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애쉬 오빠!”
다이애나는 눈물을 흘리며 애쉬에게 뛰어갔다.
“다이애나?”
애쉬는 다이애나의 우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야?”
“흑…….”
애쉬는 다이애나의 어깨를 잡았다.
“말해. 왜 울어?”
“엄마가…… 엄마가 지금 감옥으로 끌려가셨대!”
아침에만 하더라도 의기양양하게 안살림 권한을 다시 가져올 수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집무실에 가셨던 어머니가 갑자기 감옥에 갇히다니!
‘설마 횡령하던 일이……!’
“그 공녀가 무슨 수를 쓴 것 같아!”
“메이아 공녀님이?”
“공녀를 만난 뒤에 감옥에 끌려갔어. 함정에 빠지신 게 분명해!”
“다이애나, 어쩌면 횡령 일이 걸렸을지도 몰라.”
다이애나가 가장 부정하고 싶은 내용이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눈물을 계속 흘렸다. 횡령 일이 걸리면 당연히 감옥에 간다.
“하지만 증거가 없잖아.”
귀족을 처벌하려거나 감옥에 보내기 위해선 ‘증거’가 있어야 한다.
횡령이 걸렸다는 건 메이아가 완벽하게 장부를 파악하고 증거를 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머리가 좋은 여자라는 건 알았지만 안살림 맡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다이애나, 울지마. 우린 끝까지 횡령 일은 모르는 거야. 이런 일을 대비해 우리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던 거 기억하지?”
“아는데…… 그런데 애쉬 오빠.”
“넌 어서 대공을 유혹해.”
“그건 걱정하지 마.”
‘빨리 대공에게 미약을 써야겠어.’
다이애나는 한층 더 괴롭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애쉬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께서 만든 장부는 완벽해. 걸릴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만에 하나 걸린 거라면 우리 빨리 집으로 내려가야 한다.”
“방에 가서 얼굴 좀 씻고 다시 올게.”
다이애나는 방으로 돌아가 품 안에 미약을 챙기며 임신이 잘되는 약을 벌컥벌컥 마셨다.
더는 질질 끌 시간이 없었다.
다이애나는 펜과 종이를 꺼내고 글을 적었다.
[저희 어머니에 대해 할 이야기 있습니다. 단둘이 만남을 요청합니다. 급한 일입니다.]
“아그니타! 대공 각하에게 이 쪽지를 전해 줘.”
“네, 아가씨,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아그니타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이애나가 건네준 쪽지를 테오도르가 아닌 메이아에게로 가져갔다.
그걸 펼쳐 본 메이아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테오도르는 현재 자신의 연인이다.
말 잘 듣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테오도르에게 미약을 먹이고,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걸까?
다이애나의 더러운 생각과 행동에 혐오감이 들었다.
“정말 역겹네.”
“맞아요!”
“아그니타, 고생 많았어. 쥐덫에 훌륭하게 치즈를 올려 주었어.”
“아가씨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넌 항상 나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야, 아그니타.”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는 아그니타에게 메이아는 미소 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
지금 다이애나의 눈동자는 메이아를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왜 테오도르가 안 오고 그녀가 이 자리에 온 것인지 의문이 가득했다. 분명 아그니타는 쪽지를 건네주었고, 테오도르가 응접실에서 보자고 한 답변까지 아그니타가 받아 왔다.
하지만…….
“지금 대공님은 노르딕 부인을 심문 중이라 못 오신다 해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그니타가 다과와 차를 내왔다.
다이애나의 사나운 시선에도 메이아는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마을에서 마약과 독약을 팔던 불법 약장수가 잡혔습니다. 그는 스스로 의원이라 말하고 다녔고, 흉측한 화상을 입은 자더군요.”
다이애나의 얼굴이 굳었다.
‘흉측한 화상을 입은 의원이라면.’
자신에게 약을 팔았던 사람을 떠올렸다. 메이아는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래서요?”
“구매하신 독약을 몸에 지니고 있나요? 노르딕 영애.”
돌직구 질문에 다이애나는 입을 다물었다.
메이아의 차 받침대 위에 찻잔을 올리는 소리가 달그락거리며 유독 다이애나의 귓가에 크게 들렸다.
차를 음미하며 마시는 그녀의 모습은 한없이 여유롭게 보였다.
“모욕을 당한 여자는 한을 품는다고도 하지만 그렇다고 독약으로 날 죽이려고 했던 건 실수야.”
푸른 눈동자와 마주친 다이애나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자신의 몸을 묶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압박해 숨을 멎게 하는 것 같았다.
“무,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탁.
“진실을 말하면 살려 줄 예정이었지만 그럴 생각이 없나 보군. 아그니타, 가지고 와.”
“예, 아가씨.”
아그니타는 품에서 다양한 약병들을 꺼내 보여 주었다.
“영애 방에서 발견된 것들이야. 약을 숨기려면 잘 숨겼어야지.”
다이애나는 고개와 손을 저으며 아그니타를 쳐다봤다.
“화상 입은 의원은 노르딕 영애가 구매한 걸 실토했어.”
“말도 안 됩니다! 아그니타, 말 좀 해 봐!”
하지만 아그니타는 다이애나를 차갑게 응시할 뿐이었다.
“독약으로 날 죽이고 싶다고 의원에게 말했잖아.”
메이아의 말에 억울하다는 듯 다이애나는 소리쳤다.
“그자에게 독약은 구매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미약만 구매해…… 헙!”
입을 막아 보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메이아가 다 듣고 말았다.
