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테오도르와 함께 말을 타고 도착한 곳은 저택 안에 있는 가장 높은 지대였다.
구불구불 언덕길을 올라갈수록 커다란 유리 온실이 보였고 그 뒤로는 멋진 바다가 보였다.
“풍경이 아름답네요.”
“여기는 플로렌스 대공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온실에 가까워질수록 메이아는 익숙한 감각들을 느꼈다.
“마력이 느껴지는 온실이네요.”
“마정석으로 만든 온실입니다.”
마차에서 내린 뒤, 앞에 보이는 바다를 바라봤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온실 문이 열린 안쪽에는 많은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리고 그 꽃들 사이로 커다란 비석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커다란 무덤도 보였다.
메이아는 비석으로 다가가 써진 글귀를 읽었다.
[리틀러 플로렌스]
그리고…….
[죠엘 플로렌스]
[시리우스 제국의 영웅들, 이곳에 편히 잠들다.]
온실은 테오도르의 부모님의 무덤이었다.
“부모님의 무덤이군요.”
“네, 5년 전 시리우스 제국의 전 황제의 폭정을 지켜보기 어려우셨던 부모님은 현재의 시리우스 3세 폐하를 도와 반란에 성공했습니다. 그 과정에 돌아가셨죠.”
테오도르는 덤덤히 말했다.
“어머니에게 날아오는 칼을 막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온몸을 던져 어머니를 껴안으셨습니다. 그대로 날아온 칼이 두 분의 심장이 관통했고 그래서 사망하셨다고 합니다.”
“테오.”
“황제 폐하 말씀으로는 두 분이 서로를 지키다 죽었다 했습니다. 어린 저는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망했습니다. 한 분이라도 살아 계시면 좋았을 것을.”
테오도르는 메이아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이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저에게 그런 상황이 온다면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몸을 내줄 것입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마법 이공간에서 고급스러운 벨벳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메이아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벨벳 상자를 조심히 열어 보여 주었다.
상자 안에는 반지와 터키석으로 만들어진 세이지 꽃 모양의 브로치가 있었다.
터키석과 세이지는 12월에 태어난 메이아의 탄생석과 탄생화다.
“제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들 앞에서 감히 맹세합니다.”
이건 누가 봐도 청혼하기 위한 대사다!
“메이아 하츠벨루아 공녀님, 제가 감히 그대에게 허락을 구합니다. 저의 아내가 되고 제 가족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부모님 앞에서 맹세컨대 당신만을 성실히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로맨틱한 대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마음에 와닿는 대사다.
요란하지도 않고, 진심이 담겨 있는.
“메이아 하츠벨루아가 테오도르 플로렌스를 남편으로 맞이하겠습니다.”
메이아는 방긋 웃으면서 왼손을 내밀었다.
테오도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메이아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줬다.
“왜 이렇게 떨어요.”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떨릴까요?”
메이아는 방긋 웃으며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봤다. 너무 딱 맞았다.
“제 손가락 치수는 어떻게 아셨어요.”
“매일 손을 잡으니까요.”
테오도르는 자신의 부모님 무덤가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어머니, 아버지, 제 가족이 될 사람입니다.”
어린 날, 아버지인 리틀러와 대화했던 일들이 생각났다.
<테오, 난 너희 엄마를 만나고 많이 행복하고 좋단다.>
<저도 어머니랑 결혼하면 지금보다 더 많이 행복해질까요?>
<아니지! 네 엄마는 나랑 결혼했으니 테오도 꼭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알겠습니다, 아버지.>
<결혼을 한다는 건 서로 가족이 되어 서로의 가슴 속을 꽉 채워…… 외로움이 사라지는 일이란다.>
그때 당시는 외로움이란 걸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테오, 이것만큼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뭘요?>
<귀족은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가족을 버린다면 죽는 거와 마찬가지다.>
리틀러는 항상 가족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어릴 때는 왜 그런 말을 하셨나 싶었지만 지금 와서 아버지의 모든 가르침이 이해가 되었고, 고마웠다.
“아버지, 어머니,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젠 두 분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한때 테오도르는 자신을 두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원망하며 굉장히 슬퍼했다.
용감하게 나라를 구하고 돌아가신 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하기 싫었다.
사무치는 그리움 속에서 방황했다.
“늦게 말해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명복을 빌겠습니다.”
처음으로 두 분에게 진심으로 명복을 빌었다.
<테오, 사랑하는 내 아들.>
매일 사랑한다며 이마에 입을 맞춰 주셨던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아들보다는 딸이 좋았는데.>
<예쁜 며느리를 맞이하면 되죠.>
<빨리 결혼시켜서 손녀를 봐야 되겠구나, 하하.>
<아버지, 손녀를 만들기 위해 저를 억지로 결혼시킨다는 거예요?>
<그게 아니면 뭐하러 결혼시키느냐!>
<당신도 참, 우리 테오는 결혼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언제나 과격하지만 따뜻했던 나의 아버지.
지금까지 과거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추억’으로 만들어야 한다.
“메이, 왜 사람은 기뻐도, 슬퍼도 눈물이 나는 걸까요?”
“저도 한때 그런 질문을 아버지에게 한 적 있어요.”
