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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89화 (89/163)
  • 89화

    주저앉은 세자르는 울며 말했다.

    “메이아 공녀님이 보고 싶습니다, 흑흑.”

    그 말에 메릴은 발끈하며 다시 한번 손을 치켜들었다!

    쾅!

    유리 온실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시종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황태자 파츠래리가 뛰어 들어왔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란 말입니까!”

    파츠래리 눈에는 쓰러져 있는 한 영애에게 손을 들고 폭력을 행사하려던 메릴이 보였다.

    “손을 내리세요.”

    파츠래리는 헝클어진 꼴의 메릴을 쳐다보았다. 참으로 볼품없고 초라해 보였다.

    “당장 공작저로 돌아가십시오, 메릴 공녀.”

    “하지만! 전하! 세자르 영애는 공녀인 제게.”

    메릴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더는 여기서 내 목소리를 높이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메릴은 빨갛게 된 얼굴로 부들부들 떠는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꽉 깨물며 분을 삭였다. 파츠래리의 목소리는 결국 높아졌다.

    “당장!”

    그의 높은 언성에 메릴은 눈물을 흘렸다.

    “지금 저한테 소리 지르신 겁니까?”

    메릴의 대꾸에 파츠래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이 끔찍했다. 몸 안 구석구석이 썩어 가는 기분이었다.

    “정말 여기서 더 망신당하기 싫으면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메릴 공녀.”

    파츠래리는 부들부들 떨며 울고 있는 메릴를 지나쳐, 쓰러져 있는 세자르를 안아 들었다.

    “당분간 메릴 공녀는 공작저에서 근신하십시오.”

    *

    베르튼가의 아쉴롬은 백작가의 영식이다.

    정확히 차남이다. 그리고 그의 직업은 ‘기자’다.

    그는 얼마 전 마탑으로 향하는 유람선에 타고 있었다.

    멋진 바다를 바라보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유로운 해 질 녘까지 무척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해적들이 습격하기 전까지 말이다.

    유람선을 습격한 해적들 습격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텔레포트 타고 갈걸…….’

    후회가 급격하게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그래도 백작가 차남답게 더러운 해적들에게 삶을 구걸하지 않고, 귀족다운 생을 마감하기 위해 고고하게 앉아 죽음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죽지 않고 살았다.

    기적이었다.

    그 많은 해적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한 영웅이 있었으니!

    바로 메이아 하츠벨루아 공녀였다.

    메이아가 배에서 내리기 전까지 부지런히 배 안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히 이 소식을 접한 편집장은 흥분했다.

    <뭐라고? 하츠벨루아 공녀가 해적들을? 특종이다.>

    아쉴롬은 마탑 기사 대신 메이아의 기사를 여러 번 내게 되었다.

    카르펜 제국사교계의 꽃으로 오랫동안 군림해 온 아름다운 메이아의 행보를 궁금해하던 사람들은 그녀가 사람들을 구했다는 기사에 크게 환호했다.

    [메이아 하츠벨루아 공녀, 해적들 격퇴!]

    [우아한 손놀림 위로 펼쳐진 얼음 마법은 아름다운 꽃처럼.]

    [영웅이 된 아름다운 공녀!]

    [카르펜 제국의 자랑스러운 사교계의 꽃!]

    [하츠벨루아 공작 가문의 메이아 공녀님은 어릴 때부터……]

    [그녀는 왜 마탑으로 가는 유람선에 탑승했는가!]

    [메이아 공녀님을 바라보는 남자들! 메이아 공녀님을 한 번만 바라보는 남자는 없다!]

    [메이아 공녀님이 머물던 유람선 특등석]

    [공녀님이 머물던 특등석 1년 치 모두 예약 마감되어…… 내년까지 예약이 빗발치는 중]

    [메이아 공녀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

    [서빙을 하다 귀족 부인의 드레스를 더럽힌 소녀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직접 현장에 있었던 아쉴롬은 생생하게 기사를 작성했다.

    그가 쓴 기사가 실린 잡지나 신문들은 빠짐없이 완판되었다.

    그 덕분에 특별 포상 휴가와 보너스를 받고 베르튼가로 돌아온 아쉴롬이었다.

    특종의 짜릿함을 맛본 아쉴롬은 더욱 특종을 찾게 되었지만 아쉽게도 주위에 마땅한 기삿거리가 없었다.

    그러다 그의 머릿속에 메이아를 지극정성으로 에스코트하던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테오도르 플로렌스, 시리우스 제국의 대공.

    뭔가 기자의 감각이 놓치면 안 될 것이 있다며 마음과 머릿속에서 비명 지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상하단 말이지. 분명 뭔가 놓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아쉴롬 오라버님.”

    “뭐야, 산드라, 빨리도 왔다. 루루나 마마의 티 파티 간다 하지 않았어?”

    “티 파티에서 사건이 일어났거든.”

    여동생 카산드라의 말에 아쉴롬은 관심이 없다는 듯 짜게 식은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티 파티에서 사건이 있어 봤자…… 사교계 일이겠지.”

    “내가 기사에서만 보던 평민들이나 하는 개판 싸움을 티 파티에서 봤단 말이지. 이래도 관심이 없어?”

    황제 폐하의 후궁인 루루나의 티 파티! 우아한 귀족 영애들의 모임!

    그런데 평민들이나 하는 개판 싸움?!

    여동생 카산드라의 말에 아쉴롬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가지고 싶은 게 무엇입니까? 카산드라 영애님.”