“미약만 구매라…….”
메이아는 기품이 느껴지는 차가운 얼굴로 대꾸했다.
“임신이 잘되는 약도 같이 구매한 걸 알아. 임신 잘되는 약을 먹은 뒤에 내 남자에게 미약으로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걸까?”
다이애나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저 자리에 앉아 주먹을 꽉 쥐고 떨 뿐이었다.
“미약도 구매한 네가 독약은 구매하지 않았다고? 그걸 누가 믿어 주지?”
들켰다며 초조해하는 그녀 모습에 메이아는 입술을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아그니타, 스승님 좀 모셔와 줘.”
“알겠습니다.”
응접실 문밖을 열고 나가는 아그니타의 뒷모습을 다이애나는 허탈하게 쳐다봤다.
푸링이 응접실에 들어오고 메이아의 찻잔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가 마법 이공간에서 아티팩트를 꺼내 찻잔에 겹쳐 놓자 잔의 가장자리가 환하게 빛을 내다 이내 검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독입니다.”
“무슨 말이에요! 독이라니요!”
다이애나는 억울하다며 크게 소리쳤다. 미약은 구매했지만 독약은 절대 구매한 적이 없는 데다가 갑자기 차를 마시던 메이아의 찻잔에서 독약이 검출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난 독약을 타지 않았어! 방금 전까지 잘 마셨잖아.”
다이애나는 억울해했다. 미약만 구매했지 독약을 구매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우리 엄마한테도 누명을 씌운 거지?”
독약이 발견된 시점부터 아무리 귀족 영애라고 하지만 몸수색을 당할 수밖에 없다.
한나는 메이아가 독약을 먹을 뻔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앞장서 다이애나의 드레스 구석구석을 뒤져 그녀가 지니고 있던 약병을 찾아 꺼내 놓았다.
“약병입니다!”
“미약이라고!”
독약이든, 미약이든 다이애나가 가지고 있던 약병 이야기를 전해 들은 베나블과 시종, 시녀들은 분노에 휩싸였다.
푸링은 자신의 마법 이공간에서 아티팩트를 꺼내 다이애나 몸에 지니고 있던 약병을 검수했다.
“공녀님 찻잔에 묻은 독과 같은 독입니다. 공녀님께서 조금만 오른쪽으로 찻잔에 입을 대고 마셨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닙니다! 이건 미약입니다! 대공 각하에게 먹이려…… 헙.”
다이애나의 다급한 말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들었다.
아그니타는 눈물 한 방울 흘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아가씨가 널 잘 보살펴 달라며 아끼던 나를 네 곁에 붙여 주셨는데, 은혜를 이딴 식으로 갚아!”
울며 다이애나를 하대하는 아그니타를 그 누구도 제재하지 않았다.
“아그니타! 너 내가 약 살 때 옆에 있었고 그 의원 소개해 준 것도 너잖아. 그리고 감히 사용인 주제에 나에게 하대를 해?”
다이애나는 아그니타 덕분에 약을 구매했다고 말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그 어떠한 사용인들도 아그니타가 메이아에 대한 충심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있기 때문에 독약 구매를 도왔다는 말은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진짜야! 아그니타가 도와줬어! 왜 아무도 안 믿어 줘!”
다이애나는 계속 말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아그니타는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모두 아그니타를 위로하며 거짓을 말하는 다이애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고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테오도르가 기사들과 들어왔다.
그는 턱에 힘이 꽉 들어가 바르르 떨렸다.
“노르딕 영애를 잡아 독방에 넣어라.”
“대공 각하! 오해이십니다.”
“오해? 증거들이 눈앞에 있는데도 오해?”
테오도르의 말에 다이애나는 바로 깨달았다. 자신이 아그니타에게 철저하게 속았다는 걸.
깨달아도 이미 늦어 버렸다. 미약을 샀으면 안 되는 거였다.
기사들은 테오도르의 명에 따라 뒷걸음질하던 다이애나의 손목과 팔을 잡아 묶은 뒤 끌고 나갔다. 그는 메이아를 불렀다.
“괜찮으십니까? 메이아 공녀님.”
다이애나에게 말할 때와 달리 부드럽고 달콤한 어조였다.
“괜찮습니다.”
테오도르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그녀의 뺨을 만졌다.
“걱정했습니다.”
“걱정할 일은 없었어요.”
메이아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테오도르는 몸을 떨며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나블과 한나 그리고 시녀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도끼눈을 뜬 채 굳어 버린 아그니타를 억지로 끌고 응접실 문을 조용히 닫고 나갔다.
“걱정할 일이 없었어도 막상 독약 이야기를 듣는 제 심정을 조금만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는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몸이 앞으로 쏠린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테오도르는 낮게 속삭였다.
“독약을 마실 뻔했다는 이야기에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는 무서웠다는 듯 메이아를 꽉 끌어안았다. 위로해 달라며 낑낑 우는 커다랗게 귀여운 블랙 레트리버가 따로 없었다.
“메이아 공녀님.”
“네?”
“메이아.”
“네.”
“메이.”
테오도르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랑합니다.”
후진 없는 고백과 함께 그의 손가락이 입술에 닿자 메이아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노크를 시작했다.
그의 오른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감고, 왼손이 턱을 들어 올렸다.
‘정말 요망한 블랙 레트리버.’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입술이 포개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혀가 뜨겁게 얽혀들어 갔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뒤통수를 받치고 허리에 두른 팔을 당겨 몸을 점점 밀착시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