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유디는 공작저로 돌아온 메이아를 보자마자 눈물의 재회를 했다.
메이아를 마중을 나왔던 사용인들 또한 눈가를 붉혔다.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소중한 아가씨였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오래간만에 온 공작저는 변함이 없었다.
메이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마중 나온 그들에게 물었다.
“삼촌과 언니는?”
“공작님께서는 곧 들어오신다 하셨습니다. 메릴 아가씨는 친구분을 만나신다고 나가셨습니다.”
“메릴 언니가 언제 들어올지는 모르는 거지?”
“예, 요즘 메릴 아가씨는 아침에 나가셔서 저녁 늦게 오실 때가 많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메이아는 자신의 방과 연결된 개인 응접실 겸 집무실로 향했다.
“쥬안.”
이내 그림자가 일렁거리며 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메이아가 오른손을 내밀자 쥬안은 자신의 품에 있었던 몇 장의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쥬안, 내가 말한 것은?”
“수도 내 모든 신성력 아티팩트와 물약을 구매했습니다.”
“수고했어. 영수증은 플로렌스 대공가로.”
“알겠습니다.”
건네받은 보고서를 읽기 시작한 메이아는 미간을 점점 찌푸렸다.
다 읽지 못한 보고서를 내려놓은 메이아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쿠룬달스 백작 영식이라……. 쥬안, 혹시 메릴 언니가 오늘도 이 사람을 만나고 있는 거니?”
“그렇습니다.”
쿠룬달스 백작 영식이라면 파란 머리카락의 예쁘장한 미모로 여자들에게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미혼 남성이다.
집안에서 하는 사업은 주로 무역업.
그런데 이 사내와 메릴이 남녀 사이일지 모른다는 내용에 메이아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 갔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쥬안, 언니와 쿠룬달스 백작 영식의 사이는 어느 정도야?”
“……깊은 사이십니다.”
“어느 정도로? 아니, 바꿔 물을게. 밤을 같이 보냈어?”
쥬안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원치 않았던 답변을 들은 메이아는 한숨을 쉬었다.
파츠래리는 자신에게 매달리고, 메릴은 바람을 피우고 있다니!
둘의 사이가 어떤지 예상되었다. 이제 서로가 싫은 거지.
메릴은 약혼녀 자리를 빼앗아 놓고 이제 와서 싫다?
그리고 파츠래리는 약혼녀가 누가 되든 상관없다며 10년의 관계를 남의 입을 통해 정리해 놓고서는 이제 와서 나를 되찾겠다?
웃음이 나왔다. 떼쓰는 아이처럼 굴고 있는 모습들에.
한 제국을 이끌어야 갈 두 사람이 너무 무책임한 행동을 하고 있어서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가지고 있는 지위의 무게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짓이다.
지금은 지위의 무게가 감당이 되니까.
손쉽게 들 수 있으니까.
별로 힘들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 무게를 정말 느낀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짓이다.
지위의 무게를 잊은 귀족이나 황족이 빠르게 추락한다는 걸 정녕 모르는 것인가!
속으로 한숨을 삼킨 메이아는 다시 서류를 들고 읽어 가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와.”
문을 열고 메이드 시나가 들어와 메이아에게 보고했다.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메이아는 마침내 귀가한 공작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삼촌, 잘 지내셨죠?”
“그래, 너도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나. 대공 각하는 잘 계시고?”
루만의 질문에 메이아는 일부러 시큰둥하게 답했다.
“잘 못 지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원래는 대공 각하도 함께 공작저로 오려고 하셨는데 못 왔어요…….”
“왜?”
테오도르는 같이 하츠벨루아 공작저에 간다는 사실에 즐거워했다. 하지만…… 시리우스 제국이 곧 성국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그리고 시리우스 제국의 소드 마스터 록벨리온 공작이 많은 기사와 병사를 성국 인근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플로렌스 대공령에서만 쓸 수 있는 대규모의 텔레포트가 필요하다 했다. 록벨리온 공작의 부탁에 테오도르는 결국 도와주기로 승낙했다.
<메이, 전쟁은 금방 끝나니…… 마무리되자마자 바로 카르펜 제국으로 가겠습니다.>
메이아는 미묘한 미소를 짓다 금세 갈무리했다.
“곧 시리우스 제국이 곧 성국에 전쟁을 선포한다네요……. 그래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하셨어요.”
찻잔을 들고 마시려던 루만은 메이아의 말에 얼른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시리우스 제국이 미친 거지? 성국에게 뭘 해?”
“전쟁이요.”
“대체 왜.”
메이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대체 왜겠어요. 전쟁할 만하니 하는 거죠. 자세한 사정은 몰라요.”
“메이아, 넌 웃음이 나오는 게냐? 자칫 잘못하면 신벌을 받을지도 몰라!”
루만은 메이아가 전해 준 전쟁 소식에 얼이 빠졌다.
성국은 말 그대로 신이 다스리는 제국이다. 영토가 넓은 건 아니지만 대대로 신의 대리자인 교황을 선두로 신관, 성녀, 성기사를 배출하며 성국을 지켰다.
신이 다스리는 성국인 만큼 사람들은 성국과 전쟁이 나면 신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그 어떤 제국도 이곳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다. 성국에서 파는 신성력이 담긴 물약은 사람을 치료하고, 아티팩트로 병의 진단이나 병의 진행을 막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전쟁 선포라니?
물론 성국을 가진 제국이라면 더 크게 부흥할 것은 자명하지만 신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그 누구도 건들지 않은 미지의 성역이다.
그런데 시리우스 제국이 지금 뭘 한다고?
“정말 전쟁을 한다는 거냐?”
“네.”
