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그의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는 무척 상냥하다.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 또한 다정하다.
강아지처럼 순진한 눈망울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 모습이 몹시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
<사랑합니다, 메이.>
생각만 하더라도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갔다.
한편 메이아의 고운 은빛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빗질하던 유디는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왼손의 반지를 보여 주며 청혼받았다고 말하는 메이아의 말투는 몹시 딱딱했지만 그 속에는 기분 좋은 웃음이 가득했다.
언제부터 우리 아가씨가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했었더라?
메이아는 계속 반지를 만지며 쳐다보고 미소 지었다.
“그렇게 기분이 좋으십니까?”
“내가 기분 좋아 보여? 유디?”
“네, 계속 싱글벙글 웃으시고…….”
유디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
“아가씨 눈빛에서 행복이 보입니다.”
어릴 때부터 감정을 절대 보이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받아 온 메이아다.
“이 유모는 지금의 아가씨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든답니다.”
유디는 카르펜 제국에 있을 때보다 지금 플로렌스저에 있는 행복해하는 메이아의 모습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아니, 마음이 놓였다.
“응, 나도 마음에 들어.”
메이아는 반지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기분이 몽글몽글하고 간질간질했다.
“그분에게 진심이신 거죠?”
“난 그가 좋아, 유디.”
테오도르가 좋다고 말하는 메이아의 목소리엔 진심이 느껴졌다.
“전 아가씨가 행복해지기만 하면 됩니다.”
유디는 계속 메이아의 머리카락을 빗으며 미소를 지었다.
메이아에게 있어 ‘좋아’는 음식이 좋다, 강아지가 좋다 등등 남들이 좋아할 만한 걸 말할 때 쓰는 말이다. 사람을 두고 절대 ‘좋아한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대공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사람 너무 믿지 말라고. 내가 갑자기 심장에 칼이라도 꽂으면 어찌할 거냐고.”
한때 메이아에게 받아 본 적이 있던 질문이다.
물론, 그때 유디는 메이아 대신 죽을 목숨이니 찔러 죽이지 말아 달라고 답했다.
“그분께선 칼에 심장을 찔려 죽어도 좋다 하던가요?”
“아니야. 뭐라 했는지 알아? 유모.”
“뭐라 하시던가요?”
시답잖은 말을 했을 게 뻔하지만 메이아가 누구인가!
그런 말을 했다고 넘어갈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테오도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했다.
“행복할 것 같대.”
“네?”
“나한테 심장이 찔려 죽는다면 행복할 것 같대.”
유디는 예상치 못한 말에 빗질하던 손을 멈췄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물어봤어. 그의 대답은 마지막 죽는 순간에 사랑하는 여자를 본다면 자신을 죽인 원망보다 눈 감는 순간 나를 볼 수 있어 행복할 것 같다는 거야.”
생각해 봐라. 누군가 내 심장에 칼을 찔러 넣어 죽인다는데…….
‘행복?’
그 이유가 고작 사랑하는 여자를 눈감기 전 볼 수 있어서?
“대공님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을 이야기하는데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와 다른 슬픔과 아픔이 느껴지더라. 그래서 왜 그럴까? 고민을 하다 한 가지 깨달았어. 난 테오도르라는 남자를 지켜 주고 싶다는 걸 깨달았어.”
그렇게 감정을 깨달아 갔다.
“깨달은 이 마음 소중하게 여기고 싶어, 유디.”
항상 메이아는 감정을 숨기고, 절대 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살 줄 알았다.
“나는 그가 좋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청혼받으신 거 축하합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약혼식 준비하겠습니다.”
“유디, 수고해 줘.”
똑똑.
“들어와.”
문을 열고 헬레나가 들어왔다.
“아가씨.”
“응, 헬레나, 자선 경매에 내 물건들이 혹시 올라갔어?”
“그게, 아직 자선 경매에 올라갔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국혼 준비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날짜는 성인식이 지난 다음 날 발표한다 하십니다.”
“제대로 날짜도 정해 놓지 않고 국혼 준비라.”
둘 다 성인인데 언제 국혼을 올리더라도 메이아에겐 놀랄 만한 소식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얼마 전 자신에게 매달리는 파츠래리가 생각나 코웃음이 나왔다.
“고생했어. 헬레나, 나가 봐도 좋아.”
“네, 아가씨.”
사실 메이아는 일부러 자선 경매에 내놓을 물건을 메릴에게 맡긴 것이다.
사실 올해에는 그 어떠한 자선 경매도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참여하지 않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다. 본인은 마탑에 있으니 말이다.
메릴이 고가의 물건을 보고 사심 없이 자선 경매에 내놓아 준다면, 사람들은 ‘아직 메이아가 죽지 않았구나. 역시 사교계의 꽃. 받은 선물 클래스가 보통이 아니다’라며 칭찬할 것이다.
만에 하나 물건을 자선 경매장에 내놓지 않는다면…….
“곤란하게 될 텐데, 메릴 언니.”
아주 굉장히.
메이아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유디는 귀를 쫑긋 세웠다.
“네? 아가씨.”
“카르펜 제국에 돌아가면 재미있는 일이 많아질 것 같아서.”
유디는 메이아의 말에 긴장했다. 그녀에게 재미있는 일이란 누군가는 지옥이 된다는 뜻이다.
“재미있을 것 같아.”
*
“기분이 좋으십니까?”
테오도르는 성인식과 약혼식 준비로 바쁜 메이아를 데리고 바닷가로 나왔다.
“한 번쯤 여기를 제대로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테오도르는 메이아가 걱정스러웠다. 무슨 일을 하든 완벽하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사실 설레는 약혼식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메이아는 초대 손님 목록이나 대접할 음식 그리고 연회장을 꾸미는 일에 더 신경 썼다.
