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지금 공녀님의 애장품들이 여기저기 경매장에 돌아다닙니다! 그것도 익명으로 출품하는 비밀 경매장에요!>
<자선 경매가 아니고 익명으로 운영되는 비밀 경매장이라 했습니까?>
메이아에게 선물을 줬던 사람들이 익명 운영의 비밀 경매장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곳에선 메이아에게 선물로 줬던 한정판 물건들이 경매에 나왔기에 많은 이들이 깜짝 놀랐다.
그리고 경매장 측에 항의했다 한다.
<메이아 공녀님은 카르펜 제국에 안 계시는데 왜 그분의 물건을 경매장에서 파는 겁니까?>
<누가 감히 공녀님 물건을 훔쳐서 경매장에 파는 겁니까!>
<심지어 황태후 마마께서도 공녀님에게 선물로 준 샤르딕 화가의 작품을 경매장에서 보고 구매하셨다 합니다.>
메이아의 물건들이 경매장에 나올수록 경매장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경매장 출품자 이름을 알려 주세요!>
출품자 관련 정보는 비밀은 절대 보장이기 때문에 경매 물품의 판매자 이름을 공개할 수 없었다.
입을 닫은 경매장에 분노한 사람들은 바로 하츠벨루아 공작저로 편지를 보내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누가 감히 공녀님 물건을 경매장에 파는 겁니까! 하츠벨루아 공작저에는 언제부터 쥐새끼가 산 것입니까!>
그중에서도 마리엔느 남작 부인이 가장 분노했다 한다.
하츠벨루아 공작저는 침묵했다.
그리고 루만은 메이아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제발 돌아와서 일 수습을 해 달라는 것과 메릴이 실수한 것 같다고 작성되어 있었다.
성인식에 맞춰 가려고 했지만 클레리라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메릴이 자선 경매 부탁한 걸 깜박 잊었다면 그러려니 하려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찝찝함이 가득했다.
“이상해요. 메릴 언니는 시골에 있다 올라왔기 때문에 이런 익명 운영의 비밀 경매장에 물건을 출품한다는 건…….”
“누가 도와주지 않은 이상 출품은 어렵죠.”
경매장 가서 돈 쓰는 거라면 잘 알고 하겠지만, 거기에 출품을 한다는 건 구매와 다르다.
생각해 봐라! 과연 메릴이 ‘메이아가 경매 맡겼으니 익명성 경매장에 의뢰하자!’ 이런 생각을 하고 움직였을까?
무엇보다 자기 물건을 팔면 개인적으로 돈이 생긴다.
그런데 과연 메릴이 그렇게 돈이 필요한 상황일까?
여기까지 생각을 하다 보니 하루라도 빨리 카르펜 제국으로 가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이 이용했다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라 저도 생각합니다.”
“누군가 자선 경매가 아니라 익명 운영의 비밀 경매장을 이용하도록 유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공작저로 안 갈 수 없어요. 만에 하나 누군가 메릴 언니를 부추기고 있는 거라면 가서 싹을 잘라 내야죠.”
지금은 비록 자신의 물건들이겠지만 점점 갈수록 공작저 안의 비싼 물건들을 경매장으로 빼갈 수도 있다.
“제가 자선 경매에 내놓아 달라고 부탁한 물건들은 모두 선물 받은 것들이에요. 선물 받은 것들이 자선 경매에 나온 거라면 명예롭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들로서는 화가 나는 일이죠.”
선물 받을 자신을 생각하며 준비했을 정성 어린 선물들이 자선 경매가 아닌 곳에 경매로 나오니 그들로선 기가 차는 상황일 것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대공저 일을 마무리 짓고 같이 가는 게…….”
“아니요. 먼저 가서 해결하고 있을게요.”
메이아는 손끝을 들어 테오도르의 뺨을 쓰다듬으며 시선을 마주쳤다.
