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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99화 (99/163)
  • 99화

    <백작님도 너무하시네요.>

    <자선 경매 물품을 어디다 맡길지 알아보겠습니다. 메릴의 이름으로 등록하면 분명 많은 이들이 좋아할 겁니다.>

    <그렇지만 메이아가 자기 이름으로 내놓아 달라고 했어요.>

    메릴의 말에 토마스는 또 짜증이 올라왔다. 메이아의 이름으로 경매에 참여하면 돈을 털어먹을 수가 없다.

    <좀 그렇네요.>

    <뭐가요, 토마스?>

    <어차피 같은 하츠벨루아 가문의 일원인데 누구 이름으로 경매 물품을 내놓았는지가 중요한 걸까요? 어차피 그분은 여기 카르펜 제국에 계시지도 않으신데. 그리고 익명으로 하는 자선 경매도 있어서 굳이 메이아 공녀님 대리인으로 참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메릴이 건네준 쪽지에 적힌 자선 경매 물품들을 쭉 훑어봤다. 구할 수도 없고, 가지기도 어려운 희소한 한정판 작품들이 많았다. 토마스는 메릴보다는 우아하고 똑똑한 메이아를 신부로 맞이하고 싶어 여러 번 유혹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철벽이 따로 없었다.

    도도한 여자를 한 번에 꺾을 때 큰 성취감을 얻을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사교계의 꽃으로 너무 바빠 유혹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단념하는 찰나에 나타난 사람이 메릴이었다. 그녀는 너무 쉬운 여자였다.

    <제가 자선 경매 일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익명으로 하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메릴은 메이아가 꼭 자신의 이름으로 자선 경매 참여해 달라는 말이 신경이 쓰였다.

    그렇지만 토마스의 말이 백번 맞는 말이다. 익명으로 하면 될 일이 아닌가!

    <그러면 토마스, 부탁해요!>

    <그리고 이 물건을 팔아 생긴 돈으로 제 사업 자금을 대는 건 어떠십니까?>

    <그래도 돼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자선 단체에 흘러가는 돈이니 그 돈이 조금 줄어든다 해서 하츠벨루아 공녀를 욕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토마스는 역시 똑똑하네요.>

    메릴의 허락에 토마스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돈을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저번에 갔던 도박장에서 잃어버린 본전도 찾아야지?

    돈이 생기면 할 일을 차례대로 생각하며 토마스의 눈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

    메이아의 방 앞에 선 테오도르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결혼한다면 잠드는 시간도 헤어지지 않게 될 텐데……. 테오도르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벌써부터 보고 싶어질 것 같아 괴롭습니다.”

    메이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저와 산책하시겠어요?”

    메이아의 말에 테오도르의 축 처진 눈꼬리가 곱게 휘어졌다.

    “예! 산책하고 싶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봐요.”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왼쪽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메이아와 가슴 아픈 잠깐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테오도르도 방으로 돌아갔다.

    똑똑.

    방문을 열고 들어온 집사 베나블은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약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주인님.”

    그렇지만 테오도르의 표정은 기뻐 보이진 않았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주인님.”

    “있었지.”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은 테오도르는 마탑에서 파츠래리와 만났던 일을 간단히 말해 주었다.

    “카르펜의 황태자가 메이아에게 질척거려.”

    베나블은 테오도르의 말에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감히 우리 대공비 마마를!”

    “그래도 메이는 내 곁에 있겠다고 말해 줬어.”

    테오도르의 말에 베나블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펜의 황태자를 어떻게 할까?”

    “약혼도 하셨으니 그리 걱정하실 일은 없으실 것 같습니다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카르펜 제국을 지도에서 지우시면 됩니다.”

    “안 돼. 메이의 고향이야, 베나블.”

    “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모기는 빨리 잡는 게 좋겠지?”

    테오도르가 말하는 의도를 베나블은 모르지 않았다. 카르펜 황태자를 모기로 비유한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플로렌스 대공가와 척을 지고 싶은 제국은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베나블, 모기는 어떤 순간에도 어떤 사람이라도 불편하게 만드는 벌레지.”

    겨우 그녀와 닿았다. 모든 순간을 내려놓으며 마음을 전했다.

    파츠래리에게 고마웠다. 이런 그녀를 놓아줘서. 그런데 이제 와서 집착하고 질척거리겠다?

    절대 안 될 일이다.

    하지만 모기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면 그 누구든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신경을 쓴다는 건 곧 관심을 주는 거다. 그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메이아의 작은 관심도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그녀의 관심을 가지고 간다면 그를 용서하기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주인님.”

    “응?”

    “모기가 어떤 순간도, 어떤 사람도 가리지 않지만, 장소는 가립니다. 특히 높은 곳을 못 오죠.”

    “높은 곳?”

    “높은 곳은 바람이 많이 붑니다. 그 바람을 견딜 수 있는 모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어 날아가는 모기를 걱정하고 신경 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베나블은 능숙하게 테오도르의 시중을 들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플로렌스 이름 아래에 놓인 벌레일 뿐입니다, 주인님.”

    *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겪었던 고독과 슬픔을 더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테오도르의 마음은 요즘 무척이나 평온했다. 그의 하루는 이른 아침에 시작된다. 일어나자마자 가벼운 샤워를 하고 베나블이 준비한 가벼운 옷을 입는다.

