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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92화 (92/163)

92화

생각할수록 멍청한 여자가 메릴이다. 서류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사인할 줄은 몰랐다.

“그래, 토마스. 메릴 공녀님은?”

“공작저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

“생각보다 늦게 나오던데.”

“몸의 대화를 나누다 보니.”

토마스는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유리잔에 와인을 따랐다.

“아이 가지지 않도록 조심만 해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토마스는 메릴이 사인한 마법 공증 서류를 쿠룬달스 백작에게 건네주었다.

“바보 같군. 이젠 무슨 일이 생겨도 하츠벨루아 가문 보호를 받을 수가 있겠어.”

테러넷 쿠룬달스 백작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메릴 공녀는 이 돈을 다 감당 못 할 텐데, 쯧쯧.”

“하츠벨루아 가문이 책임져 주겠죠, 아버지.”

“보통 배 한 척에 들어가는 평균 비용은 1천만 골드지만 우리가 구매하는 배는 와인용 배라 아주 비싸지, 끌끌.”

서류의 내용에는 하츠벨루아가의 메릴이 가문의 이름으로 쿠룬달스 백작저에 와인용 무역 배를 다섯 척 구매한다. 배 한 척의 가격은 5천만 골드이다.

만에 하나 메릴이 배를 구매할 수 있는 자금을 낼 수가 없다면 하츠벨루아 가문에서 대신 내 줘야 한다. 가문의 이름으로 사인했기 때문에 책임 또한 가문이 지는 것이다.

만에 하나 성인식을 치르지 않았다면 사인을 해도 무효가 되지만, 메릴은 성인식을 올린 성인이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에 하나 가문에서도 책임을 안 진다면 절차에 따라 재판을 열면 된다. 메릴은 섣부른 사인 한 번에 2억 5천만 골드의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토마스는 입을 열었다.

“당분간 결혼을 미루겠습니다.”

“뭐? 결혼을 미룬다고? 무슨 핑계로?”

“루루나 후궁 마마의 티 파티에서 메릴 공녀와 세자르 영애가 머리채를 잡고 싸웠다고 합니다. 그 소문이 잠잠해지기 전까지는 당분간 결혼을 미루자고 하면 되죠.”

토마스의 말에 테러넷 백작은 큰 소리로 웃었다.

“역시 너는 내 아들이야! 하하하.”

“백조 대신 오리라는 말이 딱 지금이죠, 후후.”

하츠벨루아 가문이라면 2억 골드든 3억 골드든 얼마든지 줄 것이다.

만약 세자르 영애와 결혼하지 않고, 메릴과 결혼한다면?

“아버지.”

“그래, 토마스.”

“메릴 공녀와 결혼해서 데릴사위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넌 쿠룬달스 백작 후계자다. 데릴사위는 안 된다.”

“예, 예. 아무튼, 전 메릴 공녀에게 봉사한 몸을 좀 쉬어야 하니 물러가겠습니다.”

쿠룬달스 백작은 데릴사위 건을 단칼에 거절했지만 토마스의 상상 속에선 이미 자신이 하츠벨루아 공작이었다. 백작보다는 당연히 공작이 좋지 않은가!

‘야금야금 돈을 뺏는 것보다는 데릴사위가 되어 공작이 되는 게 나에게 나은 선택이지.’

언제나 사람 뒤통수치는 법을 가르친 사람은 아버지인 테너렛 쿠룬달스 백작이다.

그렇다면 가르침 받은 대로 하면 될 일이다. 토마스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

메릴은 세자르의 머리채를 잡고 때렸고, 티 파티 주최자인 루루나는 기절했다.

순식간에 티 파티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갑자기 티 파티에 나타난 황태자 파츠래리는 쓰러진 세자르 영애를 안아 든 채로 메릴에게 크게 소리쳤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머! 세상에 그래서 세자르 영애를 안아 올렸다고요?”

“네, 맞아요. 메릴 공녀님에게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셨다니깐요. 그 티 파티에 참석한 제 딸아이가 목격한 일이에요.”

“딸아이가 그러는데, 황태자 전하가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합니다.”

“세자르 영애와 언제부터였을까요?”

“약혼녀가 아무리 못돼먹은 악녀라 할지라도 황태자 전하께서는 그러시면 안 되는데. 요번 계기로 조금……. 흠흠, 그렇네요.”

세자르를 안아 들고 나간 파츠래리. 그리고 세자르의 뺨을 때린 메릴.

그걸 본 파츠래리는 메릴에게 크게 화를 냈고, 눈물을 흘리던 세자르는 파츠래리에게 품에 안겨 티 파티 장소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왜 싸웠느냐는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왜?

황태자 파츠래리가 메릴보다 세자르 영애를 더 챙겼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었다.

이 사실을 알고 황제는 크게 화를 내며 파츠래리를 불렀다.

황제는 약혼녀 메릴를 두고 세자르 영애를 먼저 챙긴 파츠래리를 크게 꾸짖었다.

그의 목소리는 노기로 떨리고 있었다.

“파츠래리, 생각이란 것이 없어진 게냐?”

황제는 평소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원인과 이유를 알아본 다음 다그치는 편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파츠래리 또한 생소한 황제의 모습에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사람들 입에서 세자르 영애와 네가 바람이 나서 메릴이 세자르 영애의 머리채를 잡았다고 한다.”

“절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얘기해 보아라!”

파츠래리는 그저 메릴을 챙겨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마음속 진실을 이야기하면 이미 화가 난 황제는 더욱 화를 낼지도 모른다. 파츠래리는 어두운 얼굴로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

“세자르 영애가 메릴 공녀에게 일방적으로 맞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챙기게 되었습니다.”

