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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94화 (94/163)

94화

테오도르는 그의 말은 전혀 의미 없다는 듯 대꾸했다.

“꿈꾸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시간’입니다. 시간이 없다면 노력해 보았자 ‘실패’할 뿐이죠.”

파츠래리는 테오도르를 노려보았다.

테오도르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무언가를 지독히 원한다면 ‘노력’이 아니라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이름 모를 영식.”

파츠래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자네 어느 제국의 영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귀족 영식이 아니라네.”

테오도르는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셨군요. 그러면 평민이십니까? 평민치곤 옷차림이 귀족들이 입는 거라……. 부자 평민이시군요.”

그의 말에 파츠래리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갔다.

여기서 ‘나는 평민이 아니라 황태자다! 평민 아니고 황족이란 말이다!’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파츠래리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신중히 말했다.

“눈치가 상당히 없군.”

‘너 나를 잘못 봤어!’라고 돌려 말하는 뜻을 테오도르도 모르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그의 가벼운 도발이 우습고 유치해 보였다.

꼭 자기 자신은 굉장히 높은 자리 사람이니 알아서 눈치껏 기라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너야말로 눈썰미 없는 것 같은데?”

쾅!

파츠래리는 손을 테이블 위에 세게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격노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별거 아니라는 눈빛으로 쳐다만 볼 뿐이었다.

“무엄하고, 무례하다.”

파츠래리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애써 분노를 가라앉혔다.

*

푸링은 마탑의 입구를 지키는 마법사 클로에로부터 파츠래리가 마탑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고했어, 클로에.”

마법구를 끈 푸링은 골똘히 생각했다.

그가? 대체 왜? 메이아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마탑 의뢰를 할 것 같지는 않아 푸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찾아온 이유는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

이미 끝난 인연인데 그는 미련을 가지고 마탑까지 와서 메이아를 찾다니.

파혼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그 약혼이 후회되어 와서 매달리는 파츠래리의 모습이 푸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메이아에게 매달리는 게 아닌 또 다른 이유로 찾아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푸링이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응접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언성 높이며 곧 싸울 기세의 파츠래리와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두 남자는 푸링을 발견하고 조용해졌다.

푸링의 입장에서는 두 남자 중 지위가 더 높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다.

당연히 푸링이 테오도르에게 먼저 다가가려는 찰나, 그는 턱짓으로 파츠래리를 가리켰다.

자신에게 먼저 인사하지 말고 파츠래리에게 먼저 인사시키라는 듯한 제스처였다.

푸링은 고개를 끄덕이며 파츠래리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

“마법사 푸링, 카르펜 제국의 다음 태양이신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푸링, 오랜만이군.”

인사를 받은 파츠래리는 빛나는 눈빛으로 테오도르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음에도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많이 놀라서 굳은 모양이군.’

파츠래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테오도르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가 왜 자네한테 눈썰미가 없다고 말한 것이 이제 이해가 되었나?”

그리고 푸링은 바로 말을 이어 갔다.

“황태자 전하, 이 분은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이십니다.”

푸링의 말에 파츠래리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뭐 하십니까? 황태자 전하, 대공 각하께 인사하지 않으시고?”

테오도르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나는 카르펜의 황태자에게 인사를 받고 싶지 않네.”

테오도르의 선 긋는 말에 푸링은 메이아의 전 약혼자를 만나서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테오도르는 이를 갈며 말했다.

“카르펜 제국의 황태자는 시건방진 데다가 눈치도 상당히 없군.”

짜증스러운 목소리는 억누를 수 있어도 짜증스러운 감정까지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파츠래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츠래리가 더듬거리며 말하려는 순간…….

“사과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카르펜의 황태자.”

“그.”

파츠래리는 입을 닫았다.

그 모습을 보던 푸링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파츠래리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끌고 갔다.

테오도르는 곧장 메이아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전 약혼자인 파츠래리가 찾아온 이유는 분명 그녀에게 매달리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딸기 차 이야기를 꺼내면서 질척거리는 말들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파츠래리가 매달려서 메이아가 다시 카르펜 제국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면?

파혼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면?

“윽.”

갑자기 심장이 뜯길 것 같은 고통 때문에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주저앉아 왼쪽 심장에 손으로 꾹 눌렀다. 불안하고, 초조해 그녀가 날 떠나면 나는 어떡하지? 아니, 어떻게 살아가지?

“으윽…….”

메이아가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몰려오는 극심한 심장 통증은 분명 상사병이다.

‘빨리 메이아를 만나야 해!’

의원 워스트도 메이아와 떨어져 있는 상황을 상상만 하더라도 상상 이상의 고통을 주는 것이 ‘상사병’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럴 때는 메이아 얼굴을 보면 나아진다고 워스트가 말했다.

“큭.”

