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흑, 아빠.”
숨죽이며 눈물 흘리는 메릴의 모습에 루만의 눈동자에 난감함이 스쳤다.
“제가 루루나 마마의 티 파티에서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아시나요? 죽고 싶을 정도로 모욕을 당했단 말입니다!”
“울지만 말고, 무슨 일인지 정확히 이야기해 보아라. 도대체 왜 싸운 것이냐?”
“흑으엉엉.”
루만은 울고 있는 메릴의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울음을 멈춘 메릴은 입을 열었다.
“세자르 영애가 사람들 앞에서 저를 동생 약혼자나 빼앗은 나쁜 사람으로 몰아갔어요.”
“뭐라고?!”
“루루나 마마는 계속 메이아를 황자비로 맞이할 거다, 데미안 황자님이 황태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루만은 메릴의 말을 들으며 분노했다.
“전 모욕당했고 하도 화가 나서 세자르 영애의 뺨을 때렸어요. 때린 건 잘못한 거 맞아요. 그런데 그때 마침 황태자 전하께서 들어오셔서 세자르 영애를 꼭 껴안고 저에게 근신하라며 윽박지르신 후에 나가셨어…… 어요, 흑흑.”
“그게 사실이냐?!”
루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황태자 전하는 사람들 앞에서 절 내팽개치고, 소리 지르고, 세자르 영애를 꼭 껴안으셨단 말입니다!”
귀하고 귀한 자신의 딸이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루만은 집사를 불렀다.
“당장 황궁으로 간다!”
“준비하겠습니다.”
아무리 황태자라 해도 메릴을 상처입히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루만은 끓어오르는 노여움을 억누르며 이를 갈았다.
황궁에 들어갔지만 루만은 파츠래리를 만날 수 없었다.
대신 복도에서 마주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세자르 영애의 아버지인 샨트리 백작이었다.
샨트리 백작은 불편한 기색이 분명한 얼굴로 루만에게 인사했다.
“샨트리가의 로베르만입니다.”
루만은 인사하는 로베르만에게 말했다.
“세자르 영애 교육을 어떻게 한 건가!”
다짜고짜 딸아이를 건드리는 루만에게 로베르만은 격양된 채 말했다.
“제 딸아이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약혼녀가 있는 황태자 전하를 만나는 것부터가 잘못이란 걸 샨트리 백작은 정녕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저희 딸아이는 절대 황태자 전하와 만나는 사이가 아닙니다.”
로베르만의 말에도 루만은 자기 할 말만 했다.
“세자르 영애는 메이아가 약혼녀일 때도 만났나?”
로베르만은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니라면 왜 황태자 전하가 메릴 앞에서 세자르 영애를 껴안았단 말인가!”
“하츠벨루아 공작님!”
로베르만은 날카로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더는 샨트리 백작가를 모욕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스러운 딸 세자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딸이다.
우락부락한 아들 녀석들만 바글바글한 샨트리가를 밝히는 등불 같은 존재다.
그런데 루루나의 티 파티에서 메릴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뺨을 맞았다는 소리에 제정신으로 있을 아버지가 몇이나 있겠는가!
당장 끼고 있는 흰 장갑을 벗어 루만의 얼굴에 날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모욕이라고 했소? 샨트리 백작. 모욕은 우리 메릴이 당했는데!”
파츠래리가 티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세자르를 껴안아 버린 덕분에 세자르는 더러운 삼각관계 소문에 휩싸였다.
<아버지, 절대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와 개인적으로 만난 일도 없습니다! 저도 왜 황태자 전하께서 절 껴안고 티 파티 장소를 나가셨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분간 집에 있거라, 세르.>
말없이 우는 딸 아이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파츠래리를 만나러 왔지만, 그는 부재중이었다.
되돌아가려는 찰나, 하츠벨루아 공작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중한 사과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메릴의 잘못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오히려 세자르를 모욕하는 루만에게 로베르만은 매우 화가 났다.
“샨트리 백작, 난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겁니다.”
“저희 샨트리가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아니, 잘못은 세자르 영애가 했는데, 뭘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이오?”
로베르만의 루만의 말에 기가 차서 숨을 쉴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세자르는 절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릴 메릴이 잘못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뭐라고?!”
둘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지나가다 사람들은 힐끔거리며 구경했다.
“우리 세자르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먼저 시비 걸고 싸운 건 메릴 공녀입니다!”
“먼저 모욕을 준 건 세자르 영애라네!”
로베르만은 루만의 뻔뻔한 언행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진실을 이야기했다고 그게 모욕이 되는 것입니까? 메릴 공녀는 툭 하면 주먹질하시는 거 아십니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메이아 공녀님께서 약혼녀 자리에 계실 때 이런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평화로운 사교계였단 말입니다!”
결국, 다들 쉬쉬거리던 문제를 로베르만은 결국 터뜨리고 말았다.
“지금 뭐라고 했나? 샨트리 백작!”
로베르만은 외쳤다.
“우리 세자르는 곧 쿠룬달스 백작 영식과 결혼을 앞두고 있단 말입니다. 왜 황태자 전하를 만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생각이 있으시다면 황태자 전하를 찾아뵙고 그 사유를 여쭤봐야 하는 것이 먼저 아닙니까?”
“결혼을 앞두고 있어도 바람을 피울 수 있지.”
