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메릴은 요즘 우울한 일투성이다.
아그니타가 독방을 빠져나가면서 공작저를 뒤집어 놓은 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약혼자인 파츠래리와 만나고 싶지만 그는 항상 바쁘다.
그리고 자신과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이 예비 황태자비인데도 불구하고 귀부인과 영애들은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
우울한 기분을 토마스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잊으려고 했지만 그도 너무 바쁜 나머지 만날 수가 없었다.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한숨을 쉬며 메릴은 루루나의 티 파티에 참여하기 위해 치장을 마쳤다.
루루나는 티 파티에 온 메릴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어서 와요, 메릴 공녀.”
수도 내 영애들과 자꾸 충돌이 일어나니 아버지의 말대로 조용히 차만 마시고 공작저로 돌아갈 생각이다.
“초대 감사합니다.”
루루나 옆에는 아름다운 금발과 분홍빛 눈동자가 매우 귀여운 영애 한 명이 있었다.
“인사해요, 메릴 공녀. 이번에 쿠룬달스가의 토마스 영식과 결혼을 올리게 될 샨트리가의 세자르 백작 영애랍니다.”
루루나의 말에 메릴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자신의 비밀 연인 토마스와 결혼할 여자를 소개받는 것이다.
심장이 쿵 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안녕하세요, 하츠벨루아 공녀님.”
“반갑습니다, 세자르 영애.”
메릴은 인사하는 세자르 영애를 위아래로 슬쩍 훑었다. 굽이치는 머릿결, 날씬한 허리 그리고 녹색 계열의 아름다운 드레스와 어울리는 싱그러운 미소.
누구나 호감을 주는 좋은 선한 인상까지…….
“미래의 쿠룬달스 백작 부인이 될 세자르 영애는 미래 황후가 될 메릴 공녀를 잘 도와줄 겁니다, 호호.”
루루나는 웃으며 세자르를 계속 칭찬해 주었다.
토마스의 결혼 이야기에 메릴의 머리는 차갑게 굳어만 갔다.
지금 당장 토마스에게 가서 사실인지 물어보고 싶을 뿐이다.
‘토마스가 날 버리고 결혼할 리가 없어.’
“루루나 마마, 부끄럽습니다.”
“세자르 영애, 어제도 토마스 영식과 데이트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가 자꾸 보고 싶다 하며 찾아옵니다.”
세자르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토마스 영식과 결혼해서 빨리 아이를 낳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습니다.”
“호호호, 결혼 날짜는 정해졌나요?”
“쿠룬달스 백작가와 저희 샨트리가는 원하는 날짜에 식을 올리기로 합의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올해 가기 전에 토마스 영식과 결혼 올리자고 하셨습니다.”
“축하해요, 세자르 영애!”
“네, 감사합니다.”
세자르의 얼굴이 행복함으로 물들어 갔다.
메릴은 그 모습이 몹시 짜증이 났다. 화가 났다.
‘토마스는 내 남자야!’라고 외치고 싶다. 그렇지만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아버지의 말을 계속 되새겼다.
<메릴, 제발 차만 마시고 와다오!>
간곡한 아버지의 말에 메릴은 이를 꽉 깨물며 세자르에게 나름 친절한 표정을 지었다.
루루나는 티 파티의 시작을 알렸다. 그녀의 티 파티는 항상 시와 함께한다.
차를 마시며 시를 그 자리에서 지어 말한다거나 아니면 좋아하는 작가의 시 한 편을 읊는다.
메릴도 그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급하게 시 한 편을 억지로 외웠다.
도착하기 전까지 되새기고 있었지만 토마스와 결혼할 예정인 세자르를 소개받자마자 머리는 깨끗하게 비워졌다. 날뛰는 심장 때문인지, 불타는 질투심 때문인지 자꾸만 온몸이 떨리기만 했다.
루루나는 앉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있는 메릴을 살펴보며 말했다. 일부러 세자르를 초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이 훤히 보이니 그 모습을 보는 거 또한 재미있었다.
“메릴 공녀,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루루나는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늘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로젠하이든 백작이 이런 말을 했었죠.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보다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메릴 공녀?”
“예.”
“로젠하이든 백작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루루나의 말에 메릴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바로 맞받아 이야기했다.
“저는 사랑을 잃어버리기 전에 잃게 만드는 것을 없애야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루루나는 호호 웃으며 입을 열었다.
“메릴 공녀는 황태자 전하를. 아…… 그러니까 사랑을 직접 쟁취하신 분이니 사랑을 잃는다는 말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군요.”
루루나의 말에 자리에 있던 영애들은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루루나의 가시 돋친 말이 메이아의 약혼녀 자리를 두고 돌려 까는 뜻임을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해했다.
“메릴 공녀, 이 자리를 빌려 고마운 마음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메릴 공녀 덕분에 메이아를 며느리로 얻게 되었으니깐요.”
그 자리에 있는 영애들은 모두 루루나가 말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네가 약혼자 자리 빼앗은 덕분에 사교계 꽃인 메이아가 혼자가 되었다.’
비꼬는 말이었다.
메릴은 그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으려 노력을 했다.
루루나의 말은 계속 이어 나갔다.