자리에서 일어선 테오도르는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 발 한 발 메이아가 있는 곳으로 걸어 나갔다. 카르펜을 전쟁으로 휩쓸어 버리면 돌아갈 곳 없는 메이아는 자신의 곁에 있어 주지 않을까?

아니면 그녀에게 카르펜 제국을 선물해 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심장의 고통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후유.”

그리고 메이아가 있는 방의 문을 열었지만 그녀는 없었다.

테오도르는 다시 왼쪽 심장을 꾹 누르며 주저앉았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메이아는 파츠래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방을 나선 뒤였다.

*

메이아는 푸링에게 파츠래리와 단둘이 대화하고 싶다 말했다.

“오신 용건이 무엇입니까? 황태자 전하?”

“메이아.”

“말씀하세요, 전하.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저는 마탑 의뢰 일로 너무 바쁘니 짧고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카르펜 제국으로 돌아와 줘.”

메이아는 그가 다시 약혼녀가 되어 달라는 말을 하지 않길 바랐다.

“다시 내 약혼녀가 되어 줘. 성인식을 치른 다음 황태자비가 되어 줘!”

한치의 예상도 어긋나지 않고 말하는 그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메릴 언니하고는 파혼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렇게 쉽게 파혼하고, 쉽게 약혼을 하고 이제 와서?

“메릴 공녀와 파혼할 거야.”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파츠래리의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메이.”

“제 애칭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파츠래리는 괴로운 듯 물었다.

“날 용서할 수 없는 건가? 메이아 공녀,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메이아였다.

“사과를 받는 사람은 사과하는 상대방을 신뢰하게 됩니다. 잘못을 알고, 용서를 빈 것이니 말이죠. 하지만 전하의 사과에서는 신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 애초부터 용서할 마음이 없습니다.”

파츠래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메이아만을 쳐다보았다.

“전하는 제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사과하고 싶어. 진심으로!”

“황태자 전하는 제게 사과하실 이유가 전혀 없으십니다.”

“내가 잘못했어.”

“어차피 우리 관계는 정략혼이었을 뿐입니다. 서로 미치도록 사랑해서 한 약혼이 아니라. 당연히 부모 잃은 공녀보다는 배경이 든든한 메릴 언니가 약혼녀가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정략혼이란 그런 거니까요. 쉽게 약혼하고, 쉽게 파혼하고.”

“그대가 다시 돌아온다면 후궁을 두지 않겠어! 원하는 건 다 해 줄게!”

파츠래리의 말에는 간절함보다는 경멸과 추함이 느껴졌다.

“전 원하는 건 스스로 얻는 편입니다. 내가 원하는 걸 남이 해 주는 건 자존심 상합니다. 성인식날 또 뵙겠지만, 전하, 그때도 이런 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

파츠래리는 괴로운 표정을 눌러 죽이고 말했다.

“날 외면하지 말아 줘. 내가 잘할게. 제발, 안 되겠어?”

“대체 왜 메릴 언니와 파혼을 원하시는 거죠?”

“있을 때 잘 몰랐지만 그대가 사라지고 많이 보고 싶었어. 그리고 깨달았지. 나는 메이아 그대를 사랑한다는 걸. 잘못된 일을 다시 되돌리고 싶어.”

그의 표정은 간절해 보였다.

하지만 메이아의 눈에는 사탕이나 초콜릿이 먹고 싶어 떼쓰는 아이로만 보였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파츠래리는 자리에서 일어선 메이아의 손목을 잡으며 다급히 외쳤다.

“제발, 용서해 줘. 내가 이렇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잖아.”

메이아는 손을 매섭게 뿌리치며 파츠래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황태자 전하. 고개를 숙이신다고 돌아갈 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찾아오지도, 찾지도 말아 주세요.”

“사랑해, 메이아.”

그의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메이아는 기가 찼다.

“절 사랑하신다면 황태자 자리를 데미안 황자에게 주세요. 그런다면 당신을 받아 주겠습니다.”

파츠래리는 절대 황태자 자리를 버릴 수 없다.

데미안이 황태자가 되는 순간 제일 첫 번째 숙청당할 사람은 파츠래리이기 때문이다.

“데미안 황자님이 걸린다면,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가 둘이 살아도 괜찮습니다.”

메이아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꺼냈지만 파츠래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에 메이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대답을 듣지 않았는데도, 결론은 나왔다.

“그게 황태자 전하의 대답이군요. 잘 알았습니다. 두 번 다시 절 찾지 말아 주세요.”

“처음부터 쉽게 용서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어.”

“혹시 제가 데미안 황자와 제가 결혼할까 봐 두려우신 건가요?”

메이아는 똑바로 그를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파츠래리는 그런 메이아의 눈을 피했다.

“제 마음은 분명히 전해 드렸습니다.”

“또 오겠어.”

“안녕히 가시길.”

자리를 떠나는 메이아를 파츠래리는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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