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그 모습을 본 메이아는 테오도르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테오도르 대공님, 아무래도 예의 바른 노르딕 영애가 저를 부러워하는 마음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메이아를 보자마자 흐물거리는 표정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등에 입 맞췄다.
“무슨 말씀입니까?”
“테오도르 대공님이 성인식 때 입을 드레스를 저에게 선물로 주셨잖아요. 다이애나 영애가 그걸 듣고 몹시 부러웠나 봐요.”
메이아의 말 한마디에 다이애나는 남의 선물을 부러워하는 철없는 여자가 되어 버렸다.
“노르딕 부인의 1년 치 월급을 모아서 겨우 구매한 드레스를 또 입고 올 정도로 클레리라의 드레스를 매우 좋아하는 예의 바른 노르딕 영애니 제가 받는 선물이 부러울 만했겠죠.”
메이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다이애나는 모멸감을 느꼈다. 신상 드레스 이야기는 참아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런데 메이아 공녀님, 노르딕 영애를 지칭할 때 왜 ‘예의 바른’이라는 말을 붙이시는 겁니까?”
“스스로 예의가 바르다고 말씀하셔서요.”
그 이야기를 들은 테오도르는 눈매가 좁아졌다.
“제게 예의를 갖추며 질문도 해 주셨답니다.”
“무슨 질문을 받으셨습니까?”
“대공님하고 제가 사이가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메이아의 목소리는 산뜻했지만 그 안에 담긴 말은 무거웠다.
미혼의 남성이 미혼의 여성에게 그것도 성인식에서 옷을 선물로 준다는 건 연인 사이 내지는 앞으로 연인이 될 사이라는 걸 뜻한다. 그러니 다이애나가 메이아에게 테오도르와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는 것은 실례되는 일이다. ‘둘 사이가 연인 사이인 걸 인정할 수 없다’라는 의도를 가지고 묻는 것이니 시비를 건 거라 볼 수 있다.
물론 친한 사이끼리 확인차 물어볼 순 있다. 그렇지만 메이아와 다이애나는 친한 사이가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 자체가 그녀와의 사이를 부정당한 기분에 테오도르는 불쾌감이 일어났다.
“그런 질문을 하면서 스스로 예의 바르다?”
다이애나는 눈앞이 아찔해지기 시작했다. 메이아가 대놓고 이렇게 저격할 줄은 몰랐다.
의자에 앉아 있던 노르딕 부인과 애쉬는 자리에 일어나 테오도르에게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 딸아이가 철이 없었습니다.”
“제 여동생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메이아는 애쉬와 노르딕 부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왜 사과를 하십니까? 사과할 일이 아니니 아까도 조용히 계셨던 거 아닙니까?”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분노가 일어났다. 자신이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예의 없이 무슨 사이냐고 되물으며 실례를 저지르고, 사과 또한 바로 하지 않았다니!
노르딕 부인은 테오도르의 표정을 읽고 그가 무척 화가 났다는 걸 감지했다.
“죄송합니다.”
그들은 고개를 숙였고, 식당 안은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가 되었다.
메이아는 침묵하며 그들을 보았다.
노르딕 부인은 팔꿈치로 다이애나를 찔렀다. 그녀는 마지못해 일어서 메이아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츠벨루아 공녀님.”
메이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 숙인 다이애나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
“부러우셔서 그런 거잖아요. 영애의 사과받는 내 마음이 편치가 않네요.”
그 모습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메이아는 허리 숙인 다이애나를 일으켜 세운 뒤 인자한 표정으로 그녀만 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내가 말했잖아. 질문 속에 예의를 담아 말하라고.”
말이 끝나자마자 허리를 들고 방긋 웃는 그녀는 누가 봐도 자비로운 귀족이었다.
다이애나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목덜미와 귀까지 벌겋게 물들었다.
수치스러움을 느끼며 서 있는 자세에서 굳어 버렸다. 주위 사용인들의 동정 어린 눈빛에 자신감은 갈가리 찢어졌다. 메이아는 그 모습을 보며 눈썹을 매혹적으로 내리깐 채 붉은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리며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다이애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온 다이애나는 그대로 침대로 쓰러지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메이아에게 한 방 당한 것이 너무 부끄러워 대공저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평생 이렇게도 억울하고 원통하고 수치스러움을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방에 따라 들어온 노르딕 부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그녀를 위로했다.
“아가, 울지 말렴.”
“흑흑, 엄마 그 여자가 마지막에 나한테 뭐라고 속삭였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
“나대면 죽여 버릴 거래.”
“뭐? 누굴 죽여?!”
감히 사랑스러운 내 딸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화가 났다. 사용인들 앞에서 온갖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며 인자하게 굴더니만 실상 ‘내숭’을 떨며 몰래 다이애나에게 무서운 말을 하다니…….
“공녀는 무서운 여자구나…….”
“나 대공비 못 될 것 같아. 이미 두 사람 사귀는 사이일 거야……. 드레스 선물이라니!”
“엄마가 꼭 치워 줄게. 응? 우리 딸이 대공비 될 거니까 이 엄마만 믿어.”
“흑, 엄마.”
“애쉬, 공녀를 치워 버릴 방법은 없겠니?”
옆에 있던 애쉬는 모녀를 쳐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공녀는 보통이 아니라는 건 요번에 확실히 느꼈습니다.”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
“누명을 뒤집어쓰게 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죠.”