<메이, 이 정도는 시키면 다들 알아서 할 겁니다.>
<그들을 감독하는 게 제 일이에요.>
<시리우스에서는 아랫사람에게 시킨 뒤에 나중에 잘했는지 한 번 확인하고 보고만 받으면 됩니다. 감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꼼꼼하고 일 잘하는 건 매우 훌륭하지만, 자신은 메이아를 플로렌스 대공비로 만들기 위해 하는 약혼식이 아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약혼을 하는 것이다.
그녀에겐 잠깐의 휴식이 필요하다.
<저는 가신들 앞에 처음으로 얼굴을 보이는 날이에요. 책잡히고 싶지 않아요.>
<우선 모든 일은 잠시 애튼과 헤만에게 넘기고 저와 나가 주십시오.>
그리고 무작정 마차에 태우고 메이아가 좋아하는 바다로 향했다.
“나오길 잘했죠?”
“이게 그 유명한 땡땡이인 거죠?”
“네, 맞습니다. 땡땡이.”
“처음 해 봐요.”
카르펜 제국에서는 쉬지 않고 바쁘게 살았다.
공작 영애로서 해야 하는 의무와 황태자의 약혼녀로서 책임을 다해야만 했다. 황후가 갖춰야 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쉬어 가면서 해도 된다’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
‘좀 더 노력하셔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 ‘쉬면 안 된다’.
응당 그래야 한다고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 생각했다.
<메이, 쉬엄쉬엄해도 됩니다.>
<그렇지만 할 일이 많은걸요.>
<유능한 보좌관들이 있습니다.>
외출하자는 테오도르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약간의 불안한 마음이 불쑥 솟아올랐다.
‘일을 다 하지 않았는데도 쉬어도 되는 걸까?’
사람들 앞에서 예비 플로렌스 대공비로서 흠 잡히지 않고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저와 외출 한 번 했다고 그동안 준비했던 일이 뒤틀리지는 않습니다, 절대.>
테오도르의 손을 잡고 온 바닷가.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막상 도착하니 기분이 굉장히 짜릿하다. 일탈하는 기분이 이런 건가?
하얀 백사장 모래 위로 반짝이는 태양이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메이아는 눈 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봤다. 세찬 바닷바람이 계속 얼굴과 귀를 때렸지만 시원하고 기분이 매우 상쾌했다. 마음이 뻥 뚫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쏴아아. 철썩.
파도 소리가 귀를 즐겁게 했다. 소금기 머금은 바다 향기에서는 살짝 비린내가 났지만, 그마저도 아주 좋았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메이아를 보며 테오도르는 만족스러운 듯 방긋 웃었다.
“약혼식이 끝나며 더 좋은 데로 모시겠습니다.”
테오도르의 사랑스러운 말에 메이아는 웃음부터 나왔다.
“꼭 데리고 가 주세요.”
“원하는 곳 어디든지 모시고 가겠습니다.”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기쁨과 설렘이 가득했다.
“약속했어요, 테오.”
그는 메이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메이가 기뻐하니 저도 매우 기쁩니다.”
손을 잡으며 얼굴을 붉히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메이아는 손을 올려 그의 뺨을 쓸었다.
테오도르는 그 손바닥에 뺨을 깊이 묻었다. 그 모습은 꼭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주인에게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커다란 블랙 레트리버를 연상시켰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그의 뜨거운 열기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저보다 먼저 성인이 된 걸 축하해요, 테오.”
미소 지으며 말하는 메이아의 모습에 테오도르의 얼굴이 빨개졌다.
“축하 감사합니다.”
심장 박동은 빨라지고 자꾸만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가 바깥이 아니고 집무실이나 응접실이나 단둘이 있는 공간이었다면 입술을 삼키고 손을 움직여 그녀의 몸 구석구석 핥고, 그리고 깊게 뒤엉키…….
이 이상의 상상은 너무 위험했다.
“안 됩니다!”
테오도르는 다급하게 말했다.
“뭐가 안 된다는 거예요?”
“제가 위험한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테오가 저한테 위험할 리가 없잖아요.”
그의 반응이 이상했다.
“테오, 지금 저와 거리를 둔 거예요?”
자신에게 반걸음 떨어진 그는 어딘지 모르게 유독 조심스러워 보였다.
뭔가 참는 듯한 얼굴. 원하는 걸 앞에 두고 망설이는 듯한 몸짓.
“네?”
테오도르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눈동자를 굴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말을 하지 않는 거지?
“말해 봐요. 괜찮아요.”
“위험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메이아의 얼굴만 봐도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는 테오도르다.
혈기 왕성한 자신의 신체 변화 때문에 정말 이를 꽉 깨물며 참고 있다.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욕망이 몸을 태울 것만 같다.
“뭐가 위험하다는 거예요?”
반걸음 떨어진 테오도르에게 다가간 메이아는 화사한 얼굴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무슨 고민 있으신 거예요?”
혹시, 약혼식을 앞두고 온다는 예비 신랑의 우울증에 걸린 건가?
뭔가 반성하듯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려앉았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이야기하기엔 그의 얼굴은 붉었고, 눈가가 촉촉하다. 약간 호흡도 불안정해 보였다.
“그러면 뭐가 위험하다는 거예요? 말을 해야 알죠.”
메이아가 잡은 손을 깍지 끼우자 테오도르의 얼굴이 붉은 자두처럼 더 빨개졌다.
“테오는 저에게 하나도 안 위험해요.”
“전 자제력이 너무 없는 것 같습니다.”
뜨거운 정염이 담긴 그의 눈을 마주치자 메이아는 몸이 살짝 떨렸다.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고 싶을 정도로 테오도르의 눈빛은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