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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93화 (93/163)
  • 93화

    “하하, 급하시군요.”

    테오도르는 그에게 싸늘히 말했다.

    “급합니다.”

    “하하.”

    “하츠벨루아 공작, 나는 메이에게 돈도, 권력도, 높은 지위도 줄 수 있는 건 다 줄 겁니다. 그러므로.”

    테오도르는 루만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메이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한다면 플로렌스의 이름으로 반드시 죽일 겁니다.”

    루만은 테오도르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었다. 메이아의 기분 상하게 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여기 약혼서입니다.”

    약혼서에는 이미 테오도르는 서명과 인장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메이아 또한 자신의 가문과 이름에 서명했다. 이젠 루만만 인장을 찍으면 될 일이다.

    인장을 찍은 순간부터 메이아는 자신보다 높은 위치가 된다.

    루만이 현재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렇다고 안 찍을 수 없는 노릇이다.

    메이아가 데미안과 결혼을 하든, 플로렌스 대공과 약혼을 하든 모두 다 내키지 않았다.

    인장을 들고 있는 루만의 손이 살짝 떨렸다.

    메이아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삼촌은 모르시겠지만 제 연인은 다정하고 착하신 분이세요.”

    루만은 다시 테오도르를 쳐다봤다.

    냉정해 보이는 차가운 검은 눈동자가 약혼서와 하츠벨루아 인장만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자기 약혼녀의 삼촌을 노려보는데 저 모습이 다정하고 착하다고?

    “그, 그렇구나.”

    “제가 선택한 사람입니다. 제 마음에 안 들 리 없죠.”

    결국, 루만은 초조하게 시간을 끌다 살벌하게 노려보는 테오도르의 눈치를 살짝 보고 결국 인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인장이 찍힌 약혼서를 받아든 테오도르는 귀중한 보물처럼 고이 챙겼다.

    “테오, 삼촌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메이.”

    테오도르가 나가자마자 메이아는 루만에게 입을 열었다.

    “제가 데미안 황자와 결혼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메이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삼촌이 무얼 걱정하는지 뻔히 아는데 조카인 제가 도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왜 표정이 좋지 않으시죠?”

    “아니란다. 너무 놀라서 그렇단다. 그나저나 약혼식은 어쩔 생각이냐?”

    “제 약혼자의 성인식 날에 함께 올릴 예정이에요.”

    “성인식?”

    “네, 제 약혼자는 아직 열일곱 살이에요.”

    생각보다 어린 나이에 루만은 깜짝 놀랐다. 그 눈빛은 도저히 열일곱 살이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루만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게 약혼을 하는 것 같아 걱정이구나.”

    “저도 갑작스럽게 약혼녀 자리에서 쫓겨났죠.”

    “서로 협의를 하고 물러난 것이지.”

    상처받았다. 부모님을 잃고, 믿었던 약혼녀 자리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잊지 않았다. 잊을 수가 없었다.

    “메릴 언니에게 꼭 전해 주세요. 단둘이 있을 때는 반말하든, 별명을 부르든 신경 안 쓰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높임말 사용을 해야 한다고 말이죠. 플로렌스 대공비는 카르펜 제국 황후 마마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니 그 또한 꼭 인지시켜 주세요, 삼촌.”

    루만도 알고 있다. 플로렌스 대공비의 위치가 카르펜 제국의 황후보다 높은 위치라는 사실을.

    “이만 가겠다.”

    나가려는 루만을 메이아는 붙잡았다.

    “이 편지를 메릴 언니에게 전해 주시겠어요?”

    루만은 메이아가 건네주는 편지를 받았다.

    “이게 무엇이냐?”

    “제 개인적인 소장품 중에서 자선 경매에 내놓을 물건 목록입니다. 비싼 예술 작품부터 드레스와 보석들이죠. 언니도 황태자비가 될 텐데 경매 참여를 해 보면서 사람들과 인맥을 만드셔야죠.”

    “그래, 전해 주겠다.”

    “삼촌, 다만 자선 경매 물품은 꼭 제 이름으로 내놓아야 한다고 말해 주세요. 개인적인 소장품이기 때문에 메릴 언니의 이름으로 물품 내놓았다가는 큰일 납니다. 물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전해 주세요. 강요는 안 해요.”

    “알겠다.”

    메이아는 활짝 웃었다. 하지만 루만은 웃을 수가 없었다.

    메이아는 나가는 루만에게 말했다.

    “행복하고 즐겁게 만들었던 모든 것을 기억하면서 무슨 일이 생겨도 괴로워하지 마세요, 삼촌.”

    루만은 몸을 돌려 메이아를 쳐다봤다.

    “괴롭다고 느낀 순간 즐거웠던 것들은 가치를 잃게 되니까요.”

    루만은 웃으며 공작위를 이어받았고 행복해하며 메릴을 황태자 약혼녀로 만들었다.

    “가치를 잃으면 ‘후회’가 될 겁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슬픔도 가시기 전에 약혼녀의 자리를 메릴에게 줘야만 했다.

    자유 결혼서를 신전에 공증받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꼼짝없이 팔려갔을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파츠래리와 황후를 믿었다. 의심하는 순간 믿음은 무너질 테니 그들의 결정을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기 좋게 쫓겨났다.

    자존심이 매우 상했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분명 루만이 파츠래리를 압박해서 약혼녀 자리를 바꿀 거라고 예상은 했다.

