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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98화 (98/163)

98화

“황태자 전하는 사람들 앞에서 날 망신시켰어요. 그분과의 국혼을 원하지 않아요! 아빠, 파혼시켜 주기로 하셨잖아요!”

메릴은 흥분해서 ‘파혼’시켜 달라는 부탁만을 루만에게 쏟아 냈다.

“황태자 전하가 너에게 굉장히 미안하다면서 사과하고 싶다고 하시더구나. 앞으로 너한테 잘한다고 했다.”

메릴은 눈물을 흘리며 루만에게 사정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아빠, 제발 파혼시켜 주세요, 흑흑.”

메릴은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루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메릴, 네가 황태자비가 된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황궁 예법을 익혀야 한다.”

“아빠는 제가 국혼을 올리고 불행해졌으면 좋겠어요?”

루만은 다정하게 메릴을 다독이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가 너한테 잘한다고 약속했다. 미안하니 사과하고 싶다는 의사도 밝혔다. 머리 숙이고 들어오는데 내가 황태자 전하 멱살이라도 잡고 파혼하자 외칠 수 없지 않으냐.”

메릴은 토마스의 말이 떠올랐다.

<황태자 전하는 하츠벨루아 가문의 힘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고개 숙이고 메릴에게 매달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만에 하나 황태자비가 되시고, 황후가 되시더라도 전 메릴의 숨은 정부로서 살아가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전부를 사랑합니다.>

<난 토마스와 결혼하고 싶어요!>

<저도 메릴과 평생을 꿈꾸고 싶습니다.>

행복한 꿈이 금이 가고 조각나기 시작한다.

“이건 꿈이야.”

토마스와 이루어질 수 없다니! 말도 안 된다.

“싫어.”

오로지 토마스 곁에서 있고 싶은데!

“저는 황태자 전하의 사과를 받지 않을 거예요!”

메릴은 루만에게 큰 소리로 외치며 나갔다.

방으로 돌아온 메릴은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시녀들은 어쩔 줄 모르며 눈치만 살폈다.

“괜히 메이아 자리를 탐냈다가 이게 뭐야, 엉엉.”

“아가씨, 고정하세요.”

“내가 고정하게 생겼어? 국혼 올리게 생겼는데.”

와장창!

“아가씨, 약혼녀 자리 돌려주면 되잖아요!”

한참을 물건을 던지고 망가뜨리면서 짜증을 내며 울던 메릴은 시녀 라라의 말에 울음을 멈췄다.

“라라, 다시 한번 말해 봐.”

“아가씨, 국혼을 올리시기 싫으시면 메이아 아가씨에게 다시 약혼녀 자리를 돌려주면 되잖아요. 황태자 전하는 사랑이 아닌 가문의 힘만 필요로 하시니 메이아 아가씨가 다시 약혼녀가 되신다면…… 메릴 아가씨께서는 국혼 안 올리셔도 되지 않을까요?”

메릴은 서랍장에 있는 보석함에서 보석을 꺼내 라라에게 건넸다.

“받아. 좋은 생각을 한 너에게 주는 상이야.”

라라는 커다란 루비를 바라보며 기쁨으로 얼굴을 붉혔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시녀 라라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이 생각을 못 했던 거지?

파츠래리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가문의 힘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렇다는 건 메이아를 다시 약혼녀 자리에 돌려놓는다면 굳이 파츠래리랑 국혼을 올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물론 황태자비가 되는 메이아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해야겠지만 토마스와 결혼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한다.

메릴은 메이아와 루만이 작성한 자유 결혼서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파혼만 하면 그만이란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메릴은 라라에게 말했다.

“황궁으로 갈 거야! 준비해.”

“알겠습니다, 아가씨.”

메릴은 황궁에 있는 파츠래리를 급하게 만났다. 평소라면 약속을 잡고 오지 않았다며 만나 주지 않으려고 할 테지만, 파츠래리는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루고 메릴을 만나 사과했다.

“메릴 공녀, 저번 일은 미안하게 되었어.”

“사과를 바라고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랑 없는 결혼은 싫습니다.”

“사과를 받아 주지 않을 거면 왜 나를 만나러 온 거지?”

파츠래리의 짜증 가득한 얼굴을 보고 메릴은 더욱 확신했다.

‘절대 결혼하지 않아!’

“제안하러 왔습니다.”

메릴의 입에서 나온 낯선 단어에 파츠래리는 관심을 보였다.

“제안?”

“네.”

“말해 보시오.”

“어차피 전하는 하츠벨루아 공작 가문의 힘이 필요하셔서 파혼을 안 하시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파츠래리는 미간에 진하게 주름이 새겨지면서 한쪽 입술 끝을 올렸다.

“잘 알고 있군. 맞아. 나는 하츠벨루아 공작가의 힘이 필요해.”

“그렇다면 저 말고 메이아와 결혼하세요.”

메릴의 말에 파츠래리는 입을 다물고 억누르고 있었던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하지만 메이아는 카르펜 제국에 없소. 다시 나의 약혼녀가 된다는 보장도 없지.”

“어차피 메이아는 성인식 때 공작저로 올 수밖에 없어요. 그때 메이아를 다시 전하의 약혼녀로 바꾸는 거예요. 걔도 처음에는 거절하더라도 결국에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받아 줄 거예요.”

“왜 그리 자신 있게 말하지? 메릴 공녀.”

“평생 황후가 되기 위해서 모든 걸 건 애가 메이아예요. 그건 사촌인 내가 잘 알아요. 그 애는 황후가 되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예요.”

“하지만 그녀가 날 거절할 수도 있는 거잖아.”

