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아그니타는 의원을 만나고 왔다며 다이애나에게 그의 말을 전했다.
“직접 와 달라고 하셨어요. 자신은 흉한 얼굴 때문에 못 돌아다니신대요.”
“알겠어. 나갈 채비를 도와.”
“예, 다이애나 아가씨.”
다이애나는 메이아를 갈기갈기 찢어 없애는 상상을 했다. 생각만 하더라도 짜릿하고 속이 시원했다.
‘대공의 아이만 가진다면.’
다이애나는 주먹을 꽉 쥐며 메이아에게 복수할 때가 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테오도르에게 미약을 먹인 뒤 합방 이후를 상상하며 위험한 생각을 했다.
‘아이를 낳은 뒤에 테오도르 대공을 죽이고 대공가 재산을 모두 갖는 거야.’
엄마도, 오빠도, 아빠도 모두 자신의 눈치를 보며 살아갈 것이다.
대공비가 되기 위해 힘들게 공부할 필요도 없다. 아이만 생기면 모든 게 자신의 것이 된다.
다이애나는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웃으며 핑크빛 미래를 생각하고 즐거워했다.
“실력이 좋다고 들었어.”
아그니타가 데리고 나온 의원은 낡은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등이 굽어 있었다. 의원은 로브를 깊게 눌러쓰며 말했다.
“귀하신 분이 오셨군요. 제가 화상을 심하게 입어 얼굴을 못 보여 드린 점 죄송합니다.”
다이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이 손등의 보기 흉한 화상 자국을 보이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남자에게 통하는 미약이 있을까?”
의원은 화상 입은 쭈글쭈글한 흉한 손을 감추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 여자한테 통하는 미약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척 비싸답니다, 귀하신 분.”
“돈은 얼마든지 줄게. 그리고 임신이 잘되는 약도 있을까?”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 불법적인 약이라. 걸리면 저는 죽은 목숨일지도, 쿨럭.”
가래 낀 목울대에서 거친 기침이 나왔다. 다이애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돈은 달라는 대로 줄게.”
죽을 듯이 기침을 하던 의원은 기침을 갈무리하며 다이애나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귀하신 분 앞에서 기침을 심하게 했습니다. 10만 골드 주십시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대공가를 가지기 위해서는 투자할 만한 돈이었다.
“알았어. 약은 바로 가져갈 수 있는 거지?”
의원은 세 가지 약을 챙겨 주며 사용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단둘이 있을 때, 입술에 바르시고 억지로라도 남성분의 입을 맞추시면 약효가 바로 돕니다. 그러면 이성의 끈을 놓고 오로지 쾌락만 추구하게 되죠. 약간의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사고를 치기에는 아주 좋은 약이죠.”
“여자에게 통하는 미약은?”
“먹이면 됩니다. 다만, 부작용이 심합니다. 정신을 잃을 수도 있으며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의원의 말에 다이애나는 번들거리는 욕망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했다.
“돈은?”
“돈은 아그니타를 통해서 보내 주겠어.”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애나는 메이아에게 미약을 먹인 뒤에 노숙자 굴에 던져 버릴 생각을 하자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
‘어리석은 다이애나.’
메이아는 딸기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쥬안의 보고를 들었다.
“아가씨, 예상대로 움직였습니다.”
다이애나는 라키아 남작이 노예들에게 쓰는 미약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인 데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테오도르의 말에 급한 마음이 들었을 거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걸 가지기 위해 욕심을 내며 어떻게든 가질 방법을 찾는다.
그러니 아그니타가 꺼낸 ‘약과 의원’이라는 단어를 듣고 라키아 남작이 주지 않는 미약을 구매함으로써 즐거워하고 있을 것이다.
꿈이 달콤하고 즐거울수록 그 꿈이 꺾일 때는 그 몇 배로 좌절한다.
‘지금은 즐겁게 상상하며 놔둬야지. 그래야 곧 꿈에서 깨어났을 때 충격이 클 테니까.’
때때론 가질 수 없는 걸 포기해야 하는 것 또한 자신과 자신이 속한 가문을 지키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듯하다.
“남자에게 통하는 미약뿐만 아니라 여자에게 통하는 미약도 구매했습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예상대로 움직이는구나.”
만에 하나 테오도르가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노르딕 부인이 토 달지 않고 들었다면 반성했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끝내 그들은 기회를 날린 것이다.
횡령은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죄’ ‘돈이 탐나서 저지른 죄’이다.
돈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느냐, 아니면 없느냐. 그 차이일 뿐이고.
노르딕 부인은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결국, 횡령이란 죄를 저질렀다.
횡령은 용서받을 수 있고 사형까지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플로렌스 대공과 타국의 공녀인 자신에게 약을 먹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건 제국 간의 문제도 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은 플로렌스 대공가의 의뢰를 받고 마탑의 마법사로 왔다.
마탑의 마법사에게 약을 먹인다? 이건 마탑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하지 않는 짓이다. 아니, 조금만 생각이란 걸 한다면 저지르지 않을 ‘죄’다.
머리가 장식품이 아니라면 생각이란 걸 할 텐데, 그냥 장식품이었던 모양이다.
머리 스타일 보여 주기 위한…….
메이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희고 가는 손을 살짝 쥐었다.
“정말 용서해 주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네.”
“아가씨는 너무 자비로우십니다.”
“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면.”
메이아는 내려놓은 찻잔을 다시 들어 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좋았을 텐데. 안타까워.”
