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파츠래리는 하츠벨루아 공작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루만을 만났다.
“황태자 전하께서 여기 어인 일이십니까?”
“샨트리가와의 일 때문에 왔네.”
“사과하지 않을 겁니다.”
“메릴이 먼저 폭력을 행사한 건 잘못한 일이야.”
사랑스러운 메릴에 대한 지적을 받은 루만은 뻘게진 눈을 치켜들며 파츠래리에게 따지듯 물어보았다.
“그것보다 세자르 영애가 황태자 전하의 정부라는데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아니야.”
“그렇다면 왜 그때 우리 메릴을 챙기지 않으신 겁니까?”
“세자르 영애는 메릴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쓰러졌어! 나도 모르게 쓰러진 사람을 챙겼을 뿐이야.”
“안일한 행동이십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챙기지 않아도 쓰러진 세자르 영애는 시녀들이 챙겼을 텐데, 뭐 하러 챙기신 겁니까? 이 일로 메릴은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메릴 공녀가 세자르 영애를 때리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네.”
“제가 메릴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맞을 짓을 했더군요. 전 샨트리가에 사과할 일 없습니다! 일이 있으니 이만 나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음부턴 약속을 잡고 와 주십시오.”
“가기 전에 물어볼 말이 있네. 메릴 공녀는 이번 일로 파혼을 원하는가?”
파츠래리의 말에 루만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원한다면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렇지만 파츠래리 입에서는 ‘그렇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만에 하나 메이아가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어쩌나 하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메이아를 원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거절했다. 물론, 계속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만에 하나 그녀가 끝까지 받아 주지 않는다면?
메이아도 잃고, 메릴도 잃는다면 황태자 자리는 위태롭다.
그러니 메이아의 마음을 돌려놓은 다음에 파혼해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히 생각하자, 파츠래리.’
“전하, 메릴이 파혼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황후 마마와 이야기할 문제입니다.”
“메릴 공녀가 나 때문에 실망을 많이 한 것 같아 미안하게 생각하는 중이라네, 공작.”
파츠래리의 미안하다는 말에 루만의 기분은 한결 가라앉았다. 잘못한 걸 알고 있으니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메릴 공녀를 만나 사과하고 싶네.”
어찌 되었건 약혼녀를 두고, 다른 영애를 챙긴 건 잘못된 행동이니 사과해야 하는 것이 맞다.
“크흐흠, 그러면 메릴에게 오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메릴은 오지 않았다.
“메릴이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음을 기약하시지요, 전하.”
“샨트리 백작이 아바마마에게 직접 가문 대 가문 사과 요청을 올렸기 때문에 한 번은 와야 하네.”
“어차피 사과할 일 없습니다.”
루만은 절대 고집을 꺾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파츠래리는 긴 한숨을 쉬며 샨트리가를 찾아갔다. 두 가문의 화해를 위해 파츠래리를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날 날이 정해졌다.
회의실로 들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몹시 무거웠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샨트리 백작과 하츠벨루아 공작이 서로를 노려보며 원수 보듯이 하고 있었다. 파츠래리는 의자에 불편한 표정으로 앉았다.
그리고 로베르만과 루만의 기나긴 말다툼이 오고 갔다.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파츠래리는 그때마다 테이블 위에 손을 탕탕 내려치고 그들을 말리며 진정시킬 뿐이었다. 루만에게는 메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보여 줘서인지 한결 누그러진 상황이지만 로베르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사교계에서는 황태자의 정부가 세자르 영애라고 소문이 파다하다.
그 사실을 알고 메릴이 뺨을 때린 것이라며 부풀어진 소문들이 널리 퍼져 버렸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신의 안일한 언행으로 이렇게 큰일을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후회막심하다. 드래곤을 찾아가서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써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샨트리 백작이 원하는 게 무엇이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주실 겁니까?”
로베르만의 말에 파츠래리는 입을 닫았다. ‘들어주겠다’라는 말을 하는 순간 정말 약속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입을 닫은 파츠래리를 보며 로베르만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저희 샨트리가에서 원하는 건 간단한 겁니다.”
“말해 보게.”
“어차피 하츠벨루아 공작은 사과하지 않으실 거고 저 또한 사과할 마음 없습니다. 하지만 제 사랑스러운 딸, 세자르는 추문에 휩싸였죠. 그렇다면 그 추문을 없애면 되는 일입니다.”
“추문을 없애?”
“메릴 공녀와 황태자 전하께서 국혼을 올리시는 겁니다.”
“국혼을?”
황제와 똑같은 말을 하는 로베르만을 파츠래리는 빤히 쳐다봤다.
로베르만 말을 들은 루만은 헛기침을 했다. 메릴이 파혼하고 싶다고 했지만 황태자비의 자리는 확실히 탐이 나는 자리 아닌가!
메릴이 황후가 된다면 진행 중인 사업들도 더욱 부흥하게 된다.
딸을 잘 달래면 되지 않을까? 루만은 메릴이 황태자비가 되었을 때 가져다주는 이익을 생각했다.
