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전 대공 부부가 돌아가신 이후 테오도르는 마음의 문을 닫았고,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았으며, 외롭게 홀로 지냈다.
주인님은 웃지 않았다. 모시는 분이 웃지를 않으니 대공가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그 삭막함에 짓눌려 있었다. 하지만 메이아의 등장 이후 대공가의 삭막함은 없어졌다.
그래서 감사했다.
“마차 한 대 들어오고 있구나, 한나.”
메이아가 바라본 방향으로 고개 돌린 한나는 말했다.
“푸링 님이 오셨나 봐요.”
“스승님은 아닐 거야, 한나. 오늘 또 다른 손님이 한 분 오기로 했잖아. 그 사람일 것 같구나.”
저번에 대공 저택 좌표를 받은 푸링이라면 굳이 마차를 타고 올 필요가 없다.
저택 입구로 텔레포트 하면 금방 도착하니 말이다.
그러니 마차를 타고 오는 사람은 푸링일 리가 없다.
한나는 웃으며 말했다.
“공녀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
무조건 믿어 준다는 한나의 말에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날 믿어 주는 건 좋지만 틀리면 원망할 거 아니야.”
“모시는 분의 말씀이 틀리지 않도록 움직이는 것이 아랫사람들 할 일입니다, 공녀님.”
가까이 다가온 마차의 문이 열리고 남색 머리카락에 중후한 멋을 지닌 30대 남자가 내렸다.
*
라키아 남작은 갑작스러운 테오도르의 부름에 대공가로 왔다.
‘왜 부르는 거지? 설마 걸렸나?’
그가 하는 은밀한 사업들은 돈을 벌어다 주는 만큼 매우 위험하다. 특히 인신매매는 최고의 쾌락과 금전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항상 조심히 운영했다.
‘왜 하필 걸려서!’
얼마 전 인신매매 소굴 중 한 곳이 발각되었다. 당연히 잡아 놓은 노예들은 풀려났고, 단원들은 전멸했다. 이 와중에 테오도르가 대공가로 오라는 편지를 읽고 난 뒤 심장이 철렁했다.
워낙 찔리는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플로렌스령은 무역이 활발하게 발달한 곳이다. 많은 배가 오고 가며, 그중 90%는 모두 플로렌스가 소유다. 그 일부를 라키아 남작이 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인신매매나 불법적인 일을 하는 데 활용하고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분명 배가 침몰했으니 새로운 배를 준다거나…….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어차피 가지고 있던 비밀 장부들은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라키아 남작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들킬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멍청한 대공은 자신이 인신매매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게 분명한데 괜히 혼자서 지레 겁먹고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플로렌스 대공저에 도착한 라키아 남작은 아름다운 부용화 장신구를 한 은발 미인의 모습에 놀랐다.
꿀꺽.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제까지 아름다운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앞에 있는 미인은 완전 저 세상 미모다. 라키아 남작은 숨 한 번 들이쉬고, 천천히 앞에 있는 미모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긴 은발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가려졌던 새하얀 목선과 팔목이 드러났다.
향기로운 백합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햇빛을 받은 푸른 눈동자는 신비로웠다.
심장이 힘차게 뜀박질했다.
쿵쾅쿵쾅.
‘아름다워.’
이성을 보고 오래간만에 뛰는 심장이 반가웠다.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부용화 꽃장식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운명이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목소리도 맑고 예뻤다.
“휴즈가의 라키아 남작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영애의 이름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이아 뒤에 서 있던 한나는 도끼눈을 뜨고 라키아 남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카르펜 제국에서 오신 하츠벨루아 공녀님이십니다.”
“시녀장 한나 님 아니십니까!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습니다. 아, 맞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소식이요?”
“얼마 전 세 번째 부인께서 돌아가셨다지요?”
한나의 말에 라키아 남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왜 하필 아름다운 공녀 앞에서 꺼낸 것인지! 눈치를 수프에 말아 먹었나!
“안타깝게도 지병이 있었습니다, 하하.”
떨떠름한 웃음을 내보이며 라키아 남작은 메이아를 슬쩍 곁눈질했다.
눈이 마주쳤다.
눈매를 곱게 접으며 고요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메이아를 본 라키아 남작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개졌다. 매혹적인 표정을 지은 메이아는 라키아 남작에게 나긋나긋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라키아 남작님 테오도르 대공님을 뵈러 오신 건가요?”
“예, 예.”
잠시 정신을 놓았던 라키아는 더듬으며 메이아에게 답했다.
“그러면 올라가 보세요.”
라키아 남작은 메이아에게 아쉬운 시선을 거두고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메이아가 익숙한 마력에 고개를 드니 눈앞에 푸링이 나타났다. 메이아의 예상대로 푸링은 텔레포트로 등장했다.
“스승님!”
“아이고! 메이아 공녀님.”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
“마중 나오신 겁니까?”
“스승님께서 오셨다는데 제자로서 마중 나와야죠.”
“편지 내용이 그런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저와 함께 갈 곳이 있습니다.”
메이아는 푸링과 함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메이아와 푸링 때문에 지키고 있던 고문관과 간수들은 깜짝 놀랐다.
“안녕하십니까! 메이아 공녀님.”
“루인츠를 불러와.”
“알겠습니다.”
의자에 앉은 푸링은 다급한 어조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인 겁니까? 흑마법이라니요!”
“제가 느낀 것이 맞았다면 흑마법일 겁니다, 스승님.”
메이아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생각보다 대공가에서 잘 지내서 다행이었지만 흑마법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면 절대 메이아를 그냥 두고 싶지 않다.
