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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70화 (70/163)
  • 70화

    “사랑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듣는 그의 고백에 부끄러워 그의 시선을 피하자 테오도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싫으시면 그만하겠습니다.”

    그는 잔뜩 풀 죽은 얼굴을 한 채 괴로워했다. 그 모습에 메이아는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저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몰라요.”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이 무엇인지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제 마음을 대변할 단어가 ‘사랑’이란 것밖에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진지하게 계속 말했다.

    “너무나 소중하고 좋아해서 언제나 메이아 공녀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소중하다는 말은 부모님에게 들은 이후 처음이었다.

    “메이아 공녀님이 저에게 가장 소중합니다. 제 목숨보다도 더 말이죠.”

    숨결까지 스칠 듯한 거리에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자신과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도 못하고 도망만 다니던 남자가 이제는 오히려 자신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한다.

    “공녀님은 절 사랑하게 될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세요?”

    “그렇게 만들어 볼 테니 곁에 있는 걸 허락만 해 주세요.”

    그가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올곧은 검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말한다.

    진심이라고…….

    그의 말이 부담스럽거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고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왜 이렇게 그의 말에 기분이 좋은 거지? 왜 계속 쿵쾅거리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는 거지?

    자꾸 입꼬리가 올라간다. 메이아는 테오도르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나직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어보았다.

    “허락하면 전 대공님과 사랑하게 되나요?”

    테오도르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싫으면 밀어내 주세요.”

    손목에 닿아 오는 그의 손가락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인지 몰라도 뜨거운 열기가 발끝부터 올라오는 바람에 머리 꼭대기까지 녹아내리는 것 같다.

    처음 느끼는 감각에 온몸이 긴장됐다. 자신도 모르던 또 다른 나를 그가 끄집어 꺼내는 것 같았다.

    “공녀님…….”

    그의 뜨거우면서도 가라앉은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사랑한다 속삭이며 귓가에 내려앉았다.

    *

    저녁 시간이 되고 식당에 먼저 들어온 사람은 노르딕 부인과 애쉬 그리고 다이애나였다.

    어느새 다가온 부집사 켈베인은 노르딕 부인이 앉을 의자를 빼 주었다.

    오늘 자기들 이외에도 손님이 한 분 더 있다고 했다. 같이 저녁을 먹자는 이야기에 우선 알겠다고 했는데 과연 대공 각하를 찾아온 손님이 누구일까? 노르딕 부인은 켈베인에게 물었다.

    “대공 각하의 손님이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주인님 손님이 아니고, 공녀님 손님이십니다.”

    노르딕 부인은 눈썹을 찌푸렸다. 타 제국 공녀가 대공저에 있는 것도 기가 막힌 상황인데 자신이 도맡아 왔던 안살림까지 하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그녀의 손님을 대공 각하께서 직접 맞이해 준다는 건 꼭 메이아를 대공비처럼 대하는 것 같아 불쾌감이 치솟았다.

    어떻게서든 이곳에서 쫓아내야 된다. 마법사만 아니라면 납치라도 해서 치워 버릴 텐데…….

    노르딕 부인의 턱에 힘이 들어가자 이에서 꽈드득 소리가 났다.

    “부인, 불편한 게 있으십니까?”

    “불편한 거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베나블 집사장님이 안 보이십니다.”

    평소 같았으면 베나블이 마중도 나오고 응접실 안내도 직접 그가 해 줬는데 오늘은 켈베인이 나와 의아했다.

    “지금 공녀님 손님을 접대 중이십니다.”

    “……그렇군요.”

    고요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노크 소리와 함께 베나블이 들어왔다. 노르딕 부인은 그를 보자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베나블 집사장님, 오래간만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노르딕 부인.”

    “예,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잘 지냈습니다. 몸은 이젠 괜찮아지셨습니까?”

    “많이 좋아졌답니다. 다시 대공가 안살림을 도울 만큼요. 베나블 집사님 평소보다 많이 바쁘셨나 봅니다.”

    노르딕 부인의 어조는 왜 부집사 켈베인이 자신들을 안내하게 했냐는 듯 따져 묻는 것 같았다.

    베나블은 눈썹을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공녀님 손님을 접대하고 있었습니다.”

    “손님이요?”

    그리고 베나블을 따라 들어온 손님의 얼굴을 보고 다이애나는 깜짝 놀라며 외쳤다.

    “디자이너 클레리라! 여긴 어쩐 일로.”

    “노르딕 영애! 여기서 다 뵙네요. 어쩐 일은요. 메이아 공녀님의 초대를 받아 왔답니다, 호호.”

    켈베인이 메이아의 손님이 왔다 말했는데 그게 설마 클레리라일 줄 몰랐던 다이애아는 당혹스러움과 반가움을 담아 인사했다.

    “그럼 하츠벨루아 공녀님의 손님이 디자이너 클레리라였나요?”

    “네.”

    그 말에 다이애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기가 그렇게 많은 드레스를 구입했는데도 클레리라는 모임 한번 얼굴을 비추지 않았었다.

