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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108화 (108/163)
  • 108화

    잔의 와인을 한 모금 축인 테오도르는 메이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성인이 된 이가 먼저 파트너와 춤을 춰야지만 다른 이들도 출 수 있다.

    “메이아 하츠벨루아 공녀님, 저와 함께 춤을 춰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플로렌스 대공 각하.”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손을 잡고 연회장 가운데로 왔다.

    본격적인 연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 곡의 연주곡이 끝날 때까지 메이아와 테오도르의 얼굴과 몸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며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오로지 서로의 눈동자만을 바라보며 춤을 췄다.

    이윽고, 연주곡이 끝나고 사람들은 갈채를 보냈다.

    춤이 끝난 뒤에는 본격적인 사교활동의 시작이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테오도르는 아쉬운 얼굴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

    메이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에게 호감 가득한 눈빛과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영애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한 영애가 용기 있게 먼저 인사했다.

    “메이아 하츠벨루아 공녀님, 안녕하십니까.”

    “반가워요.”

    예쁘게 눈을 휘며 인사를 받아 준 메이아를 보며 인사한 영애는 좋아 어쩔 줄 모르며 우물쭈물했다.

    “도머슨가의 루이비라고 합니다.”

    메이아의 머릿속엔 도머슨가의 정보가 떠올랐다. 농업 쪽으로 이름있는 가문이다.

    그리고 루이비라면 도머슨가의 막내딸이다.

    좋아하는 건 그림이다.

    그리고…….

    “반가워요, 도머슨 영애. 그 드레스 마담 마리앙뚜 작품 아닌가요?”

    “어머! 맞아요!”

    마담 마리앙뚜는 드레스 옆선에 꼭 꽃 모양 자수를 둔다. 꽃 모양 자수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꽃 모양 자수를 모를 리가 없죠. 저도 그 꽃을 좋아한답니다.”

    루이비는 메이아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비의 인사의 시작으로 영애들은 메이아에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하츠벨루아 공녀님, 저도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바이올렛트가의 레일라입니다.”

    와인으로 유명한 가문이다.

    “바이올렛트가의 와인을 무척 좋아하는데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저희 가문의 와인을 아세요?”

    “사람들이 칭찬하는데 모를 수가 없죠. 저도 곧 성인식을 치르는데 제일 먼저 바이올렛트가의 와인을 마실 거랍니다.”

    레일라는 감격한 얼굴로 메이아를 넋 놓고 쳐다봤다.

    차례대로 다가오는 영애들은 메이아와 한 마디라도 섞어 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메이아는 인사를 받을 때마다 상대방 가문의 칭찬, 가문에서 하는 사업 이야기 요즘 최신 유행 패션을 이야기하며 영애들과의 대화를 주도했다.

    “세상에 가문 이름만 이야기했는데도 집안에서 무슨 사업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

    “드레스만 보고 어떻게 만든 디자이너 이름을 말씀하시는 거죠?”

    “달달 외우신 거겠죠.”

    “가신 가문들이 한두 개도 아닌데 설마 다 외웠을까요?”

    “외웠으니까 인사할 때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시는 거겠죠.”

    “저는 드레스 디자이너 맞추시는 것만 봐도 존경스럽네요.”

    “엄청난 기억력이시네요.”

    “시리우스 제국에 가장 아름다운 사교계의 꽃이 등장했네요.”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메이아의 칭찬에 주위에서 서빙을 하던 시종과 시녀들의 어깨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베스 아일렌이라고 합니다.”

    메이아는 호의적이지 않은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한 빨간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영애를 쳐다봤다. 아일렌이라면 분명 자작 가문의 성이다. 그리고 베스라면 아일렌 자작 가문의 외동딸 이름이다.

    처음 본인을 소개할 때는 가문의 성과 이름을 말하는 것이 예의다.

    즉, ‘아일렌가의 베스입니다’라고 말해야지만 예의를 갖춘 인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분명 베스는 가문의 성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이름부터 밝혔다. ‘베스 아일렌’이라고 이름만 밝히는 건 당신에게 예의를 갖추기 싫다는 뜻으로, 사교계에 흔히 있는 ‘도발’이다.

    그렇다고 도발한 상대방에게 ‘어머, 이름부터 알려 주는 거 보니 건방지다’라고 지적할 순 없다.

    도발인 걸 알기 때문에 ‘예법에 걸맞은 인사’를 해야 된다고 지적한다면 사람들에게 기분 나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보여 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메이아는 재미있다는 듯 입술 꼬리만 올려 베스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베스에게 다가갔다.

    기분 나쁠 법한데도 웃어 주니 베스는 당황했다.

    메이아는 베스에게 가볍게 묵례만 하고 부드럽게 등을 돌렸다.

    베스는 입술을 꽉 깨물며 메이아를 노려보았다.

    “카르펜 제국에서는 인사한 사람한테 묵례만 하는 것이 예의입니까?”

    메이아는 사교계의 꽃으로서 이런 사교계 시비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설렘이 느껴졌다.

    ‘나에게 시비를 걸어 주는 사람이 있다니…….’

    메이아에게 있어 베스의 사교계 도발은 첫 경험이었다.

    메이아는 다시 등을 돌려 침착하게 눈앞의 베스를 살펴봤다.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도발하는 것이 꼭 메릴을 떠올리게 한다.

    메이아는 아무런 대꾸 없이 베스에게 다가갔다.