로베르만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폐하께 요청하여 하츠벨루아 가문에 가문 대 가문 사과를 요청하겠습니다.”
루만은 로베르만의 이야기를 듣고, 기가 막힌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하츠벨루아 공작님, 이게 웃긴 상황으로 보이십니까?”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은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며 등을 돌렸다.
*
카르펜으로 돌아간 파츠래리는 황궁 안이 발칵 뒤집혔다는 소식에 비틀거렸다.
로베르만과 루만의 싸움 소식이었다.
당황하는 보좌관의 보고를 받던 중 황제의 부름을 받고 알현실로 갔다.
“카르펜 제국의 위대한 태양이신…….”
“시끄럽다!”
파츠래리를 보자마자 황제는 격노하며 옆에 있던 깃펜을 그에게 던졌다.
“마탑에 갔다고?”
“……네.”
마탑에 간 이유는 단 하나일 거다. 바로 메이아 때문이다.
“흘러간 강물을 억지로 끌어 올리면 흙탕물이 될 수밖에 없을 거야, 황태자.”
황제의 뜻이 뭘 말하는지 안다. 더는 메이아에게 집착하지 말라는 것, 계속 집착하다 보면 미래가 없다는 뜻이다.
“얌전히 메릴 공녀와 얼른 국혼을 올리거라.”
황제의 말에 파츠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렇게 되면 메릴이 먼저 파혼하자고 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네가 국혼을 올려야지만 이 시끄러운 소문도 빠르게 가라앉을 것이다.”
파츠래리는 루루나의 티 파티에서 벌인 섣부른 행동 때문에 세자르까지 끼워서 원치 않은 삼각관계를 만들고 말았다.
온갖 추문에 휩싸이게 되면서 황족의 위엄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 메이아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녀가 다시 약혼녀가 된다면 금방 가라앉을 소문이다.
하지만 황제의 말 또한 틀린 건 아니다. 세자르 영애를 먼저 챙긴 일을 해프닝이라고 하고 메릴을 너무 사랑해서 국혼을 올리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소문은 빠르게 잠잠해질 것이다.
영애들 싸움에서 다친 영애를 먼저 챙긴 황태자. 그리고 그걸 이해해 주는 약혼녀 메릴 공녀로 사교계의 소문을 잡겠다는 황제의 뜻이기도 했다.
“황태자, 만약 메릴 공녀와 파혼하게 된다면 소문은 더욱 추잡하게 날 것이고, 그로 인해 황족의 위엄이 추락할 것이다.”
“하지만 아바마마, 저는 메이아 공녀를…….”
“황족이나 귀족으로 태어난 이상 사랑하는 사람하고 사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거다, 파츠래리 폰 마브로.”
“아바마마.”
“내가 황후랑 후궁들을 진정 사랑해서 가까이 두는 줄 아느냐? 권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할 뿐이지. 내가 진정 사랑했던 여인은 가슴속에 묻었다. 그게 황제로서 살아가야 할 삶이다.”
황제의 표정은 근엄하며, 단호했다.
“늦게 깨달은 사랑은 가슴에 묻거라.”
“하지만! 아바마마.”
“너는 루루나의 티 파티에서 세자르 영애 대신 메릴 공녀를 안고 나왔어야 했다. 네가 별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큰일이 되어서 돌아왔는지 보고도 모르는 게냐! 샨트리 백작가는 대표 황제파인데 네가 네 손으로 그 세력을 자르는구나!”
“전 메이아 공녀를…….”
“메이아 공녀가 네 황태자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냐? 샨트리 백작가와 하츠벨루아 공작가는 네가 황태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가문이다. 물론 하츠벨루아 공작가 힘이 더 필요하지만.”
이제 막 사랑이란 걸 깨달았다. 메이아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모든 걸 버리고 저와 함께 떠나 주실 수 있나요?>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졌다.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만 같았다.
“파츠래리, 너는 메릴 공녀와 국혼을 올린다.”
황제의 말에 파츠래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바마마! 그만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메릴 공녀와 국혼을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황태자, 이제 와서 메이아 공녀와의 파혼을 후회하는 거냐?”
“그렇습니다. 후회합니다.”
“그래서 항상 조심해야 한다. 세 번, 다섯 번, 열 번을 생각하고, 또 의심하고, 또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또 의심하다 결정해야 한다. 그렇게 신중하게 선택해도 항상 후회가 생기는 법이지.”
후회하는 아들을 불쌍하게 봐 달라는 듯한 눈빛으로 파츠래리는 황제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황제는 입을 열었다.
“되돌릴 수 없을 때 후회란 것을 느끼는 거다. 황태자, 국혼을 준비하라고 내가 황후에게 일러 놓겠다.”
홀로 방으로 돌아온 파츠래리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 창문 밖을 바라봤다.
단 한마디도 못 했다.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이 상했다. 시간만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다. 계속 메이아와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 말해도 오히려 황제의 노여움만 샀다.
그것보다 더 미칠 상황은 국혼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샨트리가가 가문 대 가문 사과 요청을 올렸다. 이 일은 네가 자초한 일이니, 네가 샨트리가와 하츠벨루아가 사이를 해결하거라.>
<아바마마!>
황제는 파츠래리에게 냉담하게 말했다.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파츠래리는 다시 황궁을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하츠벨루아 공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