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테스트할 거예요.”
아그니타 말에 수긍하는 쥬안의 눈빛은 매서웠다.
“저와 아그니타가 만든 테스트가 총 24가지 테스트가 있습니다. 이 테스트를 모두 통과한다면 ‘연인’으로는 인정해 드릴 겁니다.”
그리고 쥬안은 24가지 테스트 항목에는 키와 건강, 가족 관계 그리고 성격과 술버릇, 도벽이나 도박, 인간관계, 시종이나 시녀가 없을 때 메이아에게 해 줄 수 있는 것들로 머리 빗겨 주기, 얼굴 마사지해 주기, 발과 손 닦아 주기 등등이 있다고 설명했다.
“뭔 테스트가 시종 뽑는 것도 아니고!”
퀴니는 머리를 짚으며 이 자리에 하츠벨루아 공작가의 정원사 겸 정령사인 헬레나가 없다는 걸 감사했다. 그녀까지 있었으면 아그니타와 쥬안과 장단이 맞아 테오도르를 메이아 근처에도 못 오게 했을 거다.
“황태자 전하한테도 이 테스트했었냐?”
“약혼자이시기 때문에 48가지였습니다. 여기서 20가지 정도는 헬레나 님께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참고로 황태자 전하는 테스트 통과 못 하셨습니다.”
쥬안의 말을 아그니타가 이어 말했다.
“참고로 황태자 전하랑 약혼 취소되신 이후에 약혼자 테스트의 항목은 56가지로 늘어났습니다.”
순간 공작저에서 황태자에게 한 번씩 일어나는 이상한 순간들을 떠올린 퀴니는 한숨을 쉬며 체념하며 말했다.
“너희들 그러다 제 명에 못 산다. 솔직히 대공 각하처럼 조건 좋은 분이 어딨다고.”
“저희는 조건을 보는 게 아닙니다.”
“아가씨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뿐입니다.”
“대공께서는 아가씨를 진심으로 좋아하신다.”
“그건 그거고, 테스트는 테스트입니다.”
테오도르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퀴니였다.
*
저녁 식사 시간 때 메이아에게 한 방 먹은 다이애나는 결국 그 자리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 모습에 더 화가 난 테오도르는 노르딕 부인에게 자택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횡령을 한 책임을 묻기 위해 손님방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테오도르는 메이아를 에스코트하며 집무실로 함께 향해 걸어가며 대화를 했다.
“너무 너그러우신 처사입니다.”
테오도르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혀 너그럽지 않게 굴었는데, 테오도르가 보기에는 꽤 너그럽게 본 모양이다.
화내면서 씩씩거리는 그가 몹시 귀여워 메이아는 만족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차피 사라질 이들인데 그런 그들에게 감정 소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공님 화난 표정 풀어 주세요. 웃는 게 더 보기 좋습니다.”
화를 내던 테오도르의 얼굴이 약간 풀어지며 웃는 얼굴이 되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변하는 테오도르가 매우 귀여웠다. 남자가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걸까?
계속 웃고 있는 메이아를 내려다보던 테오도르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아 올렸다.
순식간에 둘의 눈높이가 맞춰졌다.
“전 정말 화가 났습니다.”
그녀의 귓가를 스친 나지막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대로 가슴에 꽂혔다.
그대로 허리를 따라 올라오는 손길로 인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싫지 않지만 낯선 감각을 갑작스럽게 느껴 버린 탓에 메이아는 테오도르의 품에서 살짝 버둥거렸다.
마침 그때 복도 모퉁이에서 나오는 시녀들이 테오도르와 메이아를 발견하고 얼른 뒷걸음치며 사라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메이아의 잇새로 짧디짧은 한숨이 나왔다. 사용인들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퍼질지 예상되었다.
“내려 주세요, 대공님.”
“알겠습니다.”
테오도르는 오른손으로 그녀를 안은 채 왼손을 뻗어 바로 앞에 있는 방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비어 있는 방으로 들어간 그는 그녀를 사뿐히 품에서 내려놓았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장난스럽게 씩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갑자기 방으로 왜 들어온 거지? 그의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긴장되었다.
그리고 머릿속엔 응접실에서의 키스가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볼이 붉어졌다.
“복도에서 막 껴안으시면 안 됩니다. 사용인들이 보고 뭐라 생각하겠어요.”
“그래서 빈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칭찬해 달라는 듯한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보니 웃음만 나왔다.
고삐 풀린 블랙 레트리버가 따로 없었다. 갑자기 예전에 아버지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개는 충성심이 강한 동물이다. 무조건 주인에게 충성하지. 하지만 고삐 풀린 개는 집착을 한단다.>
충성심과 집착은 한 끗 차이라고 해 주셨다. 아버지가 해 주었던 말이 떠오른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방 안에 단둘만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어느덧 자신의 심장도 바로 곁에 있는 그의 심장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뺨을 만지자 그는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야릇한 미소를 보였다.
그가 뭘 할지 예상이 되었다. 하지 말라고, 얼른 집무실에 가서 일이나 하자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손이 메이아의 목덜미를 가볍게 쓸어 감쌌다.
그리고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다가온 테오도르는 그녀의 붉은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계속 자잘한 입맞춤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의 손길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배회했다.
서로의 코끝의 들숨이 닿으며 날숨이 스치는 입술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벌리고 벌어져 서로의 호흡과 숨결을 주고받았다.