    또한 압박을 받은 파츠래리는 황태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메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 파츠래리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생각하고 모든 걸 털어놓고 이야기했더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모든 힘을 다해 그를 황제로 만들었을 거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돌아봐 주지도, 위로해 주지도 그리고 끝내 아무런 이야기도 해 주지도 않았다. 그저 ‘파혼 통보’만 했을 뿐이다. 부모 잃은 고아 공녀에게 볼일 없다는 듯 말이다.

    “메이아,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루만은 약간 씩씩거리며 물어보았다.

    메이아는 들고 있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덤덤히 이야기했다.

    “삼촌, 단둘이 있을 때는 제 이름을 허락하겠지만.”

    메이어는 오른팔을 들고 문을 가리켰다.

    “문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는 제게 ‘예의’를 갖추셔야 합니다.”

    루만은 주먹만 꽉 쥐었다.

    “정녕 모르고 질문하시는 거라면 답해 드리겠습니다.”

    메이아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루만은 메이아의 말뜻은 알고 있었다.

    메이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말했다.

    “하실 말씀 더 있으신가요?”

    “아니다. 이만 가마.”

    *

    테오도르는 가슴에 고이 넣어 놓은 약혼서를 꺼내 황홀하게 쳐다봤다.

    ‘꿈인가? 아니 현실이다.’

    17년 살아오면서 이렇게 기쁜 건 처음이다.

    왼쪽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연무장을 쉬지 않고 뛰어다니면서 기쁨의 비명을 맘껏 지르고 싶었다.

    몰려오는 벅찬 감정을 추스르며 밝은 미래를 상상하며 즐거워했을 때였다.

    “실례하겠습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금발에 초록빛 눈동자가 매우 선해 보이는 남자였다.

    “혹시 일행이 있으시다면 그분이 나오실 때까지 맞은편 소파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테오도르는 즉시 답했다.

    “네, 앉으셔도 됩니다. 저는 약. 혼. 녀가 나오면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테오도르는 약혼녀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약혼녀분을 기다리고 계셨군요.”

    “그렇습니다. 약. 혼. 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테오도르는 싱글벙글 웃으며 빨리 메이아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파츠래리는 바로 텔레포트를 타고 마탑 앞에 도착했다. 마탑의 마법사에게 온 목적을 말했다.

    “메이아 하츠벨루아 공녀를 만나러 왔다.”

    마법사는 자신의 이공간에서 수정 구슬을 하나 꺼내 들고 살펴본 후에 말했다.

    “만날 수 있는지 여쭤보겠습니다. 1층 응접실에서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파츠래리는 문을 열고 마탑에 들어갔다.

    1층 응접실이 굉장히 넓었다. 바로 앞에 앉을 수 있는 소파와 테이블이 보였고, 거기 앉아 있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활짝 웃다 그걸 고이 접어 가슴에 넣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소파에 혼자 앉아 있더라도 무턱대고 맞은편에 앉는 일은 예의에 어긋나기에 파츠래리는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혹시 일행이 있으시다면 그분이 나오실 때까지 맞은편 소파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남자는 살짝 붉은 얼굴을 보이며 자신의 약혼녀가 곧 나올 테니 앉아도 된다고 말했다.

    소파에 앉은 파츠래리는 메이아를 생각했다.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용서해 달라 말해야 할까?

    우선은 그녀를 만나야만 한다. 그래야 용서해 달라며 이야기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답답함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숨을 쉬던 파츠래리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를 슬쩍 쳐다봤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그는 약혼녀라는 단어를 말할 때 입꼬리가 많이 올라갔다.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짓게 해 줄 정도로 사랑하는 약혼녀가 있는 이름도 모를 사내가 부러워졌다.

    남자는 자신 앞에 놓인 차를 들고 마셨다. 향긋한 차의 향기가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이 향기는…….’

    분명 딸기 차다. 하지만 딸기의 새콤달콤함은 남성들이 선호하는 맛은 아니었다.

    자신도 딸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메이아가 좋아하기 때문에 한 번 마셔 보긴 했다.

    그래도 퍽 좋아할 만한 맛은 아니었다.

    새콤함의 극치인 딸기 차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마시는 남자가 신기했다.

    “딸기 차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파츠래리의 말에 테오도르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약. 혼. 녀가 좋아하는 차입니다.”

    “그러시군요. 약혼녀가 좋아하는 차를 같이 마셔 줄 정도로 사랑하시나 봅니다.”

    생각해 보면 메이아가 가장 즐겨 마시는 것이 딸기 차다.

    <황태자 전하는 새콤함을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전 세상에서 딸기를 가장 좋아합니다.>

    <딸기는 몸에 좋습니다!>

    메이아는 딸기로 된 음식이나 간식을 좋아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건 단연 딸기 차다. 딸기 차를 보니 지나간 추억에 파츠래리의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답답함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자신을 받아 준다면 무조건 그녀를 위해 살아갈 것이다.

    “저도 오늘부터 딸기 차를 좋아할 겁니다.”

    좋아하지 않는 딸기 차를 같이 마셔 줄 거다.

    파츠래리의 말을 듣던 테오도르는 마저 남은 딸기 차를 한입에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같이 마셔 줄 정도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같이 마실 수 있는 것에 감사한 사랑입니다.”

    사실 테오도르는 그의 말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메이아가 좋아하는 딸기 차를 보면서 질척거리는 말을 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렀다. 하는 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파츠래리는 테오도르의 말에 반문했다.

    “싫어하는 걸 같이 할 정도로 사랑한다는 건 그만큼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테오도르는 살짝 입술 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그리고 얻을 수도 없습니다.”

    테오도르의 말에 파츠래리는 발끈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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