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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90화 (90/163)

90화

아쉴롬은 입을 열었다.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입니다.”

데미안은 평온한 얼굴로 찻잔을 만지작거렸지만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찻잔을 깨뜨릴 것처럼 응시했다.

“플로렌스 대공이라면…….”

시리우스 제국 황가의 피를 이어받아 황위 계승권도 가지고 있으며, 시리우스 제국에 자리한 남쪽 바다가 삼면이 둘러싸인 플로렌스령을 다스리고 있다.

황제와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시리우스 제국이 강대국인 만큼 플로렌스 대공가를 무시할 순 없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넘어갈 순 없었다.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에스코트까지 했으며…….

“같이 마탑으로 향했고…….”

“그렇습니다.”

데미안은 아쉴롬에게 이만 나가 보라고 말했다.

아쉴롬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글렌!”

데미안의 큰 소리에 밖에서 대기하던 글렌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데미안 황자님!”

“글렌.”

“네.”

“플로렌스 대공의 모든 정보를 알아 와. 약혼은 했는지, 결혼했는지, 나이가 몇인지. 그리고 혹시 모르니…….”

그렇게 말하는 데미안 황자의 모습은 태연해 보이지만 싸늘한 분위기는 숨겨지지 않았다.

“메이아가 그곳에 있는지도.”

“알겠습니다.”

글렌은 한 발 뒤로 물러나며 허리를 숙인 뒤 나갔다.

*

베르튼가로 돌아온 아쉴롬의 머릿속에서는 데미안 황자의 집착 서린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데미안의 말 속에는 오로지 메이아뿐이었다.

<난 어릴 때부터 항상 형님에게 빼앗기는 일이 많았던 만큼 뺏기는 일이 가장 싫습니다. 물건도, 사람도 말이죠.>

노골적인 말이었다.

<내 것으로 생각한 걸 멋대로 빼앗으려 하거나 나와의 사이를 방해한다면.>

아쉴롬은 그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기에 수긍도 하지 못한 채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갖고 싶다고 생각되면 그건 이미 내 것인데, 그녀는 자꾸 벗어나려고 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집착을 넘어선 광기를 보게 되었다.

아쉴롬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 모습을 본 카산드라는 물어보았다.

“황궁에 다녀온 뒤로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아쉴롬 오라버님.”

카산드라의 말에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던 클레리라는 의아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 있었던 거니? 아쉴롬.”

카산드라는 걱정스럽게 쳐다보았고, 아쉴롬은 한숨을 작게 삼키며 말했다.

“데미안 황자님께서 메이아 공녀님 근황을 물어보셨습니다.”

장남인 케이시는 웃으며 말했다.

“유람선을 타고 가다 사람들을 구한 기사를 보셨으니 얼마나 궁금하셨겠어.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해 드렸어?”

“메이아 공녀님을 껴안은 남자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렸죠. 공녀님을 껴안은 남자는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이라고요. 그와 동시에 데미안 황자님 눈빛이 오싹해졌습니다.”

클레리라는 아쉴롬에게 물어보았다.

“플로렌스 대공이란 분께서 공녀님을 껴안은 게 사실이니?”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확실한 거야?”

“유람선 특등석을 예약하신 분들 목록 중에도 플로렌스 대공 가문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데미안 황자님에게 돌려 말할 수도 없었겠구나.”

데미안 성격상 이미 알고도 아쉴롬을 불러서 물어보았을 확률이 높다.

“아쉴롬 오라버님이 그 기사를 내지만 않으셨더라도.”

“누가 알았겠어! 데미안 황자님께서 메이아 공녀님을 황자비로 맞이할 거라는 걸!”

카산드라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데미안 황자님이 메이아 공녀님을 황자비로 맞이할 거라 말씀하신 뒤, 메이아 공녀님과 결혼을 원하는 가문들이 매우 불편해합니다.”

많은 가문은 메이아와 파츠래리의 파혼을 반기며 하츠벨루아 가문에 청혼서, 연서, 각종 고가의 선물을 보냈다. 그렇지만 하츠벨루아 공작은 조카가 원하는 남자와 결혼시킬 거란 말을 하며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거절당한 가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하츠벨루아 공작의 말을 달리 해석하자면 ‘메이아 마음에 든다면 결혼시킨다’라는 뜻이기도 했다. 당연히 메이아를 원하는 가문들은 자신들 집안에서 가장 잘생기고 몸이 좋은 영식들을 모아 놓고 필사적으로 외모를 꾸미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데미안의 황자비 발언은 그들에게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클레리라는 플로렌스 대공가에서 만난 메이아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메이아 공녀님은 데미안 황자님한테 마음이 아예 없으실 텐데.”

“클레리라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카산드라의 말에 클레리라는 당황하여 더듬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 그, 공녀님 내 드레스 좋아하시잖아. 내, 내가 전에 데미안 황자님이 멋지지 않냐고 여쭤보니 관심 없다 하셔서, 호호호.”

“그때는 약혼자가 있을 때고, 지금은 다르잖아.”

분명 카산드라의 말이 맞다. 그렇다고 ‘공녀님은 이미 연인이 있어!’라고 외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아는 메이아 공녀님이라면 황가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을 거야.”