“잠깐 떨어져 있어도 슬퍼하지 마요.”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우리 집에 오면 하츠벨루아 공작저에서 가장 좋은 방에서 지내게 해 줄게요.”
“저에게 가장 좋은 방은 메이의 옆방입니다.”
그러니깐 옆방으로 줘. 곁에 있고 싶어.
테오도르는 자연스레 오른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지분거렸다.
“메이가 있는 곳이 제가 있어야 할 곳인데.”
하루라도 못 보면 심장이 찢겨 나갈 것처럼 아플 텐데 이 고통을 참을 수 있을까?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요.”
“당연한 말이라도 말하지 않는다면 당연하지 않게 됩니다. 전 계속 당연한 제 마음을 말할 겁니다.”
“내가 사랑하는 테오.”
“예.”
“저도 당연한 소리 해 봤어요.”
애간장을 살살 녹이는 그녀의 고백에 녹다 못해 심장이 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곧 카르펜 제국으로 돌아간다. 바로 따라가고 싶지만 대공가의 일 때문에 당장은 움직이기 어려웠다.
이미 약혼을 한 사이이지만, 카르펜에는 재수 없는 황태자와 집착 심한 황자가 있다.
걱정이 많이 된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겨서 그녀가 날 버리면 어떡하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떠올랐다.
견딜 수 있을까? 아니, 견딜 수 없다. 상사병에 걸려 버린 심장이 멈출지도 모른다.
메이아를 믿는다. 그녀의 사랑을 믿는다.
그렇지만 불안하고 초조하다. 믿는다면서 불안해하는 자신의 모습이 못나 보였다.
한 손으로 메이아의 턱을 감싼 테오도르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매만졌다.
이런 내 마음을 그녀가 알까? 질투에 추악하게 일그러진 이 마음을 불안하고 초조함으로 포장하려는 모습을…… 알면 실망할까? 그렇다고 그녀를 놓아 줄 수 있을까?
도톰한 분홍빛의 입술을 보던 테오도르는 바로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입술이 닿기 전 멈췄다. 깊은 소유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당신 없이 못 살아.”
테오도르의 짧은 말 한마디에 메이아는 그의 소유욕을 보았다.
메이아는 테오도르의 목에 팔을 둘렀다.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에게서만 나는 달콤한 향기는 맡아도 또 맡고 싶고, 편하고 미치도록 가지고 싶다.
평생을 그녀의 체취만 맡고 살 수 있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다.
서로의 바라보는 시선은 뜨거웠다.
“메이, 날 봐.”
당신의 체온을 더 느끼고 목소리를 듣고 온몸이 닿고 싶어.
쾌락으로 일그러진 그의 표정과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았다.
“메이, 이 순간이 영원하면 좋겠어.”
“제가 영원보다 더 행복하게 해 줄게요.”
*
참새가 짹짹거리는 소리에 메이아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에서 깬 메이아는 낯선 천장을 쳐다봤다. 천장에는 아기 천사들이 날아다니며 나팔을 부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대공비 방으로 옮겼지.’
메이아는 눈을 깜박였다.
“테오, 아그니타가 오기 전에 나가셔야 해요.”
“여기 있고 싶습니다.”
어린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테오.”
너무 좋아 미칠 것 같은데, 마음이 안달이 나서 죽겠는데 더는 태워질 애간장조차 남지 않았는데!
제발 쫓아내지 말아 줘.
그냥 아그니타에게 두들겨 맞아도 좋으니까 여기 있게 해 주면 행복할 것 같다.
“전 아그니타가 플로렌스 대공 시해 혐의로 잡혀가는 꼴 못 봐요.”
테오도르는 아름다운 조각상을 감상하듯 메이아를 지그시 바라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냥 이대로 마주 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면서 시간 끌려고.”
“조금이라도 마주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여기 더 있고 싶고, 카르펜에도 보내기도 싫습니다.”
곧 그녀를 카르펜 제국으로 보내야 한다. 그리고 떨어져 있어야 하겠지.