파츠래리는 자신이 마탑에 가서 메이아를 만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메릴에게 슬쩍 부정적인 말을 던져 보았다.

“아니요.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 울면서 사과하고, 매달리면 마음 약한 메이아는 받아 줄 거예요.”

“만에 하나 메이아가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메릴 공녀는 나와 결혼해야 하는데?”

메릴의 제안은 결코 파츠래리에게 나쁘지 않았다. 메이아와 다시 이루어지면 매우 기쁠 것이고, 만에 하나 메이아가 자신을 거절한다면 메릴과 결혼하면 그만인 거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절대 손해를 보지 않을 괜찮은 제안이다.

“몇 번 거절하더라도 결국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운명이라.”

퍽 마음에 드는 단어다. 메이아와 자신은 어릴 때부터 하나로 묶인 운명이다.

한 번의 위기가 와서 헤어졌지만 원래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 하지 않았던가!

파츠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메릴에게 시선을 보내다 이윽고 크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메릴 공녀와 이렇게 대화가 통하는 건 처음이군, 하하.”

“제안을 받아들이실 건가요?”

파츠래리는 실로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으며 메릴에게 답했다.

“좋소.”

“그러면 국혼 날짜를 메이아의 성인식 이후로 미루고 국혼을 준비하는 척만 하죠.”

“그런데 메릴 공녀.”

“네?”

파츠래리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자신을 좋다고 따라다니던 메릴이 한 번의 실수로 확 돌아섰다는 것에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내가 진심으로 사과하는데도 나와 결혼은 싫은 건가?”

“네.”

“왜?”

“저는 절 미치도록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요.”

“귀족들 결혼에 사랑은 없지 않은가.”

“그렇죠. 그렇지만 꿈은 꿀 수 있잖아요.”

파츠래리는 올라오는 웃음을 참았다.

사랑? 자신은 뒤늦게 사랑을 깨달아 메이아를 잡는 거지만, 메릴은 누가 사랑해 줄까?

생각만 하더라도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메릴 공녀. 그 꿈을 꼭 이루게.”

“그러면 계약 성립이네요.”

“메이아가 공작저에 온다면 바로 편지 띄울게요. 단둘이 있을 수 있도록 밀어드리겠습니다.”

“든든하군, 메릴 공녀.”

메릴과 파츠래리는 서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원하는 걸 얻었다는 듯한 만족스러운 짐승의 미소였다.

파츠래리와 메릴은 국혼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정확한 날짜는 성인식날 이후 발표하기로 했다.

국혼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세자르 그리고 파츠래리와 메릴의 막 나가는 불륜 삼각관계에 관한 소문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황제 또한 조용해진 상황을 만족스러워했다. 로베르만은 국혼 날짜까지 정해진 걸 보고 안심되었다. 하지만.

“결국, 쿠룬달스 백작가와 결혼은 없던 걸로 되었군.”

로베르만은 매우 속상했다. 그렇지만 쿠룬달스 백작가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

쿠룬달스 백작가가 하는 사업에 투자하기로 했지만, 백작가는 그거 또한 받지 않는다며 샨트리가와 손을 털었다.

‘그래, 어쩌면 이게 더 나을 수도 있어.’

황태자의 정부라고 소문이 났다. 사교계의 질 나쁜 소문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세자르의 마음에 많은 상처를 냈다.

어쩌면 세자르에게는 ‘결혼’보다는 마음 편한 곳에서 요양을 보내는 것이 나아 보였다.

어차피 쿠룬달스 백작가에 투자하기로 했던 일들은 무산되어 시간과 돈이 남게 되었다.

이참에 그동안 못 갔던 가족 여행을 가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

토마스는 메릴의 국혼 소식에 속으로 욕을 했다.

쾅!

술을 벌컥벌컥 마신 뒤 술병을 집어 던지며 토마스는 짜증을 토해 냈다.

옆에 있던 토마스의 친구 페렐은 그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하츠벨루아 공작 가문이라고! 황태자도 미치지 않은 이상 파혼하겠어? 키키.”

“페렐, 넌 닥쳐.”

토마스는 한순간 하츠벨루아 공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빠지며 즐거워했다. 그 꿈이 와장창 깨져 버렸지만 상관없다.

예비 황태자비라는 돈줄을 거머쥐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토마스.”

“받아낼 수 있는 만큼 받아 내야지.”

그동안 몸으로 봉사한 값을 톡톡히 받아 낼 생각이다. 받아 낼 시기는 다행히 빨리 다가왔다.

메릴은 메이아로부터 자선 경매에 물품 기부를 부탁받은 일을 상담했고, 자연스레 자신이 도와주기로 했다.

어차피 멍청한 메릴은 모를 것이다.

판매로 벌어들인 이득이 100만 골드면 10만 골드라고 말해도 믿을 여자이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토마스. 걱정했는데.>

<사랑하는 이의 고민을 제가 해결해 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토마스…….>

메릴은 울며 안겼다. 토마스는 짜증이 났다.

하츠벨루아 공작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그래도 티를 낼 순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메이아가 오면 난 토마스의 신부가 될 수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중에 알려 줄게요. 지금은 날 어서 안아 줘요.>

토마스는 메릴의 유혹적인 말에도 몸이 동하지 않았다.

<잔뜩 안아 드리고 싶지만, 오늘 아버지가 빨리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네?>

<제가 쿠룬달스 백작가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저번에도 늦게 갔다가 크게 혼이 났습니다. 백작가 일을 처리 안 하고 뭐 했느냐면서요.>

토마스 괴로운 표정으로 한숨을 토해 내며 말했고, 메릴은 그를 측은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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