    “메이아 공녀님은 일어나셨을까?”

    눈을 뜨고 감기 전까지 테오도르는 항상 메이아를 찾는다.

    “예, 일어나셨습니다.”

    “그럼 빨리 가야겠어. 몹시 보고 싶어.”

    아침 일찍 그녀를 만나 함께 산책하거나 아니면 연무장에 간다. 그녀는 마나 수련을 하고, 자신은 검술 훈련은 한다.

    끝날 때쯤엔 베나블이 시원한 딸기에이드를 가지고 온다.

    그녀가 그걸 맛있게 마시는 모습을 보면 지금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아침을 함께 먹고, 함께 일을 하고, 점심을 함께 먹고, 함께 일을 하고, 저녁을 먹은 뒤에는 함께 서재에서 책을 본다.

    너무 행복해서 가끔 꿈이 아닐까? 볼을 꼬집어 보다가 베나블이 옆에서 “그렇게 얼굴을 꼬집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외친다.

    “베나블, 나 요즘 너무 행복해서 꿈이 아닐까 싶어서 꼬집어 본 거야.”

    “주인님 몸은 이젠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함부로 상처를 내지 마십시오. 이제 곧 약혼도 하시는데 몸을 더욱 아끼셔야 합니다.”

    “그러네. 약혼하네. 아주 좋아서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아.”

    “심장을 잘 제어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래도 진정하셔야 합니다.”

    베나블은 상사병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그를 위로했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 보면 괴로워진다. 아침까지 그녀와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한다.

    ‘빨리 결혼하고 싶다.’

    그러면 떨어질 일도 없을 텐데…….

    그녀를 방 앞까지 에스코트하면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쥬안과 아그니타를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메이아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이 있다.

    그들은 테오도르를 자신들이 모시는 아가씨를 낚아챈 도둑처럼 여기며 적대감을 가지고 노려본다.

    테오도르 역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에 웃어넘긴다.

    “그럼, 메이 내일 아침에 봐요.”

    그녀와 맞잡고 있었던 따뜻한 손길이 점점 멀어져 간다.

    “테오, 내일 봐요.”

    “방 앞까지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냥 편하게 연무장에서 봐요.”

    “일찍 보고 싶습니다.”

    메이아는 풋 하며 미소 지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말에 메이아가 웃자 기분이 좋아졌다.

    더 웃게 해 주고 싶었다.

    “알았어요.”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심장이 또 아파졌다.

    솔직히 밤을 새우며 그녀가 나올 때까지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었다. 바로 쥬안 때문이다.

    “이제 돌아가십시오, 대공 각하.”

    방문 앞에서 주저앉은 쥬안을 보고 테오도르는 너무 부럽다는 듯 물어봤다.

    “쥬안은 여기 문 앞을 밤새도록 지키는 거지?”

    “그렇습니다.”

    “부럽다.”

    쥬안이 미치도록 부러운 테오도르였다. 그리고 쥬안은 그렇게 말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테오도르가 자리를 떠나자 방 안에 있던 메이아는 쥬안을 불렀다. 그리고 편지 한 통을 건네며 말했다.

    “유디에게 편지를 전해 주고 와.”

    “알겠습니다.”

    그림자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쥬안에게 깜짝 놀랐던 유디는 메이아의 편지를 읽고 충격에 빠졌다.

    “이게 무슨 말이니? 쥬안! 아가씨가 약혼이라니?”

    쥬안은 참기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약혼…… 하십니다.”

    유디는 쥬안의 등을 사정없이 양손으로 때렸다.

    퍽퍽.

    “넌 대체 아가씨 곁에서 뭐 한 거야!”

    “여전히 손이 맵습니다, 유디 님.”

    쥬안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루만의 허락을 받아 약혼서에 인장을 찍은 이야기를 듣던 유디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헬레나 불러올 테니까 기다려.”

    쥬안이 메이아의 편지를 들고 왔다는 말에 헬레나는 모든 일을 내던지고 왔다.

    그리고 메이아의 편지를 읽은 뒤 유디와 똑같이 쥬안의 등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퍽퍽퍽.

    “거기, 맞았던데……. 쿨럭!”

    “넌 대체 아가씨 곁에서 뭐 한 거야? 어떤 놈팡이야! 말해!”

    쥬안은 흐르는 코피를 손가락으로 닦으며 말했다.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이십니다.”

    “뭐?!”

    “뭐라고!”

    메이아의 약혼 상대를 알게 된 유디와 헬레나는 어버버했다. 플로렌스 대공이라면 시리우스 제국의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 대공비가 된다면 카르펜 제국의 황제라도 메이아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 정도는 나쁘지 않지만…….”

    “카르펜 황제보다 높은 위치니까.”

    “하지만 그거 가지고는 안 돼!”

    헬레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쥬안,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최신판 62가지 약혼자 테스트는?”

    “통과하셨습니다.”

    “제대로 한 거 맞아?”

    “플로렌스 대공 각하는 진심으로 아가씨의 시중을 들고 싶어 합니다.”

    “진짜야?”

    “유람선 위에서도 아가씨에게 직접 딸기 차를 만들어 따라 주셨습니다.”

    “뭐?”

    “제가 아가씨가 좋아하는 딸기 차 타는 방법을 알려 드렸는데, 아주 그대로 하셨습니다. 그것도 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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