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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85화 (85/163)
  • 85화

    메이아는 상냥하게 레베카에게 물었다.

    “원하는 걸 말해 봐요, 레베카.”

    “공녀님, 라키아라는 성을 없애 주세요.”

    “그럼 가지고 싶은 성은 있나요? 레베카.”

    “헤덴. 헤덴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레베카는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닦아도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얼마만큼 그녀가 악몽 속에서 버텨 왔는지 보여 주었다.

    메이아는 그런 레베카를 안아 주었다.

    “좀 자요, 레베카.”

    “잠들기가 싫습니다. 공녀님, 라키아 남작이 감옥에 가는 걸 봐도 그게 꿈일까 봐……. 두려워 잠들 수가 없습니다.”

    떨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슬픈 눈물과 분노가 가득했다.

    “흉터는 지워지지 않지만 흉터를 가려 줄 수 있는 미래가 다가올 거예요.”

    레베카는 메이아 품을 더욱 파고들며 눈을 감았다.

    “이거 꿈이 아니죠?”

    “꿈 아니에요.”

    “흐윽.”

    메이아는 자신의 품에서 눈을 감고 혼절한 레베카를 아그니타에게 말해 침대 위에 눕혔다.

    뺨과 눈가에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멍들이 가득했다.

    메이아는 직접 손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 그녀의 손과 얼굴을 닦아 주었다.

    “아가씨, 제가.”

    “아니야, 아그니타. 내가 하고 싶어.”

    메이아는 그녀의 팔과 손을 한참을 닦으며 바라보았다.

    “아그니타도 메릴 언니한테 이유 없이 맞았을 때 많이 아팠지?”

    “네, 아팠지만 아가씨 볼 생각에 견뎠죠.”

    “레베카는 어떻게 견뎠을까?”

    울컥함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으…… 음.”

    “레베카?”

    “공녀님.”

    레베카는 뒤척이다 살며시 눈을 뜨고 자신의 손을 닦아 주고 있는 메아아에게 말했다.

    “눈을 감았는데 어머니가 나타났어요. 평소에 ‘사랑한다’라고 안아 주던 어머니가 오늘은 ‘이제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라고 말해 주셨어요.”

    메이아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같이 지내던 사용인들도. 아버지도, 남동생도. 유모까지 모두 만났어요.”

    레베카는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여기 있는 게 꿈이 아니죠?”

    “아니에요.”

    “전 사실 지금 현재가 꿈이면 좋겠어요. 가족들과 유모가 만났던 그 꿈이 현실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레베카, 이곳이 현실이에요.”

    “지금의 현실도 괜찮네요. 제가 좋아하는 상황 두 가지 중 한 가지만 꿈이라 다행이네요. 다시 눈을 감으면 보고 싶은 이들이 꿈에 다시 나오면 좋겠어요.”

    “다시 누워서 눈을 감아 봐요.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려 봐요, 레베카.”

    레베카는 다시 눈을 감았다. 메이아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쥬안에게 말했다.

    “쥬안, 레베카가 말한 곳에서 모든 증거들을 가지고 와.”

    쥬안은 허리를 숙이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쥬안은 바로 텔레포트를 이용해 레베카의 어머니 묘 인근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땅속에 있는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를 꺼내 내용을 확인한 뒤 마법 이공간에 넣었다.

    쥬안은 주위를 정리하며 자라난 잡초를 뽑아 주었다. 국화꽃을 꺼내 레베카의 가족묘에 한 송이씩 올려 주었다.

    “명복을 빌겠습니다.”

    쥬안의 머리 위로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었다. 거센 바람 소리는 구슬픈 울음소리 같았다.

    레베카는 몇 번이고 잠을 자고 깨고를 반복했다. 워스트에게 부탁해 강력한 수면제를 먹여 푹 재우기로 결정했다.