예전과 다르게 루인츠는 끌려오지 않았다. 저번보다 밝아진 혈색의 그는 메이아를 보자 깍듯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스승님, 저자가 루인츠입니다.”
밝은 모습의 루인츠는 꼬리를 붕붕 좌우로 흔들며 주인에게 달려드는 강아지 마냥 메이아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전에 손목과 발목에 감겨 있던 쇠사슬도 없어지고, 고문을 받지 않고 음식도 잘 먹어 그런지 확실히 얼굴이 좋아졌다.
“루인츠, 혀 내밀어.”
그녀의 말에 루인츠는 바로 혀를 내밀었다.
푸링은 손을 펴 그의 혓바닥에 힘을 집중했다.
“윽!”
“왜 그러세요? 스승님.”
푸링의 입에서 마법 주문이 흘러나왔다. 메이아는 그 주문이 소리 차단 마법이라는 걸 알았다.
“위험합니다.”
“스승님께서 위험하다고 말씀하신 거 보니 흑마법이 맞는 모양이군요.”
“어두운 마력이 저자의 혓바닥에서 느껴지는군요. 흑마법의 저주에 걸려 있습니다.”
푸링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루인츠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네는 특정한 단어를 말하면 혓바닥이 폭발하며 목숨을 잃을 거야.”
“설명해 주세요, 스승님.”
“주로 흑마법사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거는 문장의 저주입니다.”
푸링의 말을 들은 루인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흑마법이라니?
혓바닥 마법에 건 까닭은 혹시 모를 인신매매단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다.
분명 그렇게 들었고, 마법에 걸린 줄 알았지만 흑마법이라니…….
루인츠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갔다.
“그러면 풀 수 있나요? 스승님.”
푸링은 겁을 먹은 루인츠의 눈을 들여다보고 나서 입가를 살짝 움직이다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이 마법을 건 흑마법사가 주술을 풀어 주면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혓바닥을 자르면 됩니다.”
마법을 건 사람이 풀어 줄 리가 없다. 그렇다고 혓바닥을 잘라 낸다면 더는 말을 할 수도 없게 되는 거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결국 혀를 잘라야 하는 건가? 루인츠는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문장의 저주라면 그 문장을 말하지 않으면 되는 거죠?”
루인츠가 걸린 흑마법이라면 인신매매단의 정보나 위치를 발설하면 안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참고로 글씨로도 뜻을 전해도 폭발합니다.”
“루인츠, 너는 눈치가 빠르니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답해.”
“예.”
“와인 가게에도 옷감 가게 같은 지하실이 있을까? 저번에 지하실에 있던 다양한 옷감 천이 마음에 들었거든. 내 말뜻 알아들었지?”
와인 가게도 인신매매 소굴이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지하실의 다양한 옷감 천들은 지하실에 있던 노예들을 지칭한다.
“와인 가게에는 특별하고 맛 좋은 와인들이 가득합니다.”
“와인 가게가 어디지?”
루인츠는 침묵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와인 가게가 또 다른 인신매매 소굴이란 것이 확실해졌다. 이젠 위치만 알면 될 일이다.
“라키아 남작이 오늘 대공가에 방문을 하셨어. 이만 가 봐야겠어. 루인츠, 맞지?”
‘라키아 남작이 인신매매단과 관련이 있느냐?’라는 뜻이다.
메이아는 측은하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루인츠 네가 피해자인 거 알아. 누구나 혓바닥에 그런 마법이 걸리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 이번 일만 도와주면, 널 풀어 줄 거야. 자유롭게.”
‘아예 삶으로부터 풀어 줄 거야.’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루인츠의 눈동자엔 희망이 가득 찼다.
“손님이 오셨다면 얼른 가 보셔야죠. 안녕히 가십시오, 공녀님!”
“라키아 남작 그자라면 나에게 좋은 와인 가게를 안내해 주겠지?”
“당연합니다, 공녀님.”
이로써 라키아 남작이 인신매매단과 관련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자리에 일어선 메이아는 나가려고 했지만 푸링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공 각하에게는 이따가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너무 익숙한 흑마력이라 이자에게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익숙한 흑마력이라…….
“나중에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공녀님.”
“알겠습니다.”
*
“안녕하십니까. 휴즈가의 라키아 인사드립니다, 대공 각하.”
“라키아 남작, 잘 지냈나.”
“요번에 제 부인이 지병으로 장례를 치른 일 빼고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부인이 죽었군.”
덤덤하게 말하는 테오도르에게 라키아 남작은 질문했다.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번에 침몰한 배의 위치를 알려 주었으면 하네.”
보고서에는 태풍으로 인한 침몰로 기재했다. 허술하고 적당히 일하는 테오도르가 갑자기 배의 위치를 물어보는 까닭이 무엇일까?
‘바닷속에 가라앉은 배를 꺼낼 수도 없을 텐데 별일이야 있겠어?’
“알겠습니다.”
“저녁은 함께하지.”
“식사 초대 감사합니다.”
똑똑.
집무실 문을 노크하며 메이아가 들어왔다.
“라키아 남작님, 또 뵙네요.”
“오!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인사하는 둘의 모습을 보며 테오도르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라키아 남작은 공녀님을 알고 있군.”
“아까 저택 문 앞에서 뵈었습니다.”
라키아 남작의 시선은 메이아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 모습에 테오도르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라키아 남작은 나가 보게.”
“예.”
나가라는 테오도르의 말에 라키아 남작은 크게 아쉬워하며 시무룩해졌다.
좀 더 그녀와 대화하고 싶었는데 한나 시녀장부터 대공까지 그녀와 가까워지려는 데 방해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