨루아 공작이 될 뿐이다. 여러모로 나쁜 패는 아니지만, 토마스는 메이아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차라리 메이아처럼 메릴이 은발이라면 상상이라도 하겠는데.
토마스는 자신에게 안겨 오는 메릴을 저 멀리 밀어 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니까.
“메릴…….”
토마스는 메릴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를 머리를 쓰다듬었다.
메릴의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공작저로 돌아가면 만나야 할 메이아 생각에 짜증이 났다. 분명 만나자마자 경매장 일로 이러쿵저러쿵 잔소리할 게 눈에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토마스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메이아의 잔소리를 참아야 한다. 아니, 견뎌 내야 한다.
‘좋게 생각하자, 메릴 하츠벨루아.’
생각할수록 과거의 일이 후회되었다. 조금만 더 신중하게 계산하고 움직일걸!
하지만 그때는 황태자의 약혼녀가 되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다.
“짜증 나!”
파츠래리와의 사랑을 기대한 만큼 실망감은 두 배가 되었다. 생각보다 그와 짜릿한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무척이나 계획적이고 재미없는 남자였다.
토마스를 만나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메이아와 파츠래리를 다시 이어 놓아야 한다. 메이아의 결혼서가 신경 쓰이지만, 메이아와 파츠래리가 당장은 결혼을 올릴 수 없는 것뿐이다.
“둘을 기필코 연결시켜야 해.”
메릴은 불안한 듯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공작저에 돌아오자마자 짜증이 바짝 오른 메릴은 급기야 방으로 하녀를 불러 이유 없이 물건을 던지며 화풀이했다. 가학적으로 남에게 폭력과 폭언을 할 때면 특별한 기분이 느껴져 메릴의 속이 조금이나마 풀린다.
“재수 없어.”
“흐읍.”
“짜증 나.”
“흐윽.”
“너 같은 것들은 기어 다녀야 해, 바퀴벌레처럼. 밟혀 죽더라도.”
아무리 모진 언행을 하더라도 저들은 절대 자신에게 대들 수 없다.
그저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다.
“생긴 게 음침해서 마음에 안 들어!”
“죄, 죄송합니다.”
하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빌었다.
“뭐가 죄송한데? 죄송할 짓을 한 거 아는 거야?”
솔직히 하녀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눈앞에 있는 분은 하츠벨루아 공녀다.
자신이 이대로 소리소문없이 살해당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 귀족이다.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바짝 엎드리고 빌어야 한다.
“제가 음침해서 죄송합니다.”
“내가 너 음침해서 마음에 안 든다고 했지! 누가 죄송하다고 빌라고 했어?”
“죄, 죄송합니다.”
“짜증 나!”
메릴은 테이블 위 꽃병을 하녀에게 집어 던졌다.
다행히 벽에 부딪친 꽃병은 쨍그랑 소리와 함께 깨졌다.
깨진 꽃병 파편이 날아와 하녀의 손을 날카롭게 찔렀다.
“악!”
“감히 하녀 주제에 공녀 앞에서 소리를 질러?”
메릴은 하녀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하늘 높이 들었다.
“흑흑, 잘못했습니다. 공녀님.”
그 순간이었다.
쾅!
강한 충격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메이아가 메릴의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갑자기 나타난 메이아 때문에 메릴은 하녀의 뺨으로 내려가던 오른손을 멈췄다.
“메릴 언니, 오래간만이야.”
“메이아, 노크도 없이 왜 들어와!”
“노크했는데 못 들었어?”
메이아는 주저앉아 피를 흘리며 덜덜 떠는 하녀를 쳐다봤다. 메릴 또한 시선이 하녀에게로 떨어졌다.
“계속 노크했는데 안 들렸나 봐.”
“내가 하녀 교육하느라 못 들었나 봐.”
메이아는 메릴의 방문에 노크 따위 하진 않았다.
“언니 방 안에서 큰 소리가 나서 부득이하게 열고 들어온 거야.”
메릴은 아파서 우는 하녀를 노려보았다.
메이아의 뒤를 따르던 유디는 피 흘리는 하녀를 보며 깜짝 놀랐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입니까?”
“유디, 당장 이 아이를 데리고 나가 치료해.”
“알겠습니다.”
