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그의 성인식이 마무리되고, 오후에는 약혼식은 간단하게 진행되었다.
테오도르와 메이아는 함께 준비한 맹세의 언약을 말하고, 서로 약혼반지를 교환했다. 그리고 대공좌에 함께 앉았다.
차례대로 가신들이 앞으로 나와 두 사람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며 충성의 예를 올렸다.
“성녀님, 인사 올립니다. 저는…….”
“성녀 대공비 마마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신의 선택을 받으신 고귀한 분.”
메이아는 인사 올리는 가신들마다 자신을 성녀라고 부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왜 자꾸 성녀라고 부르는지 궁금했다.
메이아는 옆에 테오도르를 슬쩍 쳐다보았다.
축하해 주는 가신들이 날 보고 ‘성녀’라고 말할 때마다 테오도르의 표정은 무척 만족스러워 보였다.
“테오……, 왜 절 보고 성녀라고 하는 걸까요?”
메이아는 테오도르만 들을 수 있도록 낮게 속삭였다.
“시리우스 제국에선 여성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바로 성녀이니까요.”
“그렇군요.”
테오도르의 설명에 메이아는 이해했다.
*
메이아는 카르펜 제국의 황후가 아닌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예비 대공비가 되었다. 그날 메이아는 대공비 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디와 헬레나는 공작저로 출발할 준비를 했다.
그 전에 유디는 테오도르와 대화를 요청했다. 그녀는 응접실로 들어온 그에게 허리를 깊게 숙이며 다시 한번 메이아를 부탁했다.
“걱정하지 마. 유디.”
“예,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다.
“데미안 폰 마브로 황자에 대한 것입니다.”
메이아가 황태자의 약혼녀가 된 이유를 설명했다.
메이아가 불쌍하게 여겼던 작은 새부터 강아지 고양이까지 모두 죽인 데미안을 보며 어린데도 불구하고 데이빗은 오싹함을 느꼈다 한다.
“어느 날 데미안 황자가 아가씨의 손목을 물어뜯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손목을?!”
“어릴 때 일이지만 아가씨가 메이라는 애칭을 부르지 말라 데미안 황자에게 말했다가 화가 난 황자가 손목을 물었다 하더군요. 아가씨를 다치게 해 놓고선 데미안 황자는 데이빗 님에게 아가씨와 결혼시켜 달라 뻔뻔하게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메이아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테오도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유디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데이빗 님은 아가씨와 데미안 황자의 결혼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황가에서 원한다면 데미안 황자와 아가씨를 결혼시킬 수밖에 없었기에 데이빗 님은 오랫동안 지켜 온 중립파를 버리는 조건으로 파츠래리 황태자와 아가씨의 약혼을 추진하시면서 황제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황태자비가 될 아가씨에게 데미안 황자가 손을 댈 수 없으니 말이죠.”
테오도르의 표정이 어두워져 갔다. 그녀가 어릴 때 했던 약혼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 몰랐다.
“그리고 아가씨에게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데이빗 님과 바이올렛 님은 살해당할 위험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유디.”
“데이빗 님께서 실종되기 하루 전날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메이아가 많이 슬퍼할 수 있으니 곁에서 지켜 달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냐 물어보았지만 웃으시면서 바이올렛 님과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사고가 난 겁니다.”
“메이를 지켜 달라 말한 다음 날에 사고라……. 전 공작 부부가 사고를 이미 예상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군.”
“예, 맞습니다. 미리 사고를 예상하셨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찾기 위해서 땅의 정령사인 헬레나에게 부탁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죠.”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디에게 물었다.
“전 하츠벨루아 공작 부부가 일어난 사고 현장이 어딘지 이야기해 줘.”
“그곳은…….”
*
테오도르의 성인식과 약혼식이 지나갔다.
<아가씨, 공작저의 일을 그만두고 오겠습니다.>
메이아가 플로렌스 대공비가 되기 때문에 유디나 헬레나는 하츠벨루아 공작저에 미련이 없었다. 그렇다고 말없이 그만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에 약혼식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일단 공작저로 돌아가야 했다.
베나블은 유디가 사라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메이아를 대공비 방으로 모셨다.
유디가 떠난 지 정확히 5분 만에 일어난 일이다.
똑똑.
침대 위 헤드에 몸을 기대고 책을 보던 메이아는 노크 소리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 늦은 시각에 대공비 방을 노크한 사람이라면 안 봐도 뻔했다.
메이아는 읽고 있었던 책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은 뒤, 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하얀 실크 잠옷을 입고 예쁜 바구니를 손에 든 테오도르가 서 있었다.
“어서 와요, 테오.”
문을 열자마자 메이아를 본 테오도르는 눈가를 예쁘게 접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방긋방긋 웃으며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살짝 넋을 잃을 뻔했지만 메이아는 티 내지 않았다.
테오도르를 늦은 밤에 봐서 그런가, 아니면 방의 조명 때문에 그런가.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
“너무 늦게 와 죄송합니다. 할 일이 조금 있었습니다.”
“괜찮아요. 테오, 근데 들고 계시는 바구니는 뭐예요?”