그 행동으로 인해 온갖 구설이 생겼지만, 다시 이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분명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네가 황태자라는 자각이 있었다면 맞고 있는 세자르 영애보다는 메릴 공녀를 챙겼어야 했다.”

“하지만 세자르 영애는 맞고 있었습니다.”

“메이아 공녀는 내가 선택한 약혼녀지만 메릴 공녀는 너와 황후가 선택한 약혼녀다. 그렇다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이 아니더냐!”

황제의 날카로운 말에 파츠래리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죄송합니다.”

황제는 화가 난 목소리로 파츠래리에게 말했다.

“약혼녀 한 명도 챙기지도 못하면서 무슨 나라를 챙기겠다고.”

황제의 말에 파츠래리는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숙였다.

황제와 이야기를 끝내고 파츠래리는 바로 황후 엘르민에게 찾아가 말했다.

“메릴 공녀와 파혼하고 싶습니다.”

엘르민은 예상했다는 듯 답했다.

“황태자 자리를 지킨 이후 메릴 공녀를 내쳐도 되는 일이다.”

엘르민의 말을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메이아 공녀와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탁!

엘르민은 테이블 위를 손바닥으로 강하게 내려치며 말했다.

“황태자!”

파츠래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꽃은 어디서든 피어나고 흔한 거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꽃이 지고 사라지기 전까지 몰랐습니다.”

메이아 하츠벨루아. 그녀가 자신에게 있어 가장 세상에서 가장 귀한 꽃이었다는 걸.

<황태자 전하, 바쁘시면 열흘에 한 번 식사해도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바쁘시니 제가 황궁으로 오겠습니다. 만약 공작저 방문을 원하신다면 미리 편지를 보내 주세요.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겠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후궁을 두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언제나 상냥하게 웃어 주고, 조용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메릴 공녀 또한 메이아와 같을 줄만 알았다. 그렇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어머니, 후회됩니다. 메이아 공녀를 다시 붙잡고 싶습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을 배려해 주었고 조용히 뒤에서 신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밀어주었다.

“다시 씨앗을 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파츠래리는 고집스럽게 물러서지 않고 오로지 메이아와의 재결합만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황태자, 하츠벨루아 공작이 그걸 받아 줄 것 같습니까? 조카에서 딸로, 그리고 딸에서 다시 조카로 약혼녀 자리를 바꾸는 걸 그자가 웃으면서 허락하겠습니까?”

“메릴 공녀가 물러나게 하면 될 일입니다. 딸을 아끼는 하츠벨루아 공작이니, 메릴 공녀가 파혼하고 싶다 하면 파혼이 될 것입니다.”

“제 딸 메릴을 데미안 황자와 결혼시킬 것입니다.”라는 루만의 말에 파츠래리는 황태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메이아 대신 메릴을 선택했다.

섣부른 결정이었다.

“전 오로지 메이아 공녀만을 원합니다.”

메이아가 파츠래리를 다시 받아 준다면 정말 다행일지 모르겠지만 과연 메이아가 받아 줄까?

“그럼 메이아 공녀의 마음을 먼저 잡으세요. 데미안이 먼저 마음 잡기 전에.”

“알겠습니다, 어머니.”

파츠래리는 손을 꽉 쥐었다.

“마탑에 다녀오겠습니다.”

*

마탑을 방문한 루만은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메이아를 만났다.

“편지의 내용이 궁금하구나…….”

“내용 그대로예요.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생겼어요.”

너무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어버린 루만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멍하니 메이아를 쳐다봤다. 그 와중에도 똑똑히 귀에 들린 단어는 ‘결혼’이었다.

혹시 데미안과 만나서 이야기를 끝낸 것인가? 설마?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5년 동안은 카르펜 제국의 남자들과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맹세했다. 그래도 초조한 기분에 조심스레 물었다.

“메이아……, 혹시 데미안 황자를 만났느냐?”

메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데미안 황자랑은 결혼할 일 절대 없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카르펜 제국의 남성하고는 결혼 절대 안 할 거예요. 제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그녀는 웃으며 테오도르의 이야기를 했다. 루만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다면 메, 메이아 네가 플로렌스 대공비가 된다는 것이냐?”

딱 봐도 당황해하는 루만에게 다정히 미소 지으며 메이아는 말했다.

“그렇게 되었으니, 약혼서에 인장을 찍어 주시겠어요?”

메이아가 플로렌스 대공비가 된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메릴이 안다면 난리가 날 이야기다.

“제가 약혼녀 자리를 주고 떠날 때. 약속하지 않으셨나요? 카르펜 제국 남자만 아니라면 원하는 남자를 허락해 주겠다고.”

“너무 섣부르게 생각하는 게 아니지 싶구나.”

메이아가 진짜 플로렌스 대공비가 된다고 생각하니 루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어디서 저런 대어를……!’

메이아가 플로렌스 대공비가 된다면 메릴은 분명 난리를 칠 것이다.

루만은 두 손을 꽉 쥐었다.

분명 메이아에게 ‘자유 결혼서’를 약속했다. 그리고 신전 공증까지 받았으니 약속을 어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플로렌스 대공가와 인연을 맺게 되는 거라면 큰 손해는 아니다. 시리우스 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라 수출업이 매우 잘된 곳이다. 메이아에게 잘만 보이면 손쉽게 항구권 하나쯤 따내는 것도 일도 아닐 텐데…….

루만이 생각이 빠져 뜸을 들일 때 테오도르는 품 안에서 약혼서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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