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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87화 (87/163)

87화

“사랑합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고백에 메이아는 활짝 웃었다.

테오도르는 정말로 끊임없이 입맞춤과 포옹을 한다.

처음에 알던 그 수줍음 많고 순둥순둥했던 테오도르가 맞나 싶다.

“메이.”

자신의 애칭을 부르는 테오도르의 검은 눈동자가 온통 ‘내 세상엔 당신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신사적으로 에스코트하던 태도와는 정반대로 바뀐다.

탁!

그는 벽으로 가볍게 메이아를 밀어붙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요염하게 젖은 검은 눈동자와 마주쳐 버리면 그의 두 팔 사이에서 빠져나가기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어렵다.

움직이지 못하게 두 팔 사이에 메이아를 가둔 채 그녀의 입술을 삼키며 정신없이 달콤한 숨을 밀어 넣고 입 안을 헤집어 놓는다.

‘내가 알던 테오도르는 어디로 떠난 것인가!’

눈물 많은 순둥순둥한 블랙 레트리버는 없어졌다. 수줍음을 벗어던진 테오도르는 정열적이다. 정열적이어도 너무 정열적이다. 그만 좀 뽀뽀하고, 그만 핥으라고 말을 하면 테오도르는 슬픈 눈망울로 눈썹을 내리며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죄송합니다, 메이.>

사과하는 그는 불쌍하고 측은한 얼굴로 다가온다.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약해진다.

그리곤 살살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는 그 모습이 왠지 안타까워 살짝 틈을 주면 배시시 미소 지으며 찰싹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어디를 가든 어미 닭만 졸졸 쫓아다니는 병아리라도 되는 양 따라다닌다.

잘생긴 테오도르가 이렇게까지 따라다니는 게 기분이 나쁘거나 부담스럽기보다는 묘하게 귀여워 보인다. 심장이나 머리가 간질간질해지면서 자꾸 입꼬리가 통제가 안 되고 올라간다.

“안살림 하시는 일이 더 많아져서 힘들어하실까 걱정이 됩니다. 힘드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애튼은 언제쯤 복귀하나요?”

“많이 건강해졌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횡령 사건으로 애튼이 빠르게 복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디자이너 클레리라의 장부를 통해 노르딕 부인이 누구에게 고가의 드레스를 뇌물로 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뇌물을 받은 가신들은 그만큼의 처벌을 받게 되었다.

“제일 골칫거리는 아무래도 라키아 남작, 그가 가지고 있는 비밀이겠죠.”

“그렇습니다. 일개 남작이 할 법한 인신매매업 수준이 아닙니다.”

레베카의 장부 덕분에 인신매매 소굴을 급습해 많은 사람을 구해 냈다.

푸링이 직접 나서서 공간 마법을 파훼하고 사람들을 구해 주었다.

그곳에는 인종별, 나이별, 성별로 잡혀 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잡힌 인신매매단 단원들에게는 모두 혀와 귀에 ‘문장의 저주’가 걸려 있다고 푸링이 말했다.

말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순간 그들은 죽는다.

그것이 흑마법의 ‘문장의 저주’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듭니다.”

테오도르의 염려에 메이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흑마법사란 마나에게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마나는 자연의 힘을 받아들이며 쓸 수 있는 기적이다.

어둠을 받아들인 마법사는 흑마법사가 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자연의 마나를 쓸 수가 없다.

푸링은 흑마법사를 만나면 도망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흑마법사가 무서운 존재입니까? 스승님.>

<흑마법사의 어둠은 위험합니다. 그들의 마나는 마법사에게 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위험한 존재라 할지라도 피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흑마법에 대응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세요, 스승님.>

푸링은 고민했고, 결국 메이아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며칠 마탑에 다녀오겠습니다.>

“라키아 남작이 입을 열지 않는다면 상상 이상의 고통을 주세요. ‘이 고통을 멈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요.”

메이아의 말을 듣던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메이아가 플로렌스 대공가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때 하츠벨루아 공작저의 루만은 전혀 평화롭지 못했다.

루만은 눈을 찡그리고 꽤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마 전 데미안 황자가 하츠벨루아 공작저에 방문해 메이아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 가문에서 황후와 후궁이 배출된다는 건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건 자매끼리 사이가 좋을 때 일이다.

카르펜 제국 사교계에서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메이아와 메릴은 사이가 좋지 않다.

사실 메릴이 황태자 파츠래리와 약혼하고 싶다고 한 이유는 그에게 반해서가 아니다.

<황후가 되면 메이아는 나한테 머리를 숙이겠지?>

<황후에게 머리를 숙이는 건 당연한 일이란다, 메릴.>

<아빠, 나 황후가 되고 싶어!>

메릴이 황후가 된다는데 욕심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황후와 황태자를 한 번 떠보았다. 생각한 대로 그들은 쉽게 메릴을 받아 주었다.