“메이아 공녀와 티 파티에서 시를 같이 낭송하는 게 제 소박한 꿈입니다.”
“마마, 저희도 티 파티 초대 꼭 해 주세요.”
“물론이죠, 호호.”
“메이아 공녀님의 티 파티는 언제나 즐거웠습니다.”
“맞아요. 정말 보고 싶네요.”
“성인식 때는 오시겠죠?”
“사교계 꽃이신 메이아 공녀님이 입으실 드레스가 너무 궁금하네요.”
자리에 있는 영애들은 메이아를 찬양하고, 그리워하며 동경했다.
메릴은 숨을 들이켰다. 반복적으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반복되었다.
<메릴, 제발! 부탁한다!>
<얌전히 차만 마시고 와다오, 메릴!>
<제발 싸우지 마라.>
그러나 아버지가 말한 것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갔다.
“메릴 공녀도 황후가 된 이후에 황자비가 될 메이아 공녀를 잘 보살펴주셔야 합니다.”
대답해도, 하지 않아도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예’라고 하기는 너무 싫었다. 메이아가 황자비가 되다니, 생각만 하더라도 싫었다.
“대답이 왜 없으십니까? 메릴 공녀.”
“메이아가 황자비가 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메릴의 말에 화기애애하던 티 파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전 약혼자의 남동생과 결혼하고 싶을까요? 제가 아는 메이아라면 안 할 겁니다.”
루루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세자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공녀님.”
“메이아와 결혼하고 싶은 귀족 영식들이 한둘인 줄 아시나요? 집에 엄청난 연서와 청혼서들, 선물들이 매일 오고 있습니다. 메이아는 그중에 골라서 결혼하지 싶네요.”
루루나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이며 비틀거렸다.
“마마!”
“세상에!”
루루나의 비틀거리는 모습에 세자르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말을 가려 해 주십시오, 공녀님.”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요.”
“지금 메릴 공녀님께서 루루나 마마께 얼마나 큰 실례를 범하고 있는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메릴은 세자르를 노려보며 말했다.
“데미안 황자님과 메이아가 결혼을 약속한 것도 아니고, 메이아가 청혼을 받아 준 것도 아닌데! 제가 바른말 한 게 그리 이상한 건가요?”
가뜩이나 토마스와 결혼할 여자라 더욱 세자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메릴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질투심은 마른 장작에 불붙듯 확 일어났다.
“메이아는 내 동생이라 잘 알아요. 걔는 황자비 안 할 거예요.”
“네, 여동생을 그리 잘 아시는 분이니 약혼녀 자리도 빼앗으신 거겠죠. 대단하십니다.”
메릴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입매를 비틀며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섰다.
일어나면서 의자가 뒤로 쾅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세자르 영애야말로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약혼녀 자리를 빼앗다니요!”
세자르는 뒤로 넘어간 메릴의 의자를 본 뒤, 고개를 들고 한쪽 입꼬리를 쓱 올리며 말했다.
“제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요.”
메릴이 조금 전까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리고 공녀님이시지만 저는 제 이름을 부르는 걸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메릴은 테이블 위에 있는 찻잔을 들고 세자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드레스에 차를 부었다.
“뭐 하시는 짓입니까!”
메릴은 차갑게 노려보며 비워진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옆에 있던 영애가 손수건을 꺼내며 세자르에게 건네주었다.
“이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 앗!”
짜증스러움과 질투심이 불같이 일어난 메릴은 더는 참지 않았다.
“꺅!”
“세상에!”
메릴은 세자르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루루나의 티 파티에 초대된 모든 영애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루루나가 티 파티를 열고 있는 장소는 황제 폐하가 친히 내려 준 예쁜 유리 온실이었다.
사계절 아름다운 꽃과 나무 새들이 지저귀는 동화같이 아름다운 곳이다.
루루나는 항상 꽃이 새로 필 때마다 티 파티를 열며 자신이 지은 시를 읊는 걸 좋아했다.
그렇지만 아름다웠던 장소는 영애들의 비명과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거 놓으십시오!”
메릴에게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힌 세자르 영애는 당황하며 빨리 머리카락을 놔 달라고 소리 질렀다.
주위에 있던 영애들은 발을 동동 굴리며 싸움을 말리라고 시녀들에게 다급히 말했다.
몇 명의 시녀들은 뭔가 결심한 표정을 짓고 메릴에게 다가갔다.
짜악!
시원한 따귀 소리와 함께 메릴에게 가까이 다가간 한 시녀의 얼굴이 돌아갔다.
“내 몸에 손대기만 해 봐!”
메릴에게 맞아 바닥으로 쓰러진 시녀는 몸을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자리에 있던 영애들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다른 시녀들은 쓰러진 시녀를 서둘러 부축했다.
“이거 놓으시죠, 공녀님! 이게 대체 무슨 짓이십니까! 품위 없게!”
“품위? 지금 나한테 품위 없다고 말한 거야? 진짜 품위 없는 건 바로.”
‘남의 남자와 결혼하려던 너야.’
“감히 나한테 언성을 높여!”
“루루나 마마 앞에서 언성을 높이시는 건 공녀님이십니다.”
메릴은 힘을 주어 세자르의 뺨을 강타했다.
짝!
이어서 머리를 강타했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세자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처참한 몰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