로베르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웃는 얼굴로 파츠래리에게 머리를 숙였다.
“감히 국혼까지 올렸는데 함부로 말하는 자들은 황족 명예 훼손죄로 엄벌을 내리시면 될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우리 세자르에게 쏟아지는 더러운 삼각관계 소문은 없어질 겁니다. 그것이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국혼을 하게 된다면 메이아를 영영 붙잡을 수 없다.
“저와 하츠벨루아 공작이 싸우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황태자 전하께서 티 파티에서 우리 세자르를 챙겼기 때문입니다. 약혼녀를 내버려 두시고 그러니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로베르만은 앞에 앉아 있는 루만에게 물었다.
“하츠벨루아 공작님도 제 말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하네.”
파츠래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의 표정을 보고 로베르만은 고소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약혼녀인 메릴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건 진작에 눈치챘다.
평소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국혼 이야기에 인상이 구겨진 걸 보니 로베르만은 그걸로 속이 약간 풀리는 걸 느꼈다.
“그렇다면 국혼을 올리셔서 소문을 잠재워 주시기 바랍니다.”
그 시각, 하츠벨루아 공작저.
“메릴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쿠룬달스 백작 영식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 빨리 이야기해 줬어야지! 얼른 날 예쁘게 꾸며.”
토마스가 왔다는 사실에 메릴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평소보다 더 신경 써 아름답게 꾸미고 토마스가 기다리는 응접실을 빠른 걸음으로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토마스를 보니 절로 메릴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시녀들은 일사불란하게 다과와 차를 올린 뒤 사라졌다. 응접실 안에는 메릴과 토마스 단 둘뿐이었다.
“메릴.”
“네, 토마스.”
토마스는 부끄럽다는 듯 빨개진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께서 샨트리 백작가와의 혼담을 취소할 것 같습니다.”
메릴에게 아주 기쁜 소식이었다.
“정말 잘됐네요.”
메릴은 기쁜 얼굴로 토마스 옆에 앉아 그의 어깨에 기댔다.
토마스는 자신의 어깨에 기댄 메릴을 사랑스럽다는 듯 끌어안았다.
“저도 아버지한테 이야기했어요. 파혼하고 싶다고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메릴의 정부로 살아도 되는데.”
토마스의 말에 메릴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싫어요! 토마스.”
토마스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제가 정식으로 쿠룬달스 백작이 된다면 억지로 정략혼을 할 필요가 없을 텐데 비참하군요.”
토마스는 괴로운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어릴 때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그걸 모두 제 탓이라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절 미워하시죠.”
“쿠룬달스 백작님께서요?”
토마스는 메릴에게 쿠룬달스 백작이 얼마나 악독하게 자신을 괴롭혔는지 말했다.
“정말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요!”
“가끔 아버지가 없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 저 자신이 스스로 너무 싫어집니다.”
“토마스.”
“제가 여기 온 것을 아버지가 알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매질을 당할지도 모르지만 전 세자르 영애와 정략혼을 하지 않게 되어 기쁩니다. 이 기쁨을 메릴과 함께하고 싶어 왔습니다.”
토마스의 뺨 위에 굵은 눈물 한두 방울이 흘렀다. 쿠룬달스 백작에게 매질 당할 것을 각오하고 온 그의 진심 어린 호소에 메릴은 감동했다.
“토마스, 사랑해요.”
“아, 메릴……! 나의 유일한 여신.”
“토마스.”
둘은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
메릴은 토마스와 결혼하는 상상을 하며 행복해했다. 그리고 한편 토마스는 하츠벨루아 공작이 되는 꿈을 꾸었다. 물론 메릴이 파츠래리와 국혼을 올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이득이다. 그냥 백작이 되느냐, 공작이 되느냐 차이일 뿐이다.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습니다, 메릴.”
“저도요. 토마스.”
메릴은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기분에 얼른 파혼을 해야겠다며 다짐했지만, 황궁에 다녀온 루만의 말에 꿈이 깨졌다.
“아빠! 뭐라고요? 파혼이 안 된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말이다, 메릴.”
루만은 로베르만 그리고 파츠래리와 나누었던 대화에 관해 설명했다.
“파혼하고 싶었다면 메릴 네가 조금만 참았어야 했다.”
메릴은 분하다는 듯 말했다.
“그 일 때문에 황태자 전하가 얼마나 재수 없는 사람인지 알게 되었으니 전 세자르 영애 때린 걸 후회하지 않아요. 황태자 전하는 절 싫어해요! 그리고 저도 그분이 싫어요! 파혼하고 싶어요!”
토마스와 행복한 결혼을 꿈꾸고 있는 메릴에겐 국혼이란 비참함만을 줄 뿐이었다.
그의 뜨거운 품, 다정한 눈빛, 사랑스러운 말과 입맞춤.
그리고 귀여운 아이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쿠룬달스 백작 부인으로 사는 삶을 꿈꾸고 있다.
그렇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파츠래리와의 파혼이 먼저다.
그런데? 당연히 파혼될 줄 알았는데 반대로 국혼을 올리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