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테오도르는 머리를 쓰다듬는 메이아의 손을 잡아서 다시 자기 얼굴에 갖다 대며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세상 그 누구도 믿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다정한 목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그 진심이 담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메이아의 마음은 차분하게 진정이 되었다.
“이번에도 믿어 줘요. 테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는 그녀의 손등에 깊게 입을 맞추며 올려다보았다.
“알겠습니다.”
메이아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귀족을 벌하기 위해선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죽여야 할 귀족이라면 ‘증거’ 가지고는 부족하다. ‘명분’이 필요하다. 왜 죽여야 하며, 그들의 죽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상대방이 날 찍어 누를 때 얻는 것이 무엇일지. 내가 상대방을 찢어 버리면 얻게 되는 것들이 무엇일지. 어떠한 ‘명분’을 가지고 상대방을 죽이느냐에 따라 악당이 될 수도 있고, 영웅이 될 수 있다.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명분’이 충분하다면 그가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잘라 내고 뿌리를 뽑아내야 한다.
귀족의 위치는 곧 책임감이다.
얕잡아 보이는 순간, 책임져야 할 모든 것을 지킬 수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죽이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죽이느냐에 있다.
“그러면 저는 노르딕 부인의 명분을 파헤쳐야겠어요.”
*
노르딕 부인은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집에 가라고 할 때 떠났더라면.
이렇게 창피를 당할 일도, 당황할 일도, 횡령한 일들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도 겪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서 노르딕 부인, 그동안 바꾼 가구를 팔았다는 겁니까? 기증했다는 겁니까? 아니면 경매?”
노르딕 부인은 대공가에서 더 지내기 위해 메아아에게 인수인계해 주겠다는 명목하에 집무실로 당당히 찾아갔다. 하지만 메이아의 말 몇 마디에 당당함은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왜 대답을 안 하시는 겁니까?”
대답을 미룰 수 없었던 노르딕 부인은 입을 열었다.
“오래된 가구는 버렸습니다. 그리고 최근 바꾼 가구들은 창고에 보관 중입니다.”
메이아는 노르딕 부인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비싸게 구매한 가구들이 오래돼서 버렸다?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애송이 공녀라 무지할 거라고 생각을 했던 건가?’
메이아는 현재 플로렌스 대공가의 안살림을 맡았으며 테오도르와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권한을 가진 사람으로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굳이 들어 줄 필요는 없다.
얼마든지 지적하고 내칠 수도 있다.
“창고에 보관 중이라.”
메이아의 푸른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친 노르딕 부인은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의자, 테이블, 커튼 등등 수시로 바꿔야 할 만큼 오래되어서 버리고 계속 구매한 것입니까?”
“네.”
“물건 보는 눈이 없으시군요. 장부도 엉망으로 작성하셨고.”
메이아의 말에 노르딕 부인은 보기 불쌍할 정도로 덜덜 떨었다. 자존심이 무척 상한 것이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하츠벨루아 공녀님.”
메이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입니다. 대체 저에게 뭘 인수인계해 주신다는 거죠?”
노르딕 부인의 얼굴을 빨개졌다. 새파랗게 어린 공녀에게 안살림 일로 지적받았다.
“제가 왜 지적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구들은 바꿀 만해서 바꾸었습니다.”
메이아는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보던 장부를 덮어 버리며 말했다.
“가구를 장부에 적어 놓은 그 금액을 주고 구매했는데, 그 가구가 낡아져서 버렸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노르딕 부인.”
“가구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좋지 않은 가구를 팔았던 가게와 계속 거래하신 겁니까?”
“그, 그건.”
메이아의 지적에 노르딕 부인은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계속 꼬투리 잡힐 게 뻔했다. 등 뒤에 식은땀이 계속 흘렀다.
“노르딕 부인, 안살림 비용을 어떻게 사용하신 건가요? 제 앞에서 안살림을 잘 운영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신가요?”
메이아가 말할수록 노르딕 부인은 몸을 잔뜩 긴장시키며 책상의 장부들만 쳐다봤다.
“예…….”
하지만 그녀는 방긋 웃으며 나긋나긋한 어조로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었다.
“가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니 자꾸 사기를 당하신 거라 생각이 듭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가구를 자주 바꾸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렇죠, 노르딕 부인?”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데, 메이아가 하는 말들은 왜 이렇게 마음을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드는 걸까?
“노르딕 부인, 가구 감정사를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가구 가게에서 노르딕 부인에게 사기를 친 것이라면.”
메이아는 눈을 내리깐 채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말했다.
“가구를 팔았던 곳에 귀족을 능멸한 죄가 아닌 대공가를 능멸한 죄를 물을 것입니다.”
메이아의 말에 부정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부정하는 순간, 가구를 판매한 가게에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초대한 손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분이 마침 가구 감정사입니다.”
노르딕 부인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가구 감정사라는 직업도 있습니까?”
“네, 가구의 나무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사람이죠. 오늘 도착할 겁니다. 텔레포트를 타고 말이에요. 그러니 있다가 창고에 있는 가구들을 같이 살펴보죠.”
“네…….”
“노르딕 부인,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가구는 잘 모르면 사기당하기 쉬운 법이랍니다. 그래서 저희 공작저에서도 단 한 분에게만 의뢰를 넣어 가구를 만들었답니다.”
플로렌스 대공가의 횡령이 가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걸 눈치챈 메이아는 좀 더 정확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얼마 전 드워프 가구 장인인 알베르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고맙게도 그는 와 주었다.
그는 다른 타 드워프들과 다르게 보석보다는 나무에 관심이 많고, 그걸로 가구를 만드는 걸 좋아한다. 하츠벨루아 공작저 가구들은 모두 알베르트의 솜씨다.
