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112화 (112/163)
  • 112화

    약혼식 이후 알게 된 영애들로부터 티 파티 초대를 희망한다는 편지들이 매일 도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아는 당분간 하츠벨루아 공작저로 돌아가 있어야 한다.

    [곧 제 성인식 이후…….]

    편지 답장을 쓰는데 이상하게 목이 메고, 가슴도 따끔거리고 감정 제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딱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이제 곧 테오도르와 떨어져야 한다.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이 탁 풀려서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감정이 뜨거운 불에 녹아내리는 밀랍처럼 변한 것 같다.

    “왜 내 마음인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지…….”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마음을 제어하는 일이었는데 도저히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와 떨어지기 싫어…….”

    이게 나의 마음.

    “그렇지만 이 문제는 내가 가서 해결해야 해.”

    이건 나의 생각.

    편지지 위로 메이아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침 해가 밝아오고 그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을 때 참았던 감정들이 소나기처럼 후드득 쏟아졌다.

    눈물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그와 지내는 날이 좋았다. 떠나기 너무 싫다. 계속 테오도르 곁에 있으며 그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고, 그가 속삭이는 사랑을 받고 싶다.

    사람이 원하는 게 생기면 왜 욕심이 생기는지 깨달았다.

    어릴 때부터 배워 왔던 절제, 그리고 무감정을 유지하는 건 아무 소용없다.

    그의 앞에선 그저 얇은 달걀 껍데기가 될 뿐이다.

    달걀 안에 다 자란 병아리라도 딱딱한 제 부리로 껍데기를 깨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한 번 금이 간 껍데기 사이로 병아리가 태어나는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와 많은 걸 경험하고 성장하게 된다.

    테오도르를 알아갈수록 메이아는 달걀 껍데기를 뚫고 나온 병아리가 된 것 같았다.

    메이아는 몰랐던 감정을 알려 주는 심장에 손을 올려놓고 멍하니 편지지를 바라봤다.

    그와 떨어져 있어도 괜찮을까?

    그렇게 하루하루 그와의 중독된 밤이 지나가고 어느덧 고국으로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메이.”

    사랑하는 사람의 애칭. 오늘 그녀는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령을 떠나 고국인 카르펜으로 돌아간다.

    깊어지는 마음과 매일 넓어지는 사랑은 바다만큼 주체할 수 없으며, 바람처럼 가늠할 수 없다.

    “테오, 먼저 가 있을게요.”

    떠나는 그녀에게 웃어 줘야 한다는 걸 잘 안다.

    그는 웃었다. 너무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가장 하고 싶은 단 한마디만 담았다.

    “사랑합니다, 메이.”

    사랑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파도치는 감정이 격렬한 사랑의 감정만큼이나 이성을 먹고 파괴한다.

    하지만 웃어야 한다. 그래, 웃어 줄 수밖에 없다. 그녀는 나의 웃는 모습을 좋아하니깐.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 나의 미소여야 하니까.

    “곧 따라가겠습니다.”

    그녀가 없었을 때는 세상을 어떻게 살았을까?

    “식사 잘하시고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신 옆은 언제나 나만 있을 거야.

    “테오, 빨리 와야 해요.”

    그의 눈가가 점점 붉어지며 글썽거리는 게 보였다.

    눈물 많은 남자.

    “만나지 못하는 이별이란 기약조차 하지 않은 긴 여행이라 했어요. 나와 테오는 긴 여행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잠시 외출하는 거예요. 그리고 외출하는 절 테오가 따라오겠죠. 그러니 우리는 다시 만날 거예요.”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던 테오도르는 가만히 팔을 내밀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자 메이아는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어디든 따라갈 겁니다.”

    그는 얼굴을 그녀의 목덜미에 묻었다. 테오도르의 몸의 떨림이 느껴졌다.

    메이아의 어깨로 뜨거운 눈물이 느껴졌다.

    “안 따라와도 괜찮아요.”

    “따라갈 겁니다.”

    “안 따라오든, 못 따라오든 테오가 잘 따라오는지 제가 뒤돌아볼게요. 그리고 데리러 갈게요.”

    메이아의 작은 손이 테오도르의 등을 쓸었다.

    “사랑해요, 테오.”

    “제가 더 많이 사랑합니다.”

    “나도 테오만큼 사랑할게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숨죽이며 둘의 애절한 모습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테오도르와 메이아의 포옹은 몹시 슬프고 비장해 보였다.

    꼭 전쟁에 나가는 사람을 배웅하는 것 같았다.

    “테오, 울지 마요. 웃어요.”

    난 당신의 웃는 얼굴이 가장 좋으니까.

    테오도르는 뺨에 흐른 눈물을 훔쳤다. 천천히 메이아를 품에서 떼어 내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메이가 걱정되어서 되돌아보기 전에 금방 쫓아가겠습니다.”

    “길 잃어버리지 말고 곧장 와요.”

    테오도르는 자신의 마법 이공간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내 메이아에게 건넸다.

    “선물입니다. 지금 풀지 마시고, 공작저에 도착하시면 혼자 풀어 봐 주십시오.”

    메이아는 그가 건네는 선물을 받아 자신의 마법 이공간에 넣으며 활짝 웃었다.

    선물 상자는 부피에 비해 가벼웠다.

    “그럴게요.”

    상처받은 강아지같이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아파졌다. 안타까웠다.