메이아는 별말 없이 ‘자유 결혼서’와 함께 약혼녀 자리에서 물러났다. 거기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마탑으로 떠나 주니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메이아가 떠난 이후, 매일 쌓여 가는 각종 연서와 선물, 청혼서에 피곤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데미안이 하츠벨루아 공작저로 찾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대체 루루나 후궁이 왜 메릴을 티 파티에 초대했지?’

문제는 여기 있었다.

루만도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던 메릴이 수도 내 영애들과 성격이 맞지 않아 잘 지내지 못하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루루나가 영애들과 사이 나쁜 메릴을 굳이 초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왔다. 메이아와 결혼을 요구하는 데미안과 메릴을 티 파티에 초대한 루루나의 의도도 모르겠다. 루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미안과 마지막으로 나눈 이야기가 생각났다.

<메이아에게 좋아하는 남자가 생긴다면 저는 삼촌으로서 결혼을 말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면 결혼할 남자의 사지를 조각조각 자르고 갈아서 바닷속 물고기 밥으로 던질 겁니다.>

<농담이 과하십니다.>

<농담으로 들리시나요? 제가 이렇게 보여도 꽤 성질이 급한 편입니다. 갖고 싶은 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합니다. 만에 하나 다른 누군가의 것이 될 거라면 내 손으로 그 모든 걸 부숴 버릴 겁니다.>

아름다운 얼굴과 다르게 잔인한 말을 웃으며 내뱉는 그를 보며 루만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메이아와 파혼 조건으로 계약한 자유 결혼서는 신전 공증까지 받아 놓은 상황이다.

즉, 메이아가 데미안과 결혼을 원한다면 5년 후에 시킬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성인식 때 돌아온 메이아에게 데미안은 바로 청혼할지도 모른다.

둘이 결혼이라도 하는 날이라면…….

‘돌겠다! 진짜 돌겠어!’

이런 상황이 올 걸 알았다면 자유 결혼서를 허락하지 않았다.

자유 결혼서를 활용해서 데미안과 결혼한다면 정말 상상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 초래될 것이다. 약혼녀 자리를 빼앗아 간 메릴과 자신에게 어쩌면 웃으며 복수할지도 모른다.

데미안과의 결혼은 무조건 막아야만 한다. 루만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며 초췌해져만 갔다.

그리고 펜을 든 루만은 황후 엘르민에게 데미안이 메이아와의 결혼을 강력히 원한다는 내용을 편지에 써 보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둘의 결혼만은 막아야 했다.

당연히 편지를 받아 본 엘르민 황후는 내용 그대로 황태자 파츠래리에게 알렸다.

“저는 메릴 공녀와 약혼을 끝내고 싶습니다. 다시 메이아 공녀와 약혼, 아니, 결혼하고 싶습니다.”

파츠래리는 이번 일로 많은 걸 깨달았다.

“저는 메릴 공녀와 결혼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래리! 황태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하츠벨루아 공작가의 힘이 필요하단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하렴.”

파츠래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메릴 공녀는 황후감이 아닙니다.”

“하지만 래리, 너무 섣부르게 결정할 일이 아니란다.”

“알고 있습니다. 만약 메릴 공녀와 파혼이 어렵다면 이건 어떠십니까?”

“말해 보거라.”

“한 가문에서 후궁과 황후가 배출되는 건 흔한 일입니다.”

“물론이지.”

“저는 메이아 공녀를 후궁으로 맞이한 다음, 후에 황후로 올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메이아만 황궁으로 들어와 준다면 예전처럼 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며 티 파티를 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엘르민의 입술이 저절로 호선을 그렸다.

“그렇지. 한 가문에서 황후와 후궁을 배출하는 일은 영광이기도 하지. 메이아 공녀 또한 후궁이 되는 일을 영광이라 생각하겠구나.”

“메이아 공녀는 제가 잘 달래면서 이야기해 보겠지만 메릴 공녀가 싫다 할 수 있습니다.”

“싫다 하더라도 일개 공녀 따위가 황가의 일에 토를 달 수 없는 법이지. 그건 황가와 하츠벨루아 공작가와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결정되면 싫다 하더라도 메릴 공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법이야. 황태자는 오로지 자리 보존해서 황제가 되는 일만 생각하렴.”

“알겠습니다.”

그때 쾅쾅거리는 노크와 함께 시녀장 그레이스가 헐레벌떡 들어와 외쳤다.

“마마! 마마! 큰일 났사옵니다.”

“그레이스, 무슨 일이냐.”

“그게, 그게.”

그레이스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메릴 공녀님께서.”

엘르민 역시 메릴이 오늘 루루나의 초대를 받고 티 파티에 참석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다급한 목소리로 뛰어 들어온 그레이스 모습에 엘르민은 불안해졌다.

“메릴 공녀가?”

“세자르 영애에게 차를 끼얹으셨다고 합니다!”

순간 엘르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재차 물어보았다.

“뭐라?”

“지금 세자르 영애와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싸우고 계신단 말입니다!”

엘르민은 너무 기가 막힌 이야기에 입술이 떨렸다.

그리고 파츠래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연히 향하는 곳은 메릴이 있는 루루나의 궁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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