“왜? 메이아 공녀님과 데미안 황자님도 잘 어울리시는데.”

“그래, 산드라. 분명 두 분은 잘 어울리시지만 메이아 공녀님이 황자비가 된다면 많은 가문은 데미안 황자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될 거다.”

클레리라의 말을 들은 카산드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모든 가문의 수장은 남자지만 그 남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바로 부인들이지. 그리고 그 부인들이 따르는 사람이 바로 메이아 공녀님이야.”

동생들의 대화를 듣던 장남 케이시는 예전에 메이아 공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무능한 개는 주인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고 짖어 댈 뿐이죠. 짖어 대기만 하는 개는 키울 수 없습니다.>

<공녀님, 충분히 교육하면 될 일입니다.>

<베르튼 영식, 교육받은 사람이나 강한 사람이 살아남았다고 꼭 똑똑하거나 강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상황을 살펴볼 줄 알고, 그 상황에 고개를 낮추고 눈치 본 이들이 더 많이 살아남는 겁니다.>

메이아는 사람들은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사이 나쁜 적일지라도 아군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 바로 메이아다. 그래서 의문이 든다.

데미안 황자가 황태자 자리에 욕심을 내고 있다는 건 황제파든, 귀족파든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가장 빠르게 황태자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메이아를 황자비로 맞이하는 것이다.

“데미안 황자님께선 정말 좋아서 메이아 공녀님을 황자비로 맞이하시는 걸까?”

“케이시 오라버니, 당연히 좋아서 하시는 게 아닐까요?”

“산드라,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란다.”

“정말 좋아서 그런 거 일 수도 있잖아요. 형님의 약혼녀라서 바라보다 파혼을 했으니 기회가 생긴 거잖아요.”

고개를 저으며 케이시는 한숨을 쉬었다.

“메이아 공녀님께서 데미안 황자님과 결혼하시게 된다면. 황태자 자리는 바뀔 거다.”

메이아라면 ‘바보’라도 ‘왕’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케이시 입장에서는 데미안이 메이아를 사랑해서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클레리라는 급한 마음에 바로 메이아를 찾아갔다.

비록 편지를 보내고 방문 날짜를 잡지 않았지만 다행히 입구 앞에서 허락을 받고 들어갔다.

메이아를 만나자마자 클레리라는 데미안이 아쉴롬을 불러낸 이야기를 했다.

클레리라의 이야기를 듣던 메이아는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으며 말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에요, 클레리라.”

그렇다고 클레리라가 방문한 일이 소용없던 건 아니다. 충분히 값어치가 있는 행동이었다.

그녀 덕분에 메릴의 최근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무려 영애와 머리채를 잡고 싸웠다는 이야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메릴의 무책임한 행동에 하츠벨루아 가문이 사람들 입에서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걸 생각하니 약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걱정입니다, 공녀님.”

“걱정 고마워요, 클레리라. 오늘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데미안 황자님께서는 꼭 메이아 공녀님을 황자비로 맞이한다고 말하고 다니십니다.”

“데미안 황자님이 제게 어떤 제안을 하면서 황자비가 되어 달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황자비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클레리라가 나간 뒤 문을 열고 테오도르가 메이아 곁으로 다가왔다.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리 보이나요?”

테오도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메이아에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테오, 데미안 황자님이 플로렌스 대공저로 찾아올지도 모르겠어요.”

테오도르의 미간을 찌푸렸다.

“유람선 위에서 사람들을 구해 준 일이 기사로 나가면서 저와 대공님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나 봐요. 그리고 그걸 데미안 황자님이 알게 되었어요.”

“데미안 황자가 올지도 모르니 기분이 좋지 않으셨군요.”

테오도르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데미안 황자님은 제가 황자비가 될 거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제가 황자비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삼촌과 사촌 언니에게 복수? 황후 되기? 파츠래리를 황태자 자리 쫓아내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나시기 전 마지막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메이, 힘이 있어야 증오심도 표출할 수 있는 거란다.>

<힘이 없는데 증오심을 표출해 보았자 나약한 인간이라는 걸 증명할 뿐이란다. 그건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 좋지 않단다.>

<힘없는 증오심 표출은 오히려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될 거야.>

“어머니와 아버지가 잘 다스린 가문이 우스운 꼴이 되더라도, 데미안 황자가 저를 앞세워 설레발 치더라도 지금의 저는 절대 마음을 표출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말이다.

테오도르는 입을 열었다.

“전 열두 살에 대공이 되었습니다. 플로렌스가의 주인으로서 사람들을 해적들로부터 지켜 내기 위해 전선에 섰고, 충분히 그 몫을 했지만 유일하게 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인데요?”

“바로 부모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대공의 위치는 무겁습니다. 그러므로 슬픔을 포함해 모든 감정을 침묵해야만 했습니다.”

메이아는 테오도르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지금도 받아들일 수 없나요?”

“아닙니다. 이젠 피하지 않을 겁니다.”

부모님의 죽음부터 가신들을 잘 다스리지 못해 생긴 사람들의 고통까지.

“절대.”

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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