    “얼마 전 마리엔느 부인의 신상 모피 부채가 몹시 가지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카산드라는 싱긋 웃으며 한 잔의 차로 목을 축인 다음, 아쉴롬에게 루루나의 티 파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산드라, 그러면 황태자 전하께서 세자르 영애를 번쩍 안아 들고, 메릴 공녀님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거지?”

    “그래! 두 분 파혼하실 것 같다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입 모아 말하던걸!”

    “고맙다. 훌륭한 기삿거리다.”

    “기사 낼 수 있겠어?”

    “편집장님에게 이야기해 보고.”

    아쉴롬은 황태자가 루루나 후궁의 티 파티에서 다른 영애를 껴안고, 메릴에게 소리 지르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렸다.

    “막 나가는 로맨스가 책에만 있는 게 아니네.”

    “알아서 해. 잘못 기사 내면 찍힐지도 모를 텐데…… 모르겠다.”

    “걱정하지 마.”

    아쉴롬은 저번에 유람선 위에서 해적들을 소탕한 메이아 공녀님 이야기 이후 좋은 기삿거리가 마침 난감해하던 차였다.

    “빨리 잊기 전에 가서 써야겠어!”

    “맞다!”

    카산드라는 뭔가 생각이 난 듯 아쉴롬의 걸음을 붙잡았다.

    “오라버님!”

    “왜? 또 좋은 기삿거리 있어?”

    카산드라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루루나 마마의 티 파티 끝나고 나오면서 데미안 황자님을 만났는데. 그분께서 이걸 아쉴롬 오라버님한테 전하라 하셨어.”

    카산드라는 가방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데미안 황자님이?”

    ‘대체 왜?’

    편지를 건네받은 아쉴롬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읽어 보았다.

    내용은 편지를 읽고 바로 황궁으로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오늘 루루나의 티 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기사를 내지 말라는 건가?

    무슨 일로 자신을 부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황자의 초대를 거절할 만큼 변명거리도 없고, 피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호출의 이유가 매우 궁금한 아쉴롬이다.

    “황자님이 보자고 하시니 황궁에 다녀와야겠다.”

    “잘 다녀오고, 오늘 큰 오라버님이 저녁에 꼭 식사에 참석하라 했어. 참고로 그 바쁜 클레리라 언니도 올 거야.”

    “클레리라 누나도 온다고? 웬일이지? 드레스 만드느라 바쁜 거 아니야?”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

    “알았어. 이따가 저녁 식사 전에 들어올게.”

    *

    데미안은 맞은편에 앉은 아쉴롬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유람선 위에 있었던 기사들을 모조리 찾아 읽어 봤습니다, 아쉴롬 영식. 그녀의 소식이 궁금했던 찰나에 고마웠습니다.”

    “아닙니다! 기자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데미안은 무척 즐거운 웃음을 보이다가 곧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슬픈 일을 한꺼번에 겪었으니, 저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황자님…….”

    데미안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유람선 위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군요, 아쉴롬 영식.”

    아쉴롬은 반짝이는 눈동자를 빛내며 데미안에게 입을 열었다.

    “저도 메이아 공녀님께서 유람선에 타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배 위에서 멀미 때문에 끙끙거리고 있었던 찰나! 갑자기 문을 열고 들이닥친 해적들에게서.”

    “아쉴롬 영식, 제가 궁금한 건 당신이 해적들에게 당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데미안은 아쉴롬의 얼굴을 골똘히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궁금한 건 이 내용입니다.”

    데미안은 옆에 있던 아쉴롬이 작성한 신문 한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말을 이어 갔다.

    [메이아 공녀님을 바라보는 남자들! 메이아 공녀님을 한 번만 바라보는 남자는 없다!

    그중에서 애타게 ‘메이아 공녀님’을 외치는 수려한 외모의 남성은…… 그녀를 껴안으며 눈가를 붉혔다. 자리에 있던 많은 남성들은…….]

    아쉴롬은 데미안의 난감한 질문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얼마 전부터 메이아 공녀를 황자비로 맞이하겠다는 데미안의 소문은 카르펜 제국에 모르는 사람 하나 없다. 자칫 잘못 말하면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쉴롬은 정확히 플로렌스 대공과 메이아 사이를 모른다. 갑자기 갑판 위에 나타난 그가 그녀를 껴안았다는 것밖에……. 그리고 그걸 메이아가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 낯선 남자가 와서 껴안으면 따귀라도 올려붙여야 정상 아닌가?

    아무리 타 제국 높은 신분의 대공이라 할지라도 허락 없이 레이디를 안는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아쉴롬은 뭔가 중요한 퍼즐 조각이 끼워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아쉴롬은 마른침을 삼키고 데미안을 보았다.

    “갑자기 뛰어들어 그녀를 껴안은 이 무례한 남자가 누군지 궁금합니다.”

    아쉴롬은 화들짝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그, 제가 볼 때는 메이아 공녀님을 구하시기 위해 뛰어드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포옹도 하시고, 하하.”

    채앵!

    소란스러운 유리 찻잔의 소리에 아쉴롬은 깜짝 놀라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데미안 황자님.”

    “오해란 것은 잘못된 걸 알게 되었을 때지만…… 그 남자가 껴안은 사실이 맞기 때문에 기사를 그리 쓴 것이 아닌가요? 아쉴롬 영식.”

    눈웃음을 지으며 말하고 있지만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다.

    “만약 아쉴롬 영식이 제대로 말한다면 아주 기쁘겠지만, 만에 하나 오해할 만한 일을 말한다면 실망해서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모르겠습니다.”

    상냥하게 웃는 데미안 황자의 미소에 악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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