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엄마, 대공님한테 미약이 통할까?”
한 사람의 입에서 세 명의 대화가 있는 그대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미약이 안 통하는 사람은 없다고 리키아 남작이 이야기했단다.”
“정말?”
“어머니, 그 미약이라는 거 여자한테도 통합니까?”
“그건 잘 모르겠구나.”
“라키아 남작님한테 물어봐 주시겠습니까? 어머니, 여자한테도 통한다면 메이아 공녀한테도 미약을 써 버리면 어떨까 해서요.”
“좋은 생각이구나. 엄마가 물어봐 주마, 애쉬.”
“네, 어머니.”
“잘 유혹해 보거라.”
“알겠습니다.”
“오라버니, 혹시 그 여자랑 결혼 생각 꿈에도 하지 마. 나 완전 싫어.”
“그리고 점술사를 통해서 다이애나는 아이가 잘 들어서는 날을 받아야 되겠구나.”
재현이 끝나고 스텔라의 초점 잃은 눈이 다시 빛을 찾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의 테오도르와 마주 보게 되었다.
이럴 때는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혹시 또 모르니 도청하도록 하겠습니다.”
테오도르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집안의 쥐새끼들은 놔두고, 라키아 남작을 도청해라. 미약을 어떤 경로로 입수하는지 알아내.”
“알겠습니다.”
“만에 하나, 노르딕 부인이 라키아 남작에게 미약을 건네받는다면 바로 보고해.”
싸늘한 눈빛으로 주위를 얼릴 것 같은 냉기 서린 목소리에 스텔라는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예상되었다. 보이는 모습은 침착해 보이지만 굉장히 화가 난 게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옆에 있는 메이아를 힐끔 쳐다봤다.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다. 무슨 생각을 하시고 있는 걸까?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스텔라.”
“예, 공녀님.”
“더러운 걸 듣게 했구나. 고생했어. 도움이 많이 되었어.”
생각지도 못한 칭찬과 위로의 말이었다.
스텔라는 지금까지 자신의 뒷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인상을 쓰고, 재현한 자신을 탓하며 욕하는 사람만 만나 봤다.
이렇게 재현을 하고 칭찬받는 일은 스텔라 생애 처음 있는 일이다.
“좋은 정보를 가져다줘서 고마워.”
계속되는 칭찬에 스텔라의 뺨이 붉게 변했다. 부끄러움에 말까지 더듬었다.
“아, 아닙니다, 메이아 공녀님.”
메이아는 일어서 스텔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대공가의 쥐새끼들을 다 잡을 때까지 스텔라가 조금 고생해 줘.”
너무나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메이아 공녀를 그 누가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네! 공녀님!”
“스텔라, 기대할게.”
메이아의 말에 스텔라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왜 같은 여자한테 심장이 두근거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절대 그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가득 차오르고 있다는 거다.
“공녀님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뭔가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이야기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대고…… 공녀님.”
하마터면 대공비 마마라고 할 뻔한 입을 다물며 스텔라는 방긋 웃었다.
그녀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자 메이아는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를 바라봤다.
“정말 더러운 쥐들이 더러운 짓만 하려고 하다니…….”
끓어오르는 용암 속에 몸을 넣어도 지금의 감정과 분노는 녹지 않을 거다. 이 분노가 사라질 수만 있다면 뜨거운 지옥 불에 몸이라도 던지고 싶을 지경이다.
“대공님.”
아무래도 메이아를 사랑한다고 매일 말하는 테오도르 관점에서 애쉬의 말은 자극이 심했을 거다. 물론 당사자인 메이아도 화가 난다. 부끄럽고 치욕스럽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그 셋을 잡아넣을 수 없는 현실을 인지해야만 한다.
화가 날수록 머리를 차갑게 시키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횡령에, 인신매매에, 미약에.”
테오도르는 몹시 속상하고 화가 났다. 그동안 너무 영지를 안일하게 다스렸다.
스스로 엄하게 잘 다스렸다면, 가신들이 횡령했을까?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고 있었을까?
“제가 잘 다스렸다면 이런 일을 없었을 겁니다. 모든 게 제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메이아 공녀님.”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적당히 넘어가던 과거의 후회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테오도르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쥐새끼들이 메이아 공녀님을 뒤에서 능욕하는 말을 들었을 때 제가 가장 누구에게 화가 났는지 아십니까?”
숙였던 고개를 든 그의 눈가는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바로 접니다. 저에게 화가 납니다. 왜 그동안 제대로 영지를 다스리지 않았던 거냐고! 가신들이 널 우습게 보도록 놔둔 거냐고요! 똑바로 다스렸으면 사랑하는 메이아 공녀님이 횡령범을 잡겠다고 이런 수고스러운 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더러운 말도 듣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후회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슬프다는 이유로, 나이가 아직 어리니 공부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적당히 일했던 모든 날이 후회스럽다. 되돌리고 싶을 정도로.
그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모든 걸 바로 잡고 싶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매일 밤 억지로 깨달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걸. 그리고 내가 이 넓은 플로렌스 대공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도. 매일 밤 부모님을 원망하고 그리워하고 화를 내도 받아 줄 부모님은 이제 없다는 걸 깨닫고 억지로 인정해야 했다.