    푹 잠이 든 그녀를 확인한 후, 방을 나선 메이아의 표정은 미묘했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불쌍한 인생일 줄 알았지만 그건 오만이었다.

    “그녀는 진정이 되었습니까?”

    “전혀요.”

    울컥거리는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차라리 화가 나면 좋겠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라키아 남작은 일부러 아름다운 어린 영애들의 집안을 망하게 하여 빚지게 한 다음, 결혼해서 학대 끝에 여러 남자에게 그녀를…….”

    더 잔인한 것은 혀를 깨물어 자살할 수 없도록 입에 재갈을 물리고, 혹여 자해해서 상품 가치가 떨어질까 몸을 움직일 수 없도록 묶어 놓았다 한다. 유일하게 자유로운 신체는 ‘눈’ 한 곳뿐이었다.

    어두운 방 한쪽에서 죽음만이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었을 거다. 그렇게 당한 여자가 레베카뿐만 아니라는 사실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테오, 제가 부탁 하나 할게요.”

    “얼마든지 이야기해 주십시오, 메이.”

    “남작을 편히 죽이지 말아 주세요.”

    “네.”

    “절대 죽음으로 도망치게 하지 마세요.”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테오도르는 슬픈 표정을 짓는 메이아를 끌어당겨 안으며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바로 잡겠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

    테오도르는 베르샤에게 라키아 남작을 잡아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만에 하나 반항할 시 아킬레스건을 자르고, 끌고 와.”

    “알겠습니다.”

    “베르샤.”

    “네.”

    “난 그자가 편하게 끌려오는 건 못 보겠어.”

    베르샤는 그가 원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알겠습니다.”

    라키아 남작은 갑자기 방으로 들이닥친 플로렌스 대공가의 기사들에게 붙잡혔다.

    그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아악! 뭐 하는 짓이야!”

    “라키아 남작! 대공 각하의 명이다.”

    “각하의 명이면 명이지! 당장 못 비켜?!”

    베르샤는 소리 지르는 라키아 남작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아악! 뭐! 끄아악!”

    라키아 남작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보이며 허우적거렸다.

    아킬레스건을 끊는 일은 ‘죄인이 도망치지 못하게 만든 처벌’ 중 하나이다.

    주로 극악한 범죄자에게 내리는 벌이다.

    베르샤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각하의 명이다. 편하게 끌고 오지 말라고 하셨다.”

    “아악! 아파! 아프다고!”

    양 발목에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은 피범벅이 되었다.

    라키아 남작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죄인이 타는 검은 마차에 태워졌다.

    “내가 무슨 죄로…… 쿨럭.”

    “인신매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노르딕 부인이 모든 걸 실토했다.”

    라키아 남작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노르딕 부인이 대체 뭘 실토했길래! 찔리는 구석이 너무 많아 뭐라 할 말도 없었을뿐더러 발목의 고통 때문에 생각의 집중이 되지 않았다.

    “노르딕 부인은 입만 열면 거짓말하는 사람이라……. 그 여자의 말만 믿고 날 이렇게 대하는 건 큰 실수네!”

    “증거가 확실하다 하셨지.”

    “크으…….”

    그렇게 지하 감옥에 끌려간 라키아 남작을 기사들이 거칠게 의자에 앉혔다.

    그의 맞은편에는 테오도르가 앉아 그를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베르샤, 너무 멀쩡하게 끌고 왔어.”

    “죄송합니다.”

    테오도르는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 꼰 다리 위에 올려놓으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라키아 남작.”

    “……예.”

    “레베카는 살아 있더군…….”

    “……!”

    분명 저택의 비밀 공간에 그녀를 숨겨 놓았다. 찾을 수 없는 곳이다. 그곳에는 오로지 많은 돈을 지불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그곳을 어떻게…….”

    라키아 남작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들키지 말아야 할 치부를 들킨 기분.