    “많이 친한 사이인가 보네요. 공녀님하고.”

    “메이아 공녀님과 친한 사이가 되고 싶어서 왔습니다, 노르딕 영애.”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부른다고 온 것인가? 다이애나는 클레리라의 말 한마디에 자존심이 더 뭉개졌다. 식당에 시종 한 명이 들어와 문을 열며 말했다.

    “플로렌스 대공 각하와 하츠벨루아 공녀님께서 들어오십니다.”

    흡사 대공 부부가 입장한다는 듯 말하는 것 같았다.

    다정한 얼굴의 테오도르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오는 메이아의 모습을 애쉬는 넋 놓고 바라보았다. 곱게 틀어 올린 은발의 머릿밑으로 드러나는 곡선의 부드러운 어깨선과 가느다랗고 하얀 목선이 매혹적이었다. 무릎까지 딱 달라붙은 의상은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넘쳐흘렀다.

    애쉬는 걸어 들어오는 메이아를 눈에 담으며 감탄했다. 아름답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여자를 만나 보았지만 저렇게 고혹적이며 우아한 미인은 본 적이 없었다.

    새삼스레 그녀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들어오는 테오도르를 끓어오르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쳐다봤다.

    애쉬의 시선이 느껴지자 테오도르 또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순간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 어색함을 눈치를 챈 클레리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대공 각하, 저녁 식사 초대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호호.”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섬세하고 다정하게 메이아가 앉을 의자를 빼 주었다.

    “고맙습니다, 테오도르 대공님.”

    “당연한 일입니다.”

    다이애나는 테오도르가 빼 준 의자에 익숙하다는 듯 앉아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메이아가 미웠다.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지만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

    그 와중 클레리라는 황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제 역작 중의 역작 드레스를 소화해 주실 분은 공녀님밖에 없으시다니까요. 매우 아름다우십니다!”

    클레리라의 말에 다이애나는 그녀를 쳐다보며 물어보았다.

    “저 드레스가 클레리라 작품인가요? 저런 건 가게에서도 본 적이 없어요.”

    “당연하죠. 저 드레스는 오로지 공녀님만을 위해 만든 단 한 벌의 드레스니까요.”

    그 말에 다이애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저릿저릿한 질투를 억누르며 말했다.

    “하지만 공녀님께선 클레리라의 드레스를 입지도 않고 경매에 보내 팔았다고 하던걸요.”

    클레리라는 정말 모르느냐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자선 경매에 내놓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노르딕 영애.”

    “자선…… 경매요?”

    경매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정말 이익을 내기 위한 경매와 귀부인과 영애들이 참여하는 자선 경매다.

    메이아는 입매를 스르르 풀며 여유 넘치는 눈빛으로 다이애나를 쳐다보았다.

    “노르딕 영애는 드레스를 경매에 내놓는다는 의미를 잘 모르는 모양이군요.”

    메이아의 눈에는 다이애나가 어떻게서든 깎아내리기 위해 자신이 했던 말을 꺼내며 나쁘게 몰아가려고 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 언행이었다.

    메이아가 참여하는 경매는 자선 경매다. 좋은 물건을 팔고 받은 돈으로 어려운 평민들은 돕는 일이다. 그렇기에 자선 경매에 내놓을 때는 저렴한 걸 절대 내놓을 수 없다.

    그건 흠 잡히는 일이다. 황태자의 약혼녀에 공녀의 위치에 있으면서 저렴한 물품을 내놓는 건 경매를 연 귀부인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귀족에게 있어 자선 경매는 자신들의 재력을 보여 주는 것이고, 더불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행위다.

    디자이너 클레리라는 자신의 드레스가 자선 경매에 나가는 걸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건 다른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에게 어설프게 경매까지 싸잡아 돌려 까는 이야기를 하니 스스로 ‘나 무지해요, 나는 그런 자선 경매 참여해 본 적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혹시 노르딕 영애는 자선 경매에 참여해 본 적이 없으신가 보군요.”

    다이애나의 표정에 당황이 깃들었다.

    “저런, 안타까워라.”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다이애나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보니 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테오도르 대공님, 시리우스 제국에는 자선 경매가 없나요?”

    “있습니다. 주로 황궁에서 열리는 편인데 제가 다음에 모시겠습니다.”

    “고마워요, 테오도르 대공님.”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울 것 같은 얼굴로 앉아 있는 다이애나를 보며 메이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고작 이런 거에 자신에게 시비를 걸다니 우스웠다.

    “디자이너 클레리라.”

    “예, 대공 각하.”

    “공녀님이 입을 성인식날의 드레스는 금전적인 걸 생각하지 말고 만들어 주면 좋겠습니다.”

    메이아의 성인식 날은 테오도르 본인에게도 아주 중요한 날이 되었다.

    응접실에 단둘이 남아 그녀에게 고백하며 마음을 전했다.

    심장이 너무 터질 것같이 아파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 주는 것 같아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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