이렇게 달콤한 초콜릿을 한입 가득 녹여 먹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 초콜릿을 뱉어 내라고 강요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다 그 개념 없는 사촌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테오도르는 메이아가 알지 못하게 속으로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그녀의 고향만 아니었다면 카르펜 따위 진작에 지도에서 지워 버렸을 거다.
“카르펜에 안 가면 안 되겠습니까?”
“가야 한다는 거 잘 알잖아요.”
“가슴이 너무 아프고 괴롭습니다. 메이와 떨어져 지내는 바람에 심장이 멈추며 어쩌죠?”
가슴에 기대며 낑낑거리는 테오도르를 메이아가 토닥였다.
“이젠 정말 나가야 해요. 테오, 지금 모습을 아그니타가 알면 유디도 알게 돼요.”
“알면 안 됩니까?”
메이아의 총애를 받은 지금 테오도르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아그니타는 유디에게 말할 거예요. 그리고 유디가 오면 저 공작저로 끌고 갈지도 몰라요.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선 돌아가요.”
“후우, 알겠습니다.”
소나기 맞고 있는 강아지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테오도르는 느린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문을 열기 전 다시 한번 메이아를 미련 가득히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
테오도르는 억지로 메이아 방에서 나와 힘없이 터덜터덜 걸었다.
“아.”
걸음을 멈춘 테오도르는 왼쪽 가슴을 부여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심장에 밧줄로 옥죄어 조이는 듯 아픔이 느껴졌다. 다시 걸음을 옮겨 잠만 자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베나블이 노크하며 나타났다.
“주인님.”
어제 밤새 메이아 방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알고 있던 베나블은 너무 좋아 미칠 거 같은 마음 때문에 밤을 꼴딱 새웠다. 한나와 축배를 들며 ‘야호’를 외쳤다.
점점 아침 해가 밝아져 오고 날을 꼴딱 새워 버린 베나블은 메이아의 방 복도에 숨어 테오도르가 나오기까지 기다렸다. 사용인들이 하나둘 잠을 깨기 시작할 때 테오도르가 메이아 방에서 나오자 베나블은 바로 그를 쫓아 방으로 들어왔다.
설마, 우리 주인님이 잠만 자고 나온 걸까? 그건 아니겠지?
베나블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잘생긴 주인님의 얼굴과 관능적인 몸을 믿기로 했다.
“어제 딸기 차는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까?”
“몹시 마음에 들어 했어. 다음에도 준비해 줘.”
“허허, 좋아하셨다니 다행입니다.”
테오도르는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메이아의 초상화를 쳐다봤다.
보기만 하더라도 미소가 지어졌다.
“베나블, 나 어쩌지?”
“예?”
“메이가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
베나블은 아빠 미소를 지었다.
“정말 메이를 만나기 전 나는 어떻게 살았던 거지?”
메이아의 초상화를 보니 옥죄어 오던 통증도 가라앉아 갔다.
“메이가 없으면 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곧 결혼식도 하실 건데 무슨 걱정이십니까? 너무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베나블,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잖아.”
테오도르는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녀와 떨어지기 싫어. 정말 싫다고.”
카르펜으로 돌아갔을 때 많은 이들이 메이아 곁에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 심장이 멈출 것 같다.
“주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준비하겠습니다.”
“메이 앞으로 온 편지와 선물은?”
“마님께 온 선물과 편지 중에 남성분들의 이름은 모두 적어 놓았습니다. 영애들 선물과 편지만 전달해 드릴 예정입니다. 어차피 영애 중에서 시녀 몇 명은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뻔히 약혼한 것도 알렸건만 메이아와 차 한잔하고 싶다며 선물 보낸 인간들이 있었다.
“메이아가 싫다면 시녀를 뽑지 말고, 메이아가 원한다면 시녀를 고를 수 있도록 해. 그리고 남자들이 보낸 편지와 선물 테이블 위에 올려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