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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95화 (95/163)
  • 95화

    테오도르는 메이아가 어쩌면 파츠래리와 함께 카르펜 제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파혼하자고 하면.’

    “으윽.”

    테오도르는 힘겹게 숨을 헐떡이며 왼쪽 가슴을 꾹 눌렀다.

    ‘상사병 증상이.’

    메이아와 지내면서 잊고 있었다.

    이 아픔을…… 이 고통을!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따끔거림과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은 숨을 참아도 계속 느껴졌다.

    흐르는 식은땀만이 그가 느끼는 고통의 극심함을 잘 보여 주었다.

    의원 워스트는 상사병의 고통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메이아의 미소를 떠올린다거나 인물화를 본다거나 아니면 직접 얼굴을 봐야지만 아픔이 가라앉는다고 이야기했었다.

    테오도르는 첫 번째로 메이아를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조금 전에 만났던 파츠래리의 음흉한 눈빛과 질척거리는 말들이 자꾸 떠올랐다.

    자리에 주저앉아 심장 부근을 꾹꾹 누르며 테오도르는 눈을 감은 채 파츠래리를 잊고 메이아의 미소만 떠올리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테오?”

    눈을 감고 너무 집중한 탓일까?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테오!”

    눈을 감고 끙끙거리던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실눈을 뜨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메이……?”

    메이아를 보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릴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입술 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가까이 다가온 메이아는 걱정스레 테오도르를 살피며 말했다.

    “약혼자님, 괜찮으세요?”

    메이아의 약혼자님이라는 단어에 테오도르의 눈가가 점점 붉어졌다.

    “네, 약혼녀님.”

    코앞까지 다가온 메이아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한 테오도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홀린 듯 그녀와 입술을 겹쳤다.

    “으읏.”

    넘치는 애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다시 한번 입술을 덮쳤다.

    두 사람은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얽혀 오는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단호하게 말하는 메이아를 파츠래리는 끝까지 잡을 수 없었다.

    <절 정말 사랑한다면 황태자 자리를 버리고 와 주세요.>

    <버릴 수 없다는 걸 그대가 더 잘 알지 않소.>

    <저는 이젠 혼자입니다. 모든 걸 버리고 제 편에 서 줄 수 있는, 그리고 사랑을 주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녀의 바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은 황태자 자리를 버릴 수 없었다.

    진정 사랑한다면 모든 걸 내려놓으라는 그녀의 말에 파츠래리는 쉽사리 답을 줄 수 없었다.

    <그대만 바라보고 사랑하겠어.>

    <파혼하기 전에 그런 말씀을 해 주셨더라면.>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황태자 자리를 지켜야 해.>

    <무엇으로부터 저를 지켜 준다는 것이지요?>

    <모든 것으로부터 지켜 주겠어.>

    황태자 자리를 지킴으로써 메이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절대 황태자 자리를 버릴 수 없다.

    황태자 자리를 버리는 순간 데미안이 그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고, 간악한 데미안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파츠래리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지금 메이아는 화가 나 있다.

    단 한 번의 용서로 자신을 받아 주지 않을 거란 걸 예상했다.

    그렇다고 이렇게나 매몰차게 고개를 돌릴 줄은 몰랐다.

    황태자 자리도, 메이아 그녀도 둘 다 포기할 수 없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붙잡을 거다.

    그녀는 상냥하고, 배려심 있고, 마음이 여리다.

    분명 다시 돌아와 황태자비가 되고 자신만의 황후가 될 것이다.

    “휴우.”

    메이아에게 거절당하고 나가는 길에 파츠래리는 푸링과 마주쳤다.

    “가시는 거군요, 황태자 전하.”

    “내일 다시 오겠네.”

    미련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파츠래리를 본 푸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미 메이아는 플로렌스 대공과 약혼했다.

    테오도르와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짓는 메이아를 보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공작저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본 순간 푸링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일부터 마탑을 오셔도 공녀님을 만나실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푸링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파츠래리에게 말했다.

    “마탑에 들어온 의뢰를 받고 떠나실 예정입니다. 지금쯤이면 떠나셨을 겁니다.”

    푸링의 말에 파츠래리의 표정이 심각하게 어두워졌다.

    “메이아가 마탑 마법사로 등록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녀는 언제부터 마탑의 마법사로 등록되었나?”

    “도착한 당일이셨습니다.”

    “그렇군.”

    파츠래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서서히 힘을 뺐다.

    “그녀가 나에게 많이 화가 난 모양이군. 내가 온 날 갑자기 의뢰를 받고 떠나다니.”

    “그게 아니.”

    푸링은 자신이 하는 말을 자르며 자기 할 말만 하는 파츠래리를 실눈을 뜨고 쳐다봤다.

    “하아……, 어떻게 하면 그녀 마음을 풀 수 있는 건지. 그녀는 언제 돌아올 예정이지?”

    “모릅니다.”

    “무슨 의뢰를 받고 나간 거지?”

    “장기 의뢰입니다.”

    “역시 그녀는 날 피하는 거야.”

    푸링은 ‘아니라고!’라며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지만, 답을 정해 놓고 말하는 파츠래리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

    “테오, 무슨 일 있었어요?”

    자신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는 그의 표정은 보기 좋았지만 검은 눈동자에는 초조함이 엿보였다.