“어서 와요! 드워프계의 꽃미남, 알베르트 님.”
짧은 키와 굵은 근육 그리고 거친 수염과 머릿결, 태양에 적당히 그을린 피부는 드워프의 미의 상징이다.
“허허허! 외모 칭찬은 지겹습니다. 메이 아가씨, 이게 몇 년 만입니까! 쑥쑥 성장하셨군요.”
데이빗과 바이올렛의 비보를 전해 들었다.
“데이빗과 바이올렛 님의 일은 안타깝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플로렌스령에, 그것도 대공가에 있으신 겁니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해 드릴게요. 우선 할 일이 있으세요.”
알베르트는 그녀가 보낸 편지 내용을 기억했다. 가구의 감정 부탁이었다.
“이 알베르트는 명품 가구를 볼 생각에 기대됩니다.”
“하지만 명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하하! 아무튼, 가구를 보는 건 저에게 즐거운 일이랍니다, 공녀님.”
그는 진심이었다. 가짜가 명품처럼 보인다면 그 이유를 파악하는 것 또한 즐기는 진정한 장인이었다.
“한나.”
유능한 시녀장 한나는 메이아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노르딕 부인을 창고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공녀님.”
메이아는 드워프 장인 알베르트, 그리고 베나블 집사와 함께 창고 앞에 왔다.
베나블이 창고의 문을 열자마자 먼지가 한 차례 반겨 주었다.
“베나블.”
“예. 공녀님.”
“창고 청소를 아무도 하지 않은 거야? 명품 가구들이 잔뜩 있는데도?”
“예, 창고는 아무도 건드리지 말라고 노르딕 부인께서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땐 안살림 권한이 노르딕 부인에게 있었으니 저희는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청소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공녀님.”
알베르트는 창고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자와 화장대를 비롯해 나무로 된 모든 걸 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구를 만질수록 알베르트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가득해졌다.
“알베르트, 표정이 좋지 않네요.”
“제 표정이 뭘 말하는지 아시면서.”
시녀장 한나가 노르딕 부인을 데리고 창고 앞으로 왔다.
“공녀님, 모시고 왔습니다.”
“노르딕 부인.”
창고 안에서 돌아다니는 알베르트를 가리키며 메이아는 말했다.
“노르딕 부인, 이 분은 드워프 가구 장인 알베르트라고 해요. 저와 친분이 있는 사이입니다.”
“아, 네.”
노르딕 부인은 가구 감정사가 오면 어떻게서든 돈으로 매수하려고 했지만, 생각지도 못했다.
드워프 장인이라니! 절대 돈으로 매수되지 않을 이종족!
무엇보다 친분이 있다면 매수는 불가능하다.
노르딕 부인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 갔다. 몸 안의 피가 대지 위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다.
“알베르트, 가구들은 다 어떤가요? 노르딕 부인이 명품 가구라 이야기했고, 장부 또한 명품 가구다운 금액이 적혀 있었습니다.”
알베르트는 한숨을 쉬며 가구를 하나씩 분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행동을 제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마법 이공간을 열어 분해된 가구들을 넣으며 유쾌하게 말했다.
“사과나무로 만든 가구라니! 하하! 여기 있는 가구들 다 쪼개서 장작으로 가지고 가도 되겠습니까?”
알베르트는 명품 가구 감정을 위해 왔다가 뜻하지 않은 장작감들을 많이 얻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사과나무라 했습니까?”
“이걸로 가구 만든 사람이 누군지, 허허.”
알베르트의 말에 뒷걸음치던 노르딕 부인은 창고 문 앞을 서 있었던 베나블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노르딕 부인, 이런, 왜 그리 땀을 흘리시는 겁니까?”
베나블의 온화한 웃음과 다정한 말에도 불구하고 노르딕 부인은 덜덜 떨리는 몸을 감출 수가 없었다.
메이아는 덤덤히 말했다.
“한나, 당장 가구를 판 가게에 기사들을 보내 가구 업자들을 모조리 잡아 와.”
“알겠습니다, 공녀님.”
“노르딕 부인.”
메이아는 태연하게 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 그녀를 사근사근 부르며 다가갔다.
노르딕 부인은 드레스 자락 사이로 떨리는 손을 감추었다.
“네, 공, 공, 공녀님.”
노르딕 부인은 어서 이 불편하고, 횡령이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저, 저.”
그렇지만 몸은 떨리고 말은 계속 더듬었다.
“드워프 장인은 거짓을 고하지 않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 있을까?
“그러니 가구를 판 가게가 문제였군요.”
노르딕 부인은 딸기처럼 새빨개지며 말했다.
“그, 그렇습니다. 못, 못, 모모, 못된 곳이네요.”
“이런, 너무 놀라셔서 말을 더듬거리시는군요. 안타까워라. 5년 동안 속아 구매하셨으니 무척 속상하시겠습니다.”
메이아는 노르딕 부인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말했다.
“기사들을 보냈으니 금방 잡혀 올 거예요. 그리고 가구로 사기를 친 사기꾼들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을 겁니다.”
메이아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은 노르딕 부인도 속였으니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그동안 노르딕 부인께서 가구 때문에 속상하셨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네요.”
메이아는 화사하게 웃으며 노르딕 부인의 손을 위로하듯 두드려 주었다.
“이젠 끝났어요. 더는 걱정하지 마요, 노르딕 부인.”
창고 뒤에 서 있던 베나블은 메이아 말에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분명히 전에도 말했죠? 귀족 능멸죄가 아닌 플로렌스 대공가를 상대로 사기를 쳤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게 될 거라고.”
메이아는 화사하게 웃었지만 노르딕 부인은 웃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