“베나블이 챙겨 준 방들이 선물인데 딸기 차와 딸기 크레페입니다.”
베나블이 방들이를 간다는 테오도르의 말에 기쁨의 춤을 추며 챙겨 준 ‘특별히 준비한 딸기 차’다.
<주인님.>
<응?>
<마님께서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챙겨 줘서 고마워. 그러면 난 얼른 메이 방으로.>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주인님.>
베나블은 다급한 목소리로 부르자 메이아의 방으로 전진하던 테오도르의 걸음이 멈췄다.
<왜, 베나블?>
<지금 그 모습으로 가실 겁니까?>
<이 모습?>
메이아에게 빨리 갈 생각만 했던 테오도르는 베나블의 ‘주인마님에게 예쁘게 보여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
<베나블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마님의 마음을 더욱 붙들기 위해서는 언제나 아름답게 보이셔야 합니다.>
장미 꽃잎이 잔뜩 풀어진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며 각종 마사지를 정성껏 받았다.
잠옷 또한 평소에 입던 잠옷이 아닌 처음 보는 하얀 실크 잠옷이었다.
그런데.
<베나블, 옷이 이상한 것 같은데…… 왜 살짝만 몸에 힘줘도 단추들이 툭툭 벌어지고 옷이 벗겨지는 거야?>
<마님을 위해서 입는다 생각하십시오.>
<그래?>
테오도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베나블의 말을 듣고 잘못된 적이 없었다.
<혀를 내밀어 주십시오, 주인님.>
귀 안쪽, 혓바닥을 꼼꼼히 닦고 솜털 하나까지 베나블은 테오도르를 꼼꼼히 꾸몄다.
<마지막으로 이 향수를 뿌리시면 됩니다.>
<베나블, 오늘따라 신경 많이 써 줘서 고마워.>
<당연한 일입니다. 아주 화끈한…… 아니, 아니, 오붓한 시간 보내십시오, 주인님.>
너무 늦은 밤까지 관리를 받았던 터라 메이아가 자는 건 아닐까? 살짝 걱정했다.
다행히 그녀는 책을 읽으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딸기 차를 시원하게 만든 거라 메이의 입맛에 잘 맞을 것 같습니다.”
메이아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요, 테오.”
“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테오도르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예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항상 테오도르를 볼 때마다 잘생겼다는 생각은 했지만, 오늘따라 미모로 제국을 제패한 생물학적 아버지인 데이빗보다 더 잘나 보였다.
테오도르는 깎아 놓은 조각상처럼 섬세한 아름다움과 곱상한 미모이면서도 어떤 때 보면 남자다웠다. 그리고 성인식도 올려서 그런지 약간의 색기까지 느껴졌다.
메이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떡 삼켰다.
‘왜 이렇게 더운 거야.’
평소보다 더 감정을 숨기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감정 제어가 도저히 되지 않았다.
“메이.”
그의 입술을 타고 물기 어린 음성이 나른하게 흘러나왔다. 메이아의 동공이 잠시 일렁거렸다.
“메이는 밤에 이런 모습이군요.”
시선이 마주치자 테오도르는 야살스럽게 입술 꼬리를 올렸다.
“예쁩니다.”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키스해도 되느냐고 물어보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손바닥에 자꾸 땀이 차기 시작했다. 이런 게 바로 긴장이라는 건가!
긴장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그의 눈동자에 시선을 떼고 바구니로 눈을 돌렸다.
“테오, 우리 딸기 차 한잔할까요? 베나블이 준비했다니 기대되네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선이 마주칠수록 테오도르가 원하는 대로 파도에 휩쓸리는 조각배처럼 그에게 휘말려 버릴 것만 같았다.
테오도르는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던 잔 두 개를 꺼내 딸기 차를 따라 메이아에게 건넸다.
잔을 들고 향을 맡은 메이아는 기분 좋게 웃었다.
“새콤한 향이 마음에 무척 드네요.”
메이아는 우아하게 잔을 돌렸다. 잔 안에서 예쁘게 출렁거리는 분홍빛도 메이아 마음에 쏙 들었다.
“색깔도 아주 예뻐요.”
메이아는 한 모금을 넣고 혀를 살살 굴려 가며 맛을 천천히 음미해 나갔다.
“여기 딸기 크레페도 드셔 보십시오.”
“고마워요, 테오.”
생크림의 부드러운 달달한 맛이 입 속에서 부드럽고 산뜻하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아삭하게 씹히는 딸기는 달콤한 생크림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와, 크레페가 입 속에서 녹아 버렸어요.”
테오도르는 메이아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정말 마음에 들어요.”
메이아의 눈가에 미소가 번진다.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메이아는 굉장히 만족스럽다는 듯 테오도르에게 연신 맛있다며 감탄했다.
그녀의 맛있다는 말을 들으며 테오도르는 몹시 흡족해했다.
역시 베나블의 말을 듣기 잘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테오도르는 딸기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카르펜 제국으로는 언제쯤 출발하실 예정입니까?”
테오도르의 질문에 메이아는 씁쓸하게 답했다.
“다음 주에 가려고 해요, 테오.”
“아…….”
메이아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클레리라가 해 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