    “무엇을 줄까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메이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분명 좋아할 만한 선물일 것입니다.”

    “전 선물 준비 못 했는데, 어쩌죠? 대신 카르펜 제국으로 오면 제가 좋아하는 곳에서 데이트해요.”

    머릿속에서 그와 함께 갈 곳이 떠오르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기대할게요, 메이.”

    잠시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괴로움과 다시 만나면 즐겁게 데이트할 수 있다는 설렘이 뒤섞였다.

    “다시 만나는 순간부터 절대 당신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이젠 떨어질 이유가 없다. 성인식만 치르면 그녀는 성인이다.

    이번에 카르펜을 방문하면 루만 하츠벨루아 공작에게 결혼 인장까지 받아낼 거다.

    결혼서에 인장 찍을 생각을 하니 심장이 콩콩 뛰었다.

    “정말 보내기 싫습니다.”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메이아의 귓가에 울렸다. 밤새 사랑한다며 귓가를 울리던 소리와 밤새 자신의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지나갈 때 느껴지던 부드러운 감촉이 벌써 그리워진다.

    “절대 다른 남자한테 눈길조차 주지 마시고.”

    “테오야말로.”

    메이아의 말에 테오도르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메이아 말고 다른 여자라니. 말도 안 된다.

    “전 메이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메이아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테오도르의 뺨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그녀는 흐르는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정말 눈물이 많네요.”

    “눈물이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시선이 마주치자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며 배시시 웃었다.

    메이아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두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감았다.

    “자꾸 이러면 가기 싫어지잖아요.”

    “그럼 가지 마세요.”

    그렇게 한참 메이아를 바라보던 테오도르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된다는 거 아시잖아요.”

    메이아는 그와 한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났다. 테오도르는 손을 뻗었다.

    “이젠 정말 갈게요.”

    텔레포트 하는 곳에 선 메이아는 테오도르와 베나블, 그리고 애튼과 헤만에게 손을 흔들었다.

    “메이!”

    “편지 보내요, 테오.”

    텔레포트를 타고 순식간에 메이아는 사라졌다.

    테오도르는 그녀의 잔상이 사라질 때까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쳐다봤다.

    그의 볼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려 왔다.

    베나블은 소리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 가까이 다가가 그에게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베나블.”

    “예.”

    “메릴 하츠벨루아에 대한 보고서는?”

    “준비해 놓았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수집해. 만나는 사람이 평민이든, 상인이든, 귀족이든 싹 다 알아와.”

    “예.”

    “그 밖에 파츠래리 황태자와 데미안 황자도. 루만 하츠벨루아 공작까지.”

    “예.”

    베나블은 테오도르의 차가운 눈빛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빌어먹을 벌레들 때문에 메이를 카르펜으로 보냈지만 두 번 다시 이런 감정 알고 싶지 않아.”

    떨어져야 하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의 끔찍함이 온몸을 아프게 했다.

    “곧 보고 올리겠습니다, 주인님.”

    “그녀는 소중한 플로렌스 대공비야. 그 누구도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쳐다볼 수 없도록 해야 할 거야.”

    더는 그런 벌레들이 다가올 수 없도록,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부를 수 없도록 사랑하는 그녀가 가장 높은 위치에서 벌레들을 내려다보게 할 거다.

    난 그런 그녀 옆에서 다가오는 벌레를 밟아 죽이며 그녀에게 꼬리를 흔들어 줄 거다.

    나의 여왕은 그래도 된다.

    메이아가 떠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언제나 방긋방긋 웃으며 일하던 테오도르는 사라졌다.

    웃지 않으니 인상이 날카로워졌다. 테오도르는 의자에 앉아 서류를 날카롭게 쳐다보며 말없이 인장만 찍었다. 말도 붙이기 무서울 정도로 살벌한 기운을 계속 내뿜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언뜻 보면 무표정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차가움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헤만과 애튼은 테오도르가 왜 그런지 잘 알고 있었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눈치를 보며 일했다. 메이아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다.

    원래 테오도르는 웃지 않는 사람이다. 모든 거에 관심이 없었고, 무감각한 사람이란 걸.

    메이아를 만나기 전에 웃었던가?

    아니, 웃지 않았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편하게 쉬지도 않았고 웃지 않았다.

    “저, 대공 각하.”

    “말해.”

    “저희가 오늘 일을 마무리 다 할 테니 들어가셔서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됐어.”

    테오도르는 잠시 깃펜을 잉크병에 꽂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후우…….”

    메이아를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난다. 손끝만 스쳐도 부끄러워 멀리서 메이아를 바라만 본 것만으로도 숨이 가득 차오르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했던 자신의 손을 웃으며 잡아 줬다.

    그녀가 없었을 때 어떻게 살았더라.

    테오도르는 흐트러짐도 없이 반듯하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니 빨리 일을 끝내고 그녀에게 가자.

    “젠장! 왜 하필 이럴 때 전쟁을 벌인다는 거야!”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던져 버렸다.

    갑자기 시리우스 제국에선 성국과의 전쟁이 선포되었다. 이유는 불법 흑마법 연구와 시리우스 제국의 황족 살해 의혹 때문이었다.

    그래도 신이 다스린다는 성국이 아닌가! 신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전쟁까지 벌일 필요는 없다고 편지를 보낸 그날 밤, 시리우스 제국의 록벨리온 공작은 소리 소문 없이 테오도르를 찾아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