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디자이너 클레리라는 메이아가 보낸 편지를 받으며 감격했다.
“세상에, 공녀님께서 내게 편지를!”
카르펜 제국의 고귀한 사교계의 꽃!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 그게 바로 메이아 하츠벨루아였다.
그녀가 옷을 입는 것만으로도 디자이너들 사이에선 자랑이 된다.
클레리라 또한 신작 드레스가 나오면 그녀에게 먼저 보내곤 했다.
물론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로 보낸다.
그렇지만 그녀가 황태자의 약혼녀 자리에서 물러나며 마탑으로 가 버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더는 하츠벨루아 공작저에 신작 드레스를 보낼 수 없게 되어 많이 아쉬웠다.
각 제국에 사교계 꽃들은 존재하지만 메이아처럼 귀족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는 귀족 영애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를 꼼꼼히 읽어 보던 클레리라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뒤로 한 채 편지를 가져다준 쥬안에게 말했다.
“세상에 시리우스 제국에 계시다니…….”
편지의 내용은 성인식 드레스 상담을 위해 방문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일주일 뒤에 와 줬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요청에 클레리라는 고민하지 않았다.
“가겠습니다!”
쥬안은 끄덕이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신경질적이면서 드레스 금액만큼은 많이 주는 손님인 다이애나 노르딕 영애가 일주일 안으로 신작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피우고 있지만 안 팔아도 그만이다.
“의뢰를 받아 버렸으니 만들어야 되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의뢰 안 받는 건데! 그래. 5일 정도 무리하고, 하루 푹 쉬고, 7일째 공녀님을 뵈러 가면 되지.”
먼저 약속한 노르딕 영애의 드레스를 밤샘해서 만들어야 하지만 메이아를 만날 수 있다는 일만으로도 클레리라는 힘을 낼 수 있었다.
디자이너 클레리라는 아직도 생생하게 메이아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누구라도 굴복시킬 수 있는 우아한 기품과 푸른 눈동자에서 비치는 위엄은 아무리 나이를 먹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쉬이 가질 수 없는 것이건만, 바로 그런 카리스마를 메이아는 갖추고 있었다.
응접실 문이 열리자 메이아는 큰 키에 수려한 외모의 흑발 미남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왔다.
“어머! 공녀님!”
해맑은 미소로 메이아에게 다가가던 클레리라는 자신의 인어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나타난 그녀를 보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감동했다.
자신이 만들었지만 정말 최고의 작품과 최고의 모델이 만나 사교계에 한 획을 그었던 드레스다.
“메이아 공녀님!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 인어 드레스를 입어 주시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호호.”
메이아는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디자이너 클레리라.”
클레리라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 잊고 있던 영감이 자신을 소용돌이처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숙여 메이아의 오른쪽 손등에 이마를 닿게 하여 인사했다. 오른손에 이마를 닿게 하는 인사는 ‘존경’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베르튼가의 클레리라가 하츠벨루아의 메이아 공녀님에게 인사 올립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디자이너 클레리라. 절 에스코트하시는 분은 플로렌스 대공가의 주인, 테오도르 대공님이세요.”
“안녕하십니까. 초대 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베르튼가의 클레리라라고 합니다. 드레스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메이아 공녀님의 손님이면 저한테도 손님입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집사 베나블이 아름다운 은색 식기 세트가 담긴 트롤리를 밀며 들어왔다.
“자리에 앉죠.”
“네! 공녀님.”
메이아가 소파에 앉자 테오도르 역시 그녀 옆에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베나블은 바로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차와 다과 종류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클레리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베나블에게 친절한 설명을 해 주셔서 감사하다 말했다.
그리고 베나블은 빈 트롤리를 끌고 나갔다. 차 한 모금 음미한 뒤 클레리라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소문으로는 마탑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클레리라, 마탑 말고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없나요?”
“너무 많죠! 플로렌스 대공님하고는 무슨 사이시길래 여기 계시나요?”
클레리라의 질문에 메이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내 미소 지으며 답을 주었다.
“무슨 사이일지는 조만간 알게 될 거예요.”
클레리라는 슬쩍 테오도르를 쳐다봤다. 메이아를 바라보는 테오도르의 눈빛에서 꿀이 폭포처럼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빛이다. 설마? 연인 사이?
메이아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알려 주세요! 공녀님.”
“아마도 제 성인식 날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예요.”
클레리라는 메이아 옆에 얌전히 앉아 있는 테오도르를 다시 쳐다봤다.
그는 자신과 인사 한 번 한 뒤에 오로지 메이아에 시선을 고정할 뿐이었다.
메이아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런 그를 쳐다보며 다정히 웃어 주었다.
둘 사이에는 녹아내린 설탕물에 꿀을 넣고, 생크림까지 잔뜩 올려놓은 듯한 달콤함이 느껴졌다.
부모님이 행방불명이 되어 시신도 없이 억지로 장례식을 치르고 약혼자와 파혼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낼까 걱정했었는데……. 클레리라는 메이아를 웃게 해 준 테오도르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다행입니다.”
클레리라의 갑작스러운 말에 메이아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힘든 일이 한꺼번에 많이 일어나서 저는 공녀님께서 힘드실 거란 생각에 걱정했습니다. 지금 대공 각하와 웃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됩니다.”