황후가 되기 위한 모든 것들이 눈물이 나게 힘들 때 물어봤던 질문이다.
“뭐라고 답해 주셨나요?”
“눈물은 마음을 강하게 만들어 준대요.”
울면 울수록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짐하고,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
“제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남자인 줄 몰랐습니다.”
“테오는 처음 봤을 때부터 눈물이 많았어요.”
“청혼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테오도르와 메이아는 유리 온실을 바로 떠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이었다.
“비가 그치면 출발하죠.”
“네.”
메이아는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비를 바라봤다.
예전 황태자의 약혼녀 시절, 야외에서 열리는 각종 사교계 모임이 비가 와서 종종 취소될 때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 때문에 모임이 취소되었습니다, 아가씨.>
<비가 오니 어쩔 수 없지.>
그럴 때면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쉬었다.
비는 자신에게 있어 휴식을 주는 고마운 존재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메이아의 어깨 위로 걸쳐 주며 말했다.
“여기는 높은 곳이라 바람도 차갑고, 비까지 오니 체온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춥지는 않았지만 만약에 추워지면 마법 이공간을 열어 추위와 더위를 차단해 주는 마법 망토를 꺼내 입으면 되었다.
그렇지만 메이아는 자상하게 챙겨 주는 테오도르의 모습에 마법 망토를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고마워요, 테오.”
테오도르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끼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먼저 준비해 준다.
이건 센스와 눈치가 있다고 갖춰지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어야지만 가질 수 있는 마음 씀씀이다.
“비가 내리니까 테오 말대로 바람이 차가워지네요.”
바람이 차가워진다는 말을 들은 테오도르는 메이아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이러면 따뜻해질 겁니다.”
그대로 테오도르의 품에 안기자 메이아는 피어오르는 그의 체향을 깊이 들이마시며 편안함을 느꼈다.
온실과 대지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더불어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메이, 따뜻하십니까?”
고개를 올려 그를 올려다봤다.
“네.”
테오도르의 애정 어린 시선에 메이아 또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서로의 뺨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가까워지면 이대로.’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점점 커지며 감정이 점점 고조되어 갔다.
가까워지는 남녀의 거리를 그 누가 떨어뜨릴 수 있을까?
서로 좋아한다는 마음과 단둘이 있다는 의식이 심장에 달콤한 기대감을 주었다.
테오도르는 마치 꽃잎을 어루만지는 듯한 섬세한 손길로 메이아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메이아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머리와 마음, 몸까지 저린 것 같았다.
테오도르는 조심스레 그녀의 턱을 잡고 벌어진 입술 틈으로 살며시 숨결을 집어넣었다.
촉촉한 감촉이 부드럽고 뜨거워 기분이 좋았다.
그는 그녀의 입 안을 집요하게 음미하고 입 아래, 천장 모든 것을 더듬고 간지럽혔다.
빗소리.
향긋한 꽃내음.
그리고 키스.
몸속 깊은 곳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 계속 치밀어 올랐다.
“하.”
희미하게 들리는 그의 숨소리가 유난히 귓가를 간지럽혔다.
테오도르는 포갰던 입술을 떼고 그녀의 귓가에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며 간지럽혔다.
“으응.”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소리를 낸 메이아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를 쳐다봤다.
윤기 흐르는 흑발이 헝클어져 있었다.
열띤 감정을 숨김없이 보여 주는 검은 눈동자가 온전히 자신만을 비추고 있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나가는 바람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전에 책에서 봐도 이해할 수 없었던 글귀가 마침내 마음에 와닿았다.
테오도르의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메이?”
테오도르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메이아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테오, 이만 떨어져요.”
테오도르와 껴안고 있으면 머리와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심장 건강에 좋지 않다.
특히 귓가에 입술이 닿을 때마다 너무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몸과 몸 사이를 좁히고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메이는 제가 떨어져 있는 게 좋습니까? 저는 떨어져 있는 거 싫습니다.”
누가 고양이를 요망하다 했는가!
정말 요망한 게 무엇인지 하나도 모른다는 눈망울로 꼬리를 흔들며 바라보는 강아지가 제일 요망하다.
“테오, 전 춥지 않아요.”
꼭 빗방울이 땅으로 떨어질 때마다 메이아는 자신의 심장도 같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두근두근.
“그렇지만 메이, 몸이 떨어져 있으면 체온이 떨어질지도 모르니 저는 이렇게 붙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쁜 미소를 보이며 테오도르는 살며시 메이아의 왼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메이, 손이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테오도르는 잡고 있던 메이아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귀엽게 뺨을 비볐다.
“이렇게 하면 금방 손이 따뜻해질 겁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랑 떨어질 거야?’
그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귀엽게 행동하는 테오도르의 행동에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버렸다.
“네, 맞아요. 절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을 만큼 너무 따뜻해요, 테오.”
막 걸음마를 시작한 강아지보다, 갓 태어난 병아리보다, 바람에 흔들리는 데이지 꽃보다 그가 미치도록 귀엽다.
뭘 해도 그가 밉지 않다. 그가 견딜 수 없도록 사랑스럽다.
사랑이 무엇인지 머리로 이해되고, 마음에 스며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