    메이아의 말에 테오도르는 마음속 불안감을 누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테오의 미소, 평소보다 부자연스러워요.”

    테오도르는 손끝을 꾹 쥐고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아까 카르펜의 황태자를 만났습니다.”

    파츠래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메이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저에게.”

    테오도르는 파츠래리와 있었던 대화들을 메이아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제가 카르펜으로 돌아갈지도 몰라 불안하셨던 거예요?”

    테오도르는 자신의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렸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쥔 채 눈을 감았다.

    “저는 평화를 좋아하지, 전쟁은 싫어합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나쁜 생각을 했습니다.”

    테오도르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메이아가 나고 자란 카르펜 제국하고 벌이는 전쟁을 상상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았던 소중한 고향일 텐데, 당신에게 소중한 건 나한테도 소중한 건데. 전쟁을 생각한 저 자신이 너무 추악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말하는 테오도르는 진지했고, 진심이 담겨 있다.

    “이게 바로 질투심이라는 것이겠죠.”

    그의 말은 애달프면서도 씁쓸하고 괴로워 보였다.

    아름다운 입술을 비틀고 검은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속내를 털어놓는 그가 밉지 않다.

    오히려 질투했다는 점에서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이젠 서로 약혼 관계까지 성립되었는데 아직도 자신이 떠날까 봐 불안해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메이아는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이마와 뺨을 만지며 자신을 보게 하였다.

    “테오, 날 봐요.”

    어쩔 줄 모르는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봤다.

    “예전에 저에게 이야기했었죠? 제 곁에 있으면서 사랑하게 만들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테오는 어디 있나요?”

    테오도르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군가 제게 양 갈래 길 중에 한 곳을 가라고 가리키며 강요하더라도 저는 제가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할 거예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세상은 멈췄고, 목적을 잃었다.

    “내가 선택한 사람은 테오예요.”

    황후의 자리? 지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쉽게 포기한 이유는 황후가 되더라도 기쁘게 웃어 줄 부모님이 이젠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걸 손을 놓아 버리니 어디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길을 잃었다. 아니, 지도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멈췄던 걸음을 다시 걷게 해 주고 웃으며 손을 내민 건 테오도르다.

    사람이 사람에게 손을 내민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손을 내미는 사람 또한 없다. 하지만 테오도르의 애정엔 ‘조건’이 없다.

    “나에게 그 어떠한 존재도 당신과 비교할 수 없어요. 그 어떤 조건이라도 테오와 바꾸지 않을 거예요.”

    메이아의 말을 듣던 테오도르는 그제야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남들이 마음대로 말하고 다녀도 나 자신에 대한 마음을 낮추지 마세요, 테오도르 플로렌스.”

    메이아의 말에 테오도르의 초조함과 다급함, 질투심, 불안감 같은 감정들이 뜨거운 불에 태워지는 종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슴 안에 달콤한 설탕이 한가득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미소를 짓는 테오도르는 메이아를 끌어안아 무릎 위로 걸터앉게 하며 물었다.

    “입 맞춰도 됩니까?”

    메이아는 강한 어조로 답했다.

    “내 입술에 키스할 수 있는 남자도 테오밖에 없어요.”

    그의 뜨거운 시선을 마주치자 온몸이 전율했다. 뜨거운 숨결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 제 17년 인생 중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제가 메이를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은데 오히려 메이가 저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서로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살며시 입술을 맞대자, 뜨거운 감촉이 느껴졌다. 달콤한 딸기를 베어 물듯 서로의 입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오늘따라 자극이 심했다.

    메이아는 숨을 헐떡이며 테오도르의 옷을 움켜쥐었다.

    입술 사이로 달콤하게 혀가 감겨들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긴장감을 느끼게 했지만 그만큼 따뜻함을 주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입맞춤이지만 심장은 격렬하게 고동쳤다.

    “으음.”

    심장이 시끄럽게 쿵쾅댔다. 숨을 삼켰다.

    서로의 몸이 밀착될 때마다 얼마나 서로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

    루만은 응접실을 나오면서 테오도르와 간단한 대화와 인사를 한 뒤 마탑을 빠져나왔다.

    메이아가 데미안과 결혼하는 것보다는 타국의 귀족과 결혼하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인 건 맞다. 그렇지만 플로렌스 대공비가 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으,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플로렌스 대공비라니!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카르펜 제국의 황제라도 플로렌스 대공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 아무리 메이아가 자신에게 건방지게 굴어도 참아야 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설마 복수하려고?’

    황태자의 약혼녀 자리를 메릴에게 준 것을 메이아가 ‘뺏겼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루만은 더는 생각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타국의 대공비가 되는 메이아다. 곧 영영 안 볼 사이다.

    “하아…….”

    루만은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얼른 공작저로 돌아가 쉬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공작저에 도착해도 편하게 쉴 수 없었다.

    메릴이 루루나의 티 파티에서 세자르 영애의 머리채를 잡고 싸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깜짝 놀란 루만은 바로 메릴을 불렀다.

    “대체 무슨 일이냐? 싸우다니?”

    “그게…….”

    루만은 가뜩이나 메이아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아 메릴에게 언성을 높이며 다그쳤다.

    “내가 제발 참아 달라고! 싸우지 말라고 부탁을 했는데 머리채를 잡고 싸워?”

    루만의 다그침에 메릴의 볼에선 굵은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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