클레리라에게 있어 메이아는 영감만 주는 상대가 아니다. 그녀가 황후가 되면 그녀 곁에서 보필해 주는 시녀가 되고 싶었다. 집안에서 반대하던 드레스를 만드는 일도 그리고 자신의 드레스가 고가에 팔리는 것 전부 메이아의 말 한마디에 시작되었다.
<베르튼 백작님, 클레리라의 드레스를 제가 구매해서 입고 싶어지네요.>
<제가 구매하는 드레스가 이렇게 저렴한 건 싫어요. 클레리라, 돈 주고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걸 만들어 줘요.>
클레리라는 드레스를 만들 때 행복을 느꼈고 메이아의 도움으로 무척 행복해졌다. 그러니 그녀 또한 행복해져야만 한다. 그러니 도움이 된다면 뭐든 할 것이다.
“성인식 때 입을 드레스를 만들어 줄 수 있나요? 클레리라.”
“당연하죠. 그렇지 않아도 영감이 마구 샘솟습니다.”
“기대해도 되겠죠?”
“물론입니다.”
메이아는 갑자기 손뼉을 치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노르딕 영애를 아시나요?”
“네. 잘 압니다. 단골이십니다.”
“단골이요?”
“일주일에 한 벌은 꼭 구매해 주시는 단골이라 기억합니다. 보통 자작 영애가 저희 드레스 입기란 ‘사치’잖아요. 그래서 기억하고 있는 영애기도 하죠.”
메이아는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앞으론 노르딕 영애가 드레스 살 일은 없을 거예요.”
클레리라 입장에선 다이애나가 드레스를 구매하든 말든 상관이 없다.
“그녀의 집안이 곧 망할 예정이거든요.”
클레리라는 그제야 이해했다.
“그렇군요.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노르딕가에서 지금까지 구매했던 걸 적어 놓은 장부가 필요해요. 선물용도 포함해서요.”
메이아의 입술은 미소 짓고 있었지만 푸른 눈동자는 한없이 차가웠다. 그녀의 눈빛에 온몸이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달콤한 영감이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전부 다요.”
“알겠습니다, 공녀님.”
“쥬안을 보낼게요.”
“예. 맞다! 공녀님 신문 기사에 나신 거 봤어요!”
“신문 기사요?”
“유람선에서 해적들을 소탕하시고 사람들을 구해 주신 거요!”
마탑으로 가기 위해 탑승했던 유람선의 일이 기사로? 기자가 타고 있었던 건가.
분명 볼 사람들은 다 봤겠네. 평소에는 신문 기사를 매일 보지만 여기 와서 놀다 보니 신문마저 제때 읽지 않았다.
“유람선에 제 동생이 타고 있었거든요.”
“아…… 기자를 한다던 아쉴롬 영식 말씀하시는 거죠?”
“말도 마세요. 지금 메이아 공녀님은 영웅이라며 모두가 칭송해요!”
“저 살려고 해적들을 잡았을 뿐인데 영웅이라 말하니 부끄럽네요.”
클레리라는 웃음과 함께 “아니에요. 영웅이세요.”라고 말하며, 식사 시간이 되기 전까지 그들은 즐거운 담소를 계속 나누었다.
“저녁 먹기 전 클레리라가 오늘 하룻밤 잘 손님방으로 안내해 줘요, 베나블.”
“예, 공녀님.”
클레리라는 베나블을 따라 응접실을 나갔다.
응접실에 메이아와 테오도르 단둘만 남겨졌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그녀를 짙은 눈동자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제 성인식날에 대해 안 궁금하세요? 무슨 일이 생길지?”
그의 커다란 몸을 숙이며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저는 공녀님을 사랑합니다.”
디자이너 클레리라하고 나눈 대화에 대해 물어볼 줄 알았는데 생각과 다르게 사랑한다면서 고백했다.
궁금할 법도 한데, 안 궁금한 건가? 자기들이 어떤 사이가 될 것인지 그리고 성인식날 무엇을 알게 될지 왜 안 물어보는 거지? 오히려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안 궁금하세요?”
“전 언제나 기다릴 뿐입니다.”
“무엇을요?”
“공녀님이 필요하다면 저에게 말해 주시겠죠.”
부드러운 그의 눈빛에 홀려 메이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은 상대가 답을 정확하게 줄 수 있을 때 묻는 게 가장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때 되면 알게 될 텐데 굳이 지금부터 답을 달라며 공녀님을 귀찮게 만들거나 불편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메이아의 심장이 경보음이 울리는 마법 알람시계처럼 정신없이 울려 댄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끌어당기며 품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그의 달콤한 체향을 계속 맡으면 안도감이 커져 간다.
“껴안는 것이 불편하십니까?”
불편하냐고 묻는 그에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테오도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굴이 밝아졌다. 막무가내로 자신을 품으로 이끄는 그에게 혐오감도, 거부감도 전혀 생기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올리며 손등에 몇 번이나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메이아는 테오도르의 손등 입맞춤을 의식하자마자 얼굴에 열이 확확 올라오는 걸 느꼈다.
“저는 메이아 공녀님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계속 손등에 입을 맞추고 껴안고 싶습니다.”
그의 후진 없는 고백에 어떤 얼굴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그의 모든 말이 기분을 좋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점점 얼굴이 뜨거워지고 있었다.