그의 말에 다이애나는 더욱 서럽게 베개에 얼굴을 묻고 대성통곡하며 울었다.
노르딕 부인은 그런 딸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연인 사이일 뿐이야. 헤어지면 남이 되는 가벼운 사이. 어차피 가신들은 널 ‘대공비감’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들에게 준 뇌물만큼 다이애나가 대공비 되는 걸 찬성해 주기로 했다.
“모두 날 대공비라고 해도 대공님이 날 거절하면…….”
메이아와 결혼이나 약혼을 한다고 테오도르가 이야기한다면……. 그 전에 수를 써야 한다.
“걱정 마. 여자를 거절할 남자는 없단다, 다이애나.”
이럴 때는 무조건 ‘육탄전’이다. 약간의 미약을 사용하면 될 일이다.
대공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만든 다음, 다이애나를 대공 침대 안에 밀어 넣으면 된다.
열일곱 살 혈기 왕성할 사내가 아름답게 벗은 여인을 거부할 리가 없다.
약에 취해 합방하게 된다면 다이애나는 대공비가 되는 것이다.
순둥순둥한 대공은 책임을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메이아는 충격을 받고 떠나겠지!
생각을 마친 노르딕 부인은 다이애나를 살살 다독이며 말했다.
“다이애나, 어차피 식장에 손잡고 들어가기 전까지는 남녀 사이 일은 모른단다.”
노르딕 부인의 말에 다이애나는 화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네, 어머니.”
“라키아 남작과 만나야 되겠구나. 그가 도와줄 거다.”
라키아 남작이라면 ‘미약’을 얼마든지 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란다.”
*
“메이아 공녀님, 너무 멋있는 것 같아…….”
“무례하게 군 노르딕 영애를 오히려 용서하시는 모습을 보니깐 옆에서 모시고 싶어.”
아그니타는 시녀들이 말하는 메이아의 칭찬을 들으며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몹시 화도 났다.
그녀가 시킨 일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 다이애나인지 다이나인지 하는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자신의 아가씨를 모욕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몸 안의 장기가 뒤틀리며 울컥거림이 멈추지 않고 솟아올랐다. 연무장의 허수아비라도 때리지 않으면 이 기분은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그때 다른 시녀들의 대화 소리에 아그니타는 귀를 쫑긋했다.
“있잖아. 대공 각하와 공녀님 두 분 사귀시는 거겠지?”
“내가 볼 땐 사귀신다에 한 표.”
“드디어 노력 끝에 주인님 마음을 받아 주시기로 한 게 확실하다니깐.”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다들 누가 누구와 사귄다는 거예요?”
아그니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그니타는 자리에 없어서 몰랐겠구나.”
“대공 각하께서 공녀님 성인식날 드레스 선물을 하신대!”
“예?”
그 말을 듣자 아그니타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대공 각하와 연인 사이니깐 드레스 선물 주고받는 거 아니겠어?”
“공녀님이 대공비 되는 건 시간 문제겠는데.”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복도에 숨으셔서 공녀님 나오는 거 기다리는 모습 보고 얼마나…….”
아침에 눈 뜨면 메이아를 찾아가고, 잠들기 전 그녀 곁을 지키다 방으로 돌아가는 그 모습이 사용인들 눈에 너무 안쓰러웠다.
“나도 모르는 척하느라 혼났어.”
“노력 끝에 사랑을 얻는다잖아. 정말 잘됐어.”
시녀들의 말에 아그니타의 표정이 굳어 가기 시작했다. 자리 비운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드레스 선물을 막 받으실 분이 아닌데…….
아그니타는 테오도르 때문에 메이아와 있는 시간이 부족해 스트레스만 쌓여 가는 와중, 두 사람이 사귄다는 말을 들으니 흐르는 질투심에 속이 활화산처럼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당장에라도 쥬안을 끌고 연무장으로 가서 대련을 하고 찬물 샤워를 하지 않는다면 가슴이 터질지도 모른다.
‘우리 아가씨를 대공이 꼬드기다니……!’
굳은 표정으로 이를 으득으득 가는 소리를 들은 시녀들은 아그니타의 눈치를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래도 우리 대공 각하. 능력도 좋으시고, 잘생겼고, 키도 크시고, 돈도 많으시고.”
“절대 바람피우지도 않으실 분이야.”
“쓸데없이 부부 사이를 간섭할 사람도 없어.”
“거기다가 연하남이잖아.”
“맞아.”
시녀들은 아그니타가 광적으로 메이아에게 집착하고 충성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그니타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며 어두운 표정의 쥬안이 스멀스멀 나타났다.
으드득.
그는 나타나자마자 이를 그득그득 갈았다.
“아그니타.”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오라버니.”
시녀들은 남매의 불길이 일어난 눈동자를 보고 깨달았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저는 잠시 오라버님과 할 이야기 있어 자리 비우겠습니다.”
남매는 곧장 퀴니의 방으로 찾아갔다. 아그니타는 시녀들의 대화 내용을 말해 주며 분해했다.
그런 그녀를 퀴니가 혀를 차며 말렸다.
“젊은 남녀가 사귈 수도 있는 거지.”
“아가씨가 아깝습니다.”
“아그니타, 카르펜 제국의 황자비나 황후 마마보다는 시리우스 제국의 대공비가 훨씬 낫지.”
“아깝습니다.”
퀴니는 한참을 남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시종일관 우리 아가씨는 최고니까 테오도르에게는 아깝다는 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