    왜 그녀는 사교계 도발을 하는 것인가? 설마 대공비 자리를 노렸던 걸까?

    그래서 질투가 나서 날 창피하게 만들고 싶은 건가?

    그게 아니라면?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도발을 받았다고 울면서 도망갈 성격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기분 나쁨을 표현하고 싶지도 않다.

    메이아의 한쪽 입꼬리가 찰나 올라갔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모든 가신 가문들은 만장일치로 메이아가 대공비가 되는 걸 찬성하는 바람에 오히려 아쉬웠던 순간이 떠올랐다.

    <테오, 제가 대공비가 된다는 걸 가신들이 반대한다면 제가 하자는 대로 따라와 주실 거죠?>

    <당연합니다. 메이, 그렇지만…… 만장일치가 나왔습니다.>

    <뭐라고요? 파혼했는데도요?>

    <모르겠습니다. 가신들은 성녀님을 대공비로 맞이했다고 좋아합니다.>

    <제가 성녀라고요?>

    유람선 사건 때문에 신문과 잡지에 대서특필 되어 사람들이 영웅이라 부르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성녀라고 불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큼 메이가 고귀하고 아름답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전 가신들 반대가 없어 기분이 좋습니다.>

    메이아는 반대하는 가문이 있다면 탈탈 털 생각이었는데. 아주 조금 아쉬웠다.

    물론 자신을 대공비로서 열렬히 환영해 주니 기분이 매우 좋은 건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사교계 도발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메이아는 베스를 뚫어지게 보았다. 베스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하, 할 말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메이아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누가 봐도 화사한 미소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는다. 오싹함이 베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꼭 입을 크게 벌린 뱀이 자신을 삼키기 직전의 기분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메이아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묵례한 이유는 아일렌 영애의 실수를 너그러이 넘어가기 위해서입니다.”

    베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도발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메이아는 실수라는 단어를 선택해 말했다.

    베스가 원하는 건 메이아가 얼굴을 붉힌다거나 아니면 불편해하는 것이다. 메이아는 흘깃 베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쳐다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좀 더 베스에게 다가가며 느릿하게 말했다.

    “저는 실수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실수를 지적하는 건 벌어진 상처에 손가락을 찔러 넣어서…….”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베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메이아는 다정하게 말했다.

    “상처를 찢는 짓이니까요. 그렇게 벌어진 상처가 점점 찢어지면 과다 출혈로 사람은 죽겠죠?”

    등골의 서늘함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실수를 지적하는 건 그런 거랍니다, 아일렌 영애. 지적할수록 상대방의 자존심이 찢어지게 되는 거죠. 벌어진 상처를 억지로 찢는 것처럼 말이죠.”

    베스는 잔뜩 인상을 구기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전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수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일렌 영애의 실수는 넘어가겠습니다.”

    메이아의 말대로라면 베스의 도발은 실수쯤으로 생각하고 있고, 웃으며 묵례만 한 이유는 실수를 덮어 준다는 뜻이다.

    “제가 한 건 실수가 아니라…… 헙!”

    베스는 얼른 자신의 입을 굳게 닫았다.

    일부러 한 도발이다. 여기서 실수가 아니고 일부러 한 도발이 맞다고 한다면 오히려 당하는 건 자신이다.

    메이아의 시선이 저절로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베스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왜 말을 끝까지 하지 않으시는 거죠? 혹시 실수가 아니신 겁니까?”

    베스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이건 자신의 원하는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메이아를 도발한 이유는 시리우스 제국이 녹록지 않은 곳이라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여기서 실수라고 인정해도 창피한 일이요, 도발한 것이라 말하는 것도 자기 얼굴 침 뱉기다.

    길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베스는 메이아에게 허리를 숙였다.

    “긴장한 탓에 실수했습니다. 아일렌가의 베스입니다.”

    “역시 실수일 줄 알았습니다. 하긴, 맨정신에 다섯 살짜리 꼬마 아이도 하지 않는 예법 인사를 할 리가 없죠. 그렇죠?”

    메이아의 뜻은 정확하게 베스에게 전달되었다.

    일부러 도발한 걸 알고 있지만 넘어가 주겠다. 네가 한 짓은 다섯 살짜리 꼬마도 안 하는 짓이라고 돌려 말하고 있었다.

    “……예.”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으면 그런 실수를 하는 법이죠.”

    “……예.”

    “한 번의 실수는 귀엽겠지만 두 번째는 습관이고, 세 번째는 고의랍니다.”

    메이아는 베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으며 그녀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말 알아들으신 거죠?”

    베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메이아를 그저 얼굴만 아름다운 공녀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단단히 오해했다.

    아름다운 외관은 무서움을 가리기 위한 가면일 뿐. 이런 사람과는 절대 척을 지면 안 된다.

    “……예, 조심하겠습니다.”

    메이아는 사람들에게 도발 받은 걸 오히려 실수한 것이라며 감싸 주는 자애로운 인물이 되었고 자신은 실수한 철부지로 만들었다.

    그녀의 단 한 마디에.

    또한, 메이아는 베스에게 ‘실수’와 ‘도발’ 둘 중의 하나만 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괜찮아요, 아일렌 영애. 긴장하게 되면 저도 가끔 실수한답니다.”

    잘못 건드리면 오히려 당한다.

    베스의 목울대가 울렸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실수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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