    “레베카가 어떻게 살아서 대공가까지 온 게 궁금하겠지. 그녀는 나에게 꽤 좋은 장부들을 넘겨주었어. 그 밖에 자네는 노르딕 부인과 횡령도 즐겨 했더군. 그걸로 사람을 사고팔고 또는 납치해서 인신매매했을 때는 즐거웠겠지…….”

    “횡령이라니요!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쾅!

    테오도르는 매섭게 책상 위를 내려쳤다. 라키아 남작은 그 모습에 겁을 먹고 덜덜 떨었다.

    “네 뒤를 봐주던 놈이 누구지?”

    “뒤라니요…….”

    “인신매매는 너 같은 사람이 배후이자 총책임자일 리가 없다는 소리야, 라키아 남작.”

    그분에 대해서 말한다면 죽는다. 이리 죽나, 저리 죽나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저 한 사람 사라졌다 하더라도 사람이 사고 판매되는 일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아주 충성스럽군.”

    “배후라……. 제가 그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유는 세상 사는 재미를 안겨 주신 것에 대한 작은 감사라고 해 두죠.”

    사람을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지 않다면 살아도 사는 재미가 없다.

    “굳이 살아서 재미없게 산다면 그게 삶입니까?”

    가문의 명예도, 라키아 남작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죽이십시오. 그저 미련이 남아 있다면 메이아 공녀를 네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지 못한 것입니다, 크하하하하.”

    퍽.

    테오도르는 메이아를 언급한 라키아 남작의 멱살을 끌어 올려, 있는 힘껏 주먹으로 그의 안면을 때렸다. 그는 코피가 터졌지만 오히려 큰 소리로 웃으며 이 상황을 즐거워했다.

    “쿨럭…… 크크.”

    표정을 싸늘하게 가라앉힌 테오도르는 덤덤히 말을 했다.

    “재판을 올리기 전까지 죽지 않을 만큼 고문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성수를 사용하도록.”

    *

    테오도르와 메이아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개 재판을 열기로 했다.

    공개 재판이 열리면 사람들은 던질 수 있는 ‘돌’을 챙겨 온다. 그 외에 던질 수 있는 ‘쓰레기’도 챙긴다. 챙겨 오는 이유는 재판 진행 과정에서 잠시 휴정할 때 ‘돌’과 ‘쓰레기’를 죄인들에게 던지기 위함이다.

    그리고 재판 날짜는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공개 재판이 열리는 곳은 돔 모양의 넓은 재판정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재판장이 앉으며 중간에는 재판을 지켜보는 사람들과 피해자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 죄인이 묶여 있게 된다. 죄인은 자신의 죄를 고할 때만 고개를 들 수 있다.

    라키아 남작과 노르딕 부인과 그의 남편 그리고 다이애나는 결박당한 채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기사들 손에 가장 먼저 끌려온 노르딕 부인에게 재판장은 물었다.

    “노르딕가의 아만다는 플로렌스가의 횡령과 더불어 라키아 남작과 인신매매를 했다는 증거가 있어 죄인의 신분으로 앉았다. 이 모든 혐의를 인정하는가?”

    “인정합니다. 라키아 남작이 인신매매로 이득을 취한 걸 알고 묵인했습니다. 횡령의 죄를 반성하고자 모든 증거를 드립니다.”

    라키아 남작은 노르딕 부인의 말을 듣고 억울해했다.

    “억울합니다! 저는 횡령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판장 손에 있는 장부들은 레베카가 라키아 남작의 집에서 갖은 학대를 받으며, 언젠간 복수할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간직했던 ‘증거’들이다.

    “노르딕 부인이 제시한 증거 자료들의 필체와 라키아 남작의 필체가 일치한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땅, 땅, 땅.

    “말, 말도 안 돼.”

    “라키아 남작에게 장부를 건네주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보좌관은 장부 한 권을 라키아 남작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본 라키아 남작의 얼굴을 하얗게 변해 갔다.

    “말도 안 돼! 저게 왜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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