매일 공부하면서 가신들에게 일을 맡기고 모든 걸 원망했던 지난날을 미치도록 지우고 싶다.
눈물을 흘리는 그에게 다가간 메이아는 그의 품에 조용히 안기며 말했다.
“후회한다는 건 그만큼 반성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녀의 얼굴 위로 눈물이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메이아 공녀님, 더러운 이야기 듣게 해서 죄송합니다.”
메이아는 아무런 말 하지 않은 채 테오도르를 껴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우는 그의 눈가를 계속 쓸면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털어 내야 해요.”
대체 쥐새끼들은 얼마나 대공가를 우습게 보는 걸까?
메이아는 속상하고 화가 났지만 지금 제일 속상하고 화난 사람은 앞에 있는 테오도르일 거다.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그는 많이 달라질 거란 예감이 들었다.
한참을 울던 그의 눈물이 어느 정도 멈췄다.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독한 후회로 얼룩진 얼굴에 마음이 아파져 왔다.
“죄송합니다, 메이아 공녀님.”
“메이.”
“네?”
“단둘이 있을 땐 이젠 메이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메이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테오도르 대공님.”
가뜩이나 눈물을 흘려서 붉어진 얼굴이 더욱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진심이십니까?”
“앞으로는 메이라고 불러요.”
“메이…….”
“테오? 테르? 테리? 오리? 대공님은 애칭이 뭐에요?”
“테오입니다.”
“우리 둘 다 비슷하네요. 애칭에 앞 글자 두 개만 따온 거.”
테오도르의 눈가에서 또 눈물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자꾸 눈물이 납니다.”
“제 앞에서라면 얼마든지 울어도 돼요.”
울리고 싶은 표정을 볼 때마다 자꾸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그에게 비밀이다.
“내일부터 쥐들이랑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요? 테오.”
쥐들에게 먹잇감을 던져 주고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모습을 즐겁게 감상할 것이다.
과연 최후에 남는 쥐 한 마리는 누가 될까?
“후회하고 반성했다면 더는 후회하지 않도록 모든 걸 바로잡죠.”
*
마탑에 있던 푸링은 데미안 황자의 독촉문을 계속 받으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물론, 답변은 항상 ‘의뢰받은 마법사가 못 찾고 있다’라고 답장을 했다.
데미안 황자가 또 찾아올 것 같은 스트레스에 푸링은 위가 쓰리기 시작했다.
그런 찰나에 애제자 ‘메이아 하츠벨루아’에게서 편지가 왔다.
내용은 달랑 세 글자였다.
[흑마법]
분명 메이아에게 흑마법 관련된 자가 있으면 도망가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흑마법이라니!
푸링은 놀란 나머지 자리에 마냥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설마 대공가에 무슨 큰 위기가 다가온 것인가?
메이아가 너무 걱정스러웠다.
푸링은 바로 짐을 챙기고 마탑을 나와 바로 텔레포트 하는 곳으로 갔다.
갈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나와 푸링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대마법사 푸링님, 안녕하세요!”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령으로 얼른!”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푸링은 대공가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를 지키던 기사들이 바뀌었군.’
“마법사 푸링입니다. 메이아 공녀님을 뵈려고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대공가의 문이 열렸다.
푸링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메이아는 가벼운 치장을 하고 저택 입구까지 내려가 기다리기 시작했다.
“공녀님, 편하게 방에서 기다리시지.”
“아니야, 한나. 밖에서 기다리고 싶어서.”
“그나저나 머리의 꽃장식이 매우 예쁩니다. 무슨 꽃이에요?”
“부용화.”
“부용화요?”
“예쁘지?”
“네.”
“한나도 꽃 장신구 하나 선물해 줄게. 무슨 꽃 좋아해?”
“괜찮습니다, 공녀님.”
“두 번은 권하지 않아.”
“네, 괜찮습니다.”
한나는 메이아를 겪으면 겪을수록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주인이 상사병을 겪으며 아파하는 와중에 공녀님만 찾을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속상했다. 상대방 여성분은 어떤 분일까? 괜찮으신 분일까? 예쁘기만 한 분이면 어쩌지?
많은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메이아를 만난 이후 걱정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은 둘째치고, 똑똑하고 말도 잘하며 무뚝뚝한 테오도르에게 힘이 되어 줄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 마음 씀씀이까지 매우 좋으신 분이다.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까다롭게 굴지도 않는다. 억지로 강요를 한다든가. 신분을 내세워 무시하지 않았다. 얼마 전, 무례한 다이애나 영애를 자애롭게 용서해 주는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시녀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었다.
<공녀님은 예쁜 것만이 다가 아니에요!>
<맞아요.>
<옆에서 모시고 싶어라.>
<머리카락은 신비롭고, 눈을 맑고, 오뚝한 코에 입술은 얼마나 앵두처럼 붉으신지.>
사용인들은 가장 귀족답고, 존경받는 주인을 모시는 것에 동경심을 품는다.
대공가에 일하는 많은 시종과 시녀들은 한 번이라도 메이아의 얼굴을 보기 위해 누가 공녀님의 식사 서빙을 할 것인지 두고 싸우기까지 해서 결국 순번제로 돌렸다.
한나는 솔직히 메이아에게 감사한 마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