메이아는 시종일관 무심한 얼굴로 대했다.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이거 정말 큰일이구나. 그렇다면 곧 전쟁이 나면 성국의 물약과 아티팩트들이 부족하겠구나.”
루만은 탐욕스러운 눈빛을 빛내며 입술을 들썩거렸다. 성국의 신성 물약과 아티팩트는 굉장히 고가다.
“메이아 네가 이렇게 공작저에 와서 삼촌이 너무 든든하구나.”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모르지 않으신 거죠?”
“암, 모르지 않지.”
메릴이 친 사고를 메이아가 수습하러 왔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전쟁 이야기를 들으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곧 비싸질 게 분명한 성국의 물약과 아티팩트를 전쟁이 터지기 전에 확보해 놔야 한다.
전쟁이 벌어져서 그걸 다시 비싸게 되팔 수 있다면.
루만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메이아, 내가 지금 바쁜 일이 있으니 있다가 저녁 먹으면서 메릴과 함께 마저 이야기하자꾸나.”
메이아는 루만의 뻔한 생각에 웃음을 삼켰다.
테오도르는 전쟁 선포의 이유가 성국이 흑마법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사실만 알려지게 되더라도 사람들은 찝찝해서 성국이 그동안 팔았던 아티팩트나 물약을 구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세요.”
상관없다. 루만이나 메릴이 사고를 치면 칠수록 자신에게 더 이득이다.
“미안하구나! 메이아, 나갔다가 와서 마저 이야기하자.”
눈앞의 독버섯을 먹음직스럽게 쳐다보는 루만의 욕심 깃든 눈빛을 메이아는 모른 척했다.
“메이아,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난다고 이야기하지 마라.”
“어차피 모두 다 알게 될 텐데요.”
“그러니까 굳이 그런 혼란스러운 내용을 미리 알리지 말라는 거다.”
자신이 물약이랑 아티팩트를 모조리 다 사들이기 전까지는.
“알겠어요. 이따가 저녁에 봬요.”
“공식 전쟁 선포는 언제 한다고 그러더냐?”
“이번 주 내로 선포한다는 걸 들었어요.”
“그래, 알겠다.”
루만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을 나서는 걸 본 메이아는 방으로 돌아와 쥬안을 불렀다.
“쥬안.”
그림자가 일렁이며 쥬안이 나타났다.
“예, 아가씨.”
“이젠 가지고 있는 물약과 아티팩트는 모두 팔도록 해.”
메이아는 즐거운 마음을 뒤로 숨긴 채 미소 지었다.
출발하기 전부터 메이아는 쥬안에게 명령을 내렸다. 카르펜 제국 수도 내에 있는, 성국의 신성력이 담긴 아티팩트와 물약을 모조리 구매하라고.
“삼촌이 비싼 가격에 구매해 줄 거야.”
“비싼 가격에 구매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메이아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면 메릴 언니를 기다려 볼까.”
분명 루만은 자신과 친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살짝 말해 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아티팩트와 물약을 함께 구매하겠지.
단 한 번만이라도 나에게 약혼식은 잘 치렀는지 물어봐 주었으면, 메릴을 대신해 미안한 모습이라도 보여 주었더라면.
“먼저 이야기해 줬을 텐데. 너무 안타깝네.”
“무엇을 말입니까?”
메이아의 혼잣말에 쥬안은 궁금하다는 듯 조심스레 물었다.
“진실은 돈으로 책정할 수 없지만, 돈으로 정보는 살 수 있는데……. 삼촌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워.”
시리우스 제국이 성국에 전쟁을 선포한 이유를 그저 돈벌이로 연결해 단순하게 생각한 루만.
눈앞의 이득을 향해 달려가는 루만의 욕심 가득한 얼굴에 메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쿠룬달스 영식은 어떤 사람이야?”
“그렇지 않아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쥬안은 자신의 마법 이공간에서 제법 두꺼운 서류 더미를 꺼내 메이아에게 건넸다.
서류를 건네받아 읽던 메이아는 코웃음 쳤다.
“대단하네, 쿠룬달스 영식.”
도박, 술, 코르티잔과 난잡한 파티.
그리고 입에 오르기도 부끄러운 갑질 행태.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앞에서는 조신하고 부끄럼 많은 사람인 척, 온갖 얌전한 사람인 ‘척’했다.
“그뿐만 아니라 요즘 어디서 돈이 많이 생겼는지 평소보다 많은 도박을 즐기고 돈 나올 구멍은 많다며 떠들고 다닙니다.”
술, 폭력, 담배, 여자. 이 모든 걸 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메릴 언니.
“쥬안.”
“예.”
“언니의 사랑을 응원해 줘야 할까? 아니면 그 사랑을 찢어 놓을까? 선택권을 줄까? 사랑을 포기할지, 황태자비 지위를 포기할지. 언니에게 있어 사랑의 무게가 무거울까? 아니면 황태자비 지위가 더 무거울까?”
사랑이 가벼울수록 하늘로 날아가 사라지겠지.
하지만 그건 온전히 메릴의 선택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후회 또한 메릴이 될 것이다.
메이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역시 선택권을 줘야 하겠지? 그래도 사촌 언니인데.”
“너무 너그러우십니다, 아가씨.”
메릴이 사랑을 선택하든, 황태자비가 될 것을 선택하든.
“무엇을 선택하든 응원해 줄 거야.”
루만은 저녁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메이아는 감흥 없는 어투로 말했다.
“내일 2차로 물량을 풀고 더 비싸게 팔아. 그래도 좋다고 구매하실 거야.”
지금 루만은 꽤 바쁠 거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리우스 제국의 전쟁 선포에 급하게 물약과 아티팩트를 마구잡이로 쓸어 담고 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똑똑.
“메릴 공녀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