“동정도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동정심이 아니란다, 쥬안.”
“네?”
“예상한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아 실망했을 뿐이야.”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메이아는 마저 딸기 차를 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대로 다이애나의 저택으로 가, 숨긴 약을 찾아 막다른 길로 몰아 버릴까?
아니면 자신과 테오도르에게 미약을 먹일 때까지 기다릴까?
그것도 아니면 바로 죽일까?
다양한 계획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다이애나는 약을 구매했을 뿐이지 그걸 직접 활용하진 않았다.
물론 약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궁지로 몰아갈 수 있다.
많은 수가 있지만, 정석대로 가는 게 가장 낫겠지?
메이아는 곧장 테오도르에게 찾아가 다이애나가 미약을 손에 넣었다는 말을 했다.
“아그니타가 쥐덫에 치즈를 잘 올렸습니다.”
아그니타가 한 일은 다이애나를 의원에게 데리고 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미약을 구매할 수 있도록 충동질하는 일이었다.
“정석대로 가시죠, 대공님.”
“알겠습니다, 베나블.”
“예.”
“당장 베르샤를 불러.”
“알겠습니다.”
*
뒷골목에 대공가의 기사단이 도착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플로렌스 대공가를 상징하는 느티나무와 늑대가 그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무슨 일인지 호기심 가득하게 기사들을 쳐다봤다.
제1 기사단장인 베르샤 아이작은 말했다.
“당장 죄인을 끌고 나오도록!”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기사단장인 베르샤의 명령에 따랐다.
대체 어떤 죄인을 잡으러 왔을까? 궁금해하던 사람들은 이내 누굴 잡았는지 알려지자 흥분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독약을 팔던 늙은 약장수가 잡혔다네요.”
“의원도 아닌데 의원인 척 약을 팔고 마약도 팔았다 하네요.”
“어머머! 세상에, 정말이요?”
“끔찍하네요. 그러면 기사들이 그 약장수를 잡으러 온 것이네요.”
“그렇다고 하네요.”
“독약을 누구에게 먹이려고 했을까요?”
“제가 듣기론 이미 죽은 사람이 있다네요!”
“끔찍하네요.”
해적들 빼고는 평화로운 플로렌스령 사람들에게 큰 사건이었다.
기사들은 뒷골목으로 들어가 검은 로브를 꾹 눌러쓴 한 사람을 끌고 나왔다.
바람이 불고 머리에 쓰인 로브가 벗겨지자 범인의 흉측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화상으로 쭈글쭈글해진 코가 녹아 거의 없었다. 그는 로브가 벗겨지자마자 주저앉아 외쳤다.
“제발 로브 씌워 줘! 쿨럭쿨럭, 제발!”
그는 화상 입은 흉측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마을 사람들은 잡혀 나온 범인을 보며 수군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기사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반항하는 그를 검은 마차 안에 넣고 떠났다.
사람들은 기사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뒤 삼삼오오 모여들며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범인을 잡아 왔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테오도르는 범인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한 뒤에 메이아에게 바로 찾아갔다.
“범인은 지하 감옥 1인실에 계십니다.”
메이아는 웃으며 말했다.
“범인, 아니, 범인 역할을 하는 퀴니에게 대우를 잘해 주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일이 끝나면 따로 퀴니에게 보상할 예정입니다. 직접 보니 화상이 정말 정밀했습니다. 그 누구도 퀴니라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의원인 척하는 약장수라고 생각합니다.”
다이애나에게 약을 판 사람은 마법 아티팩트로 화상을 심하게 입은 것처럼 모습을 바꾼 화가 퀴니였다. 그리고 다이애나를 퀴니에게 데리고 간 것은 아그니타다.
그들은 자신의 할 일을 충분히 잘해 주었다. 역시 가족 같은 내 사람들이다.
“라키아 남작의 와인 가게들도 모두 확인했습니다. 수상한 자들에게는 모두 미행을 붙였습니다.”
플로렌스령 비밀 정보원 스텔라는 테오도르의 명을 받고 계속 라키아 남작을 미행하고 도청했다. 그는 메이아에게 쓸 미약을 구하기 위해 나갈 때마다 들린 가게들이 있었다.
그리고 스텔라는 그가 찾아간 곳을 모두 표시해 두었다.
“노르딕 영애를 그냥 잡아서 탈탈 털어도 괜찮겠지만 이왕이면 대공의 연인인 하츠벨루아 공녀를 질투한 노르딕 영애가 독약으로 공녀를 살해하려 했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어때요? 테오?”
그녀의 담담하고 차분한 말에 테오도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말했다.
“메이가 위험해지는 건 싫습니다.”
“그 약을 준비한 건 저예요. 위험한 약이 아니니, 위험해질 일도 없죠. 그 약은 체온만 살짝 올려 줄 뿐이에요.”
테오도르는 의자에 앉은 메이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걱정됩니다, 메이.”
“걱정 끼치지 않을게요.”
테오도르는 지그시 메이아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공가 일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이아는 몸을 앞으로 더 내밀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오히려 제 말을 믿고 따라 줘서 고마워요.”
믿어 주거나 같이 실행에 옮겨 줄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말에 경청하고 무조건 따라 주었다.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었다.
“메이의 말이라면 뭐든지.”
부모님 이외 ‘메이아’라는 이유만으로 믿어 주는 사람이 생겼다.
맹목적인 믿음. 사랑을 느끼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