메이아는 저절로 찌푸려지려는 미간에 힘을 줬다. 아그니타도 이렇게 때렸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언니, 하녀의 체벌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야. 잘못이 있다면 시녀장에게 말하면 되잖아.”
“시녀장이 하든, 내가 하든 뭐가 문제인데?”
“당연히 문제가 있지. 언니는 이젠 황태자비가 될 테니까. 직접 본인 손을 사용해서 체벌하는 건 옳지 않아.”
아랫사람이 잘못했다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묻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경고, 둘째는 감봉, 셋째는 해고다. 굳이 체벌을 내려야 한다면 아랫사람에게 직접 시킨다.
“이제라도 조심해.”
아까 메이아는 메릴이 왔다는 이야기에 직접 방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
하녀의 울음소리와 잘못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비명에 메이아는 노크도 하지 않고 순간 문을 벌컥 열어 버렸다.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하녀에게 손찌검하려는 메릴을 봤다.
어떠한 잘못을 하더라도 직접적인 체벌은 귀족으로서 옳지 않다.
메릴이 한 짓은 그저 화풀이다.
“네가 뭘 말하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그래서 마음대로 내 물건을 타인에게 맡긴 거야?”
“…….”
“내가 분명히 편지에다가 적었잖아. 내 이름으로 자선 경매에 내놓아야 한다고. 그런데 타인에게 내 물건을 경매를 맡겼어? 아무리 언니라도 동생의 물건을 마음대로 할 권리는 없어.”
“실수였어.”
“실수 참 좋은 말이야. 모든 잘못이 ‘실수’라는 말로 포장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지름길 같은 거니까.”
“실수한 거로 내가 너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거니? 웃긴다. 사촌 언니인데 그 정도 실수도 못 봐줘?”
메이아는 한 발자국씩 메릴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언니가 한 짓은 절대 실수가 될 수 없어. 실수는 부주의로 인해서 일어나는 잘못이야. 내 말을 무시하고 타인에게 내 물건을 맡겼잖아. 그게 과연 실수인 거야? 알고 한 짓이지. 언니는 내게 실수였다는 말이 아닌 ‘미안해. 내가 돈이 필요해서 그랬어’ 이렇게 말해야지 내가…….”
“…….”
“언니를 봐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메이아는 절대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표정의 변화도 없고, 기분 나쁜 말투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차분했고, 말하는 투도 담담했다. 악의를 도저히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메릴은 메이아가 너무 싫었다. 아니, 불편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소리라도 친다면 인간미가 느껴졌을 거다.
“내가 조금 실수한 거로 너무한 거 아니야?”
“조금 실수? 그렇다면 왜 삼촌이 나에게 수습해 달라고 하루가 멀다고 편지를 보내며 사정했을까?”
“그건 나도 모르지.”
“언니가 판 내 물건 중에 황태후 마마가 선물한 물건도 있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카르펜 제국에 없었어. 그런데 내 물건이 소리 소문 없이 비밀 경매장에 나왔어. 나에게 선물을 준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아, 누군가 메이아 공녀의 물건을 몰래 빼돌려서 익명으로 경매장에 판매했나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모두 화를 내고 있어. 그리고 그 화내는 이들 중 한 사람이 바로 황태후 마마라는 거야.”
메릴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메이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었지만 수긍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니가 실수라고 말했으니 나는 황태후 마마를 만나 이렇게 말할 거야. 분명 제 이름으로 자선 경매 내놓아 달라 말했지만, 언니가 실수로 타인에게 제 물건을 맡겼고 그게 비밀 경매장에 갔네요. 어쩌죠?”
메이아가 조곤조곤 말할수록 메릴은 일그러진 얼굴로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언니, 실수가 중요한 게 아니야 황태후 마마의 기분이 중요한 거야.”
실수라는 가벼운 포장지로 잘못을 포장해 말할수록 상대방의 화를 키운다.
실수를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사과하며 자기 스스로를 반성한다.
모르고 저지른 실수를 반성하느냐.
알고도 저지른 잘못을 실수로 말하느냐.
그 선택에 따라 사람은 성장한다.
“메릴 언니, 나에게 실수라고 말한 지금 이 순간처럼 나중에라도 또 실수라고 말하지 말아 줘.”
메릴은 끝까지 실수였다며 모르는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