메이아는 강렬하고 짜릿한 감각 때문에 몸이 떨려 왔다. 처음에 부드럽고 가볍게 여겨졌던 입맞춤이 떨어져 나갔다 다시 하나가 될 때마다 더욱 뜨거워졌다.
첫 키스와는 사뭇 느낌이 많이 달랐다. 지독히도 서로를 원하는 듯한 깊은 갈증이 느껴졌다.
“공녀님…….”
“……네.”
“전 오늘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플로렌스 기념일로 만들고 싶습니다.”
“기념일요?”
테오도르는 오늘의 날짜를 기억하며 평생의 기념일로 삼을 작정이었다.
사람들은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고 한다. 테오도르는 솔직히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자제심 없는 한심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그들이 자제심을 잃는지 이제는 공감할 수 있다.
그녀의 입술은 나에게 달콤한 마약이다. 아니, 그 이상으로 중독시킨 신의 선물이다.
“신의 선물이 나에게 다가온 기념일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그런 존재야.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메이아를 본 테오도르는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왠지 지금 또 입맞춤이 하고 싶어서 보고 있습니다.”
그가 천연덕스럽게 말한 탓에 메이아는 귀까지 빨개지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집무실 가야죠!”
“저와의 키스가 싫으신 거는…… 아니겠죠?
눈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붉히는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 메이아는 당황한 감정을 내보이고 말았다.
“그걸 꼭 물어보셔야 되는 거예요?”
테오도르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너무 좋았습니다. 공녀님도 좋았습니까?”
그의 질문에 부끄러워 대답할 수 없었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감정을 제어하며 살아왔다. 감정을 내보이는 것은 약점을 보이는 거와 같아 화가 나도, 기뻐도, 슬퍼지더라도 그리고 당황하더라도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렇게 배웠으니까. 평생 감정을 표현할 일이 없을 거라 장담했었다.
그런데 테오도르를 만나고 자꾸만 감정이 밖으로 나온다. 배우고 지켜야 하는 규칙이 조금씩 무너져 갔다. 몸도 마음도 생각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
아무리 냉정하게 생각해 보더라도 그를 만난 뒤 자신은 조금씩 변해 가고 있다.
마음 저 뒤편에 숨어 있던 감정들이 벽을 허물고 나오면서 메이아는 테오도르와 보내는 시간에 즐거움과 만족감을 얻게 되었다. 이런 내 마음이 뭐냐고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도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그와 떨어져 있기 싫다고.
테오도르는 깊고 깊은 검은 눈동자를 드러내며 메이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이마에 닿은 감촉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메이아는 사교계의 꽃으로 사람들의 가문과 위치, 재정 상황 그리고 가족 관계도까지 빠짐없이 외웠다. 궁금하지 않아도 꼭 외워야 하는 것들. 그래서 그 누구에 대해서도 궁금하다는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그를 더 알고 싶다고 속삭인다. 그가 무슨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지, 평소에 어떤 책을 읽는지,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인지 사소한 거 하나까지 궁금해진다.
“사랑합니다, 공녀님.”
점점 다가오는 그의 숨결이 메이아의 입술 위에 포개졌다. 처음과 다르게 거침없이 입 안으로 들어온 열기가 서로를 한없이 휘감았다.
“입술이 너무 아파요.”
그의 키스는 멈출 줄 몰랐다.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니 멈췄다. 끝나고 나니 테오도르는 세상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아프다고 말 안 했으면 완전히 잡아먹히는 줄 알았다.
‘와, 이건 블랙 레트리버가 아니고 검은 늑대였어.’
“가셨던 일은 잘 풀리셨나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로먼에게서 중요한 단서를 자백받았습니다.”
“어떤 자백을 했나요?”
“인신매매를 하는 일당들이 플로렌스령을 오간다는 정보입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착잡하게 변해 갔다.
“로먼이 말한 배가 갑자기 분 태풍 때문에 침몰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수상한 냄새가 느껴졌다. 로먼과 인신매매 업자 중 한 명이 잡히자마자 배가 침몰이 되었다?
“과연 침몰이 우연한 자연재해였을까요?”
“저도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배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시나요?”
“라키아 남작입니다. 플로렌스 대공가의 가신이죠.”
“그 배가 주로 무엇을 가지고 들어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
“포도주와 천을 수입해 오고 타 제국에 소금을 수출했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던 메이아는 테오도르에게 말했다.
“저번에 그 루파츠인가 루인츠인가 그 사람 살아 있죠?”
“네,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로먼처럼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던 테오도르는 이어 말했다.
“자꾸 혓바닥을 보여 줍니다.”
“혓바닥이요?”
“처음에는 우리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혓바닥을 내미는가 싶었지만 그의 눈빛이 하도 억울해 보여서 고개만 끄덕이라 했죠. 그도 알겠다면서 끄덕거려서 질문을 하니 ‘예, 아니오’로만 말하더군요. 그리고 계속 혓바닥만 내미는 겁니다.”
메이아는 그의 말에 무언가 있다는 강한 직감을 얻었다.
“제가 그자를 만나 봐도 될까요?”
“너무 누추하고 더러운 곳입니다.”
테오도르는 그런 더러운 곳으로 메이아를 안내해 주고 싶지 않았다.
“납치당한 사람들이 마법 공간에 갇혀 있었어요. 그자가 자꾸 혓바닥을 내밀며 억울하다는 듯 눈빛으로